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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밀양사건과 공감부족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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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3-10 19:54:29 수정 : 2016-03-10 19:5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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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게시판에서 봤는데 그 여자가 평범하지는 않았나 보던데요. 왜 좀 ‘그런’ 스타일 있잖아요.”

최근 한 취재원과 식사 자리에서 데이트 폭력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시작은 신입 사원의 사내 연애에 관한 얘기였는데 대화가 이별 이후 문제로 넘어가며 자연스럽게 데이트폭력으로 연결됐다. 이야기는 번지고 번져 이별 통보에 여자친구를 감금하고 폭행한 대학생부터 남자친구 집에 불을 지른 20대 여성, 동거녀가 바람 피운다고 의심하고 살해한 50대 남성, 심지어 대학교 MT에서 동기를 성폭행한 사례까지 몇 달 새 언론에 등장한 모든 잔혹한 폭행 사례들이 쏟아져나왔다. 모두들 무서운 세상이 된 사회에 통탄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불쑥 한 여성을 지목하며 인터넷에서 봤다며 피해자의 ‘특성’에 대해 얘기했다. 피해 여성이 남자를 홀려놓고 헷갈리게 하는 여우, 혹은 헤픈 여자인 ‘그런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유의 발언이 대개 그렇듯 “남자가 잘못한 건 맞다”라는 말도 뒤따라 붙었다. 그리고 결론도 뻔하게 났다. 딸 키우기 무서운 세상으로. 

정진수 사회2부 기자
이런 대화는 사실 일년에 한두 번꼴로 나온다.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최근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떠올리면 편치 않다. 밀양 사건은 최근 시청률 10%를 넘어서며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블 드라마 ‘시그널’에 등장하면서 재조명받고 있다. 이미 12년이 지난 해묵은 사건이다. 그럼에도 네티즌들은 사건 개요 퍼나르기, 가해자 신상털기, 관련자 소속기관에 비난글 달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이 분노는 총 44명의 고등학생들이 여중생 성폭행에 연루돼 10명이 기소된 충격적 사건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을 두둔하고 나선 수많은 공조자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수사가 진행된 1년여간 “딸자식을 잘 키워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어머니와 “먼저 꼬리친 거 아니냐. (피해자) 네가 밀양 물을 흐려놓았다”는 경찰관, “고생 많이 했다. (피해자)얼굴도 못생겼던데”라고 조롱한 가해자 친구 등 수많은 공조자들이 확인된 것이다. 피해자를 조롱한 가해학생 친구는 이후 경찰이 됐고, 그가 근무하는 경찰서의 게시판은 수백개의 비난글로 도배됐다. 피해자의 문제를 공감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위치에 있는 경찰로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비난과 별개로 주위를 둘러보자. ‘그런 여자’를 운운한 취재원, 성적 희롱을 일삼는 대학 교수, 인터넷 루머만 보고 ‘쌍방과실’을 주장하는 네티즌, 가해자의 대학 생활을 걱정해 내려진 솜방망이 처벌 등 우리 주변에는 누군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공감부족’이 너무 많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보았던 암묵적 공조자들이 12년이 지난 2016년에도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취재원은 ‘그런 여자’라고 무심코 내뱉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에 대한 공감 없는 이런 발언은 그를 ‘딸키우기 무서운 세상’의 공범으로 만들었다.

정진수 사회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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