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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흙수저·노예·헬조선…한국은 '비하공화국'

입력 : 2016-01-09 18:01:28 수정 : 2016-01-09 1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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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노예·헬조선…새해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인터넷 유행어들이다.

한국인들이 점점 자기비하의 늪에 빠지고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스스로를 ‘금수저’의 반대말인 ‘흙수저’로 칭하거나, 월급쟁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럼없이 ‘노예’라 일컫는다.

한국은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 대신 자기비하라는 신종 유행병이 창궐하는 ‘비하공화국’이 됐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단연 ‘절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비하의 가장 큰 원인은 ‘절망’

자기비하의 대표주자는 향후 20~30년간 한국 경제활동을 책임질 청년들이다. 해마다 심화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한 청년들이 절망의 끝에 자기비하에 빠져든 것이다.

실제 포털사이트의 ‘많이 본 뉴스’에는 ▲가계빚 증가 ▲실질소득 감소 ▲자살률 ▲취업난과 관련된 기사가 끊임없이 상위권에 링크된다. 좀 더 객관적으로 청년들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는 수치자료 역시 도처에 널려있다.

취업을 포기한 청년들을 일컫는 한국의 ‘니트(NEET)족’ 비율은 15.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인 8.7%의 2배에 육박한다. 아울러 통계청은 지난해 6월 기준 국내 청년실업률이 10.2%로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라고 발표했다. 그나마도 이는 '니트족'을 포함한 비경제활동인구를 제외한 수치다.

◆취업전쟁서 생존한 이들 ‘저녁이 없는 삶’ 이어져

취업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청년들에게도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취업 후엔 장시간 근로, 쉽게 말해 ‘저녁이 없는 삶’이라는 또 다른 고통이 이어진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OECD 국가 중 멕시코에 이어 2~3위 수준이라는 사실은 이미 국민적 상식이 됐다. 한국 직장인의 평균 유급휴가일수는 연 14일로 OECD 가입국의 꼴찌 수준이며, 그나마도 모두 소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질 낮은 고용 역시 문제다. 2013년 8월 기준 한국의 비정규직 근로자 비율은 22.4%로 회원국 중 4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 비율은 같은 시기 22.4%로 OECD 회원국 평균인 53.8%에 크게 못 미친다. 최근엔 지난해 기준 한국 20~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그야말로 절망에 정점을 찍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치열한 취업지옥을 이겨내고도 열악한 근무환경이라는 또 다른 지옥에 발을 들이게 되는 청년층의 고통은 이미 수 년 전부터 사회적 문제가 되어 왔다. 무려 8년 전에 출간된 경제학자 우석훈의 ‘88만원 세대’가 이미 세대간의 경제불균형 문제를 다루면서 열심히 일해도 고통 받는 현실에 처한 청년층의 위기를 경고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88만원 세대가 청년층의 고통을 공론화 한지 2년 후, 이번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출간됐다.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겠다는 책의 의도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개인의 희망만으로 절망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격려는 통하지 않는다. 지난해 생겨난 또 다른 유행어인 ‘노오력’이란 단어는 이미 절망과 자기비하에 사로잡힌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면 현실을 이길 수 있다는 기성세대의 격려를 얼마나 아니꼽게 여기는지 절실히 보여준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칭한 신조어 ‘삼포세대’는 어느새 ‘오포세대’, ‘칠포세대’에 밀려 구세대 언어가 됐다.

안정적인 주거와 결혼·여가 등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포기할 게 많아져만 가는 청년들의 고통은 끝이 없다. 절망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심화되는 고통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깊은 절망은 분노하던 88만원 세대를 결국 헬조선에 태어난 스스로를 비하하는 비하 세대로 변화시켰다.

청년들의 끝없는 절망을 꿰뚫는 공통된 키워드는 ‘노동’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스펙을 보유하고도 노동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년들, 가까스로 기회를 얻고도 지나친 노동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처지는 흙수저, 신분은 노예일 수밖에 없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청년 "우린 흙수저, 신분은 노예"

이쯤 되자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지난해 9월13일 수개월의 파행 끝에 노동시장 구조개선에 대한 극적 합의에 이르렀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통해 노동시장 개혁 필요성을 강조하고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이 위원장직에 복귀하는 등 정부의 강력한 추진 의지가 바탕이 됐다.

그러나 정부 측에서 청년 일자리 창출 방식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임금피크제를 두고 오히려 대타협 후 노사정위는 더더욱 갈등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당초 한국노총이 다급하게 노사정위에 복귀한 배경 역시 정부의 공공부문 임금피크제 일방적 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타협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장 임금피크제의 청년고용 창출 효과부터 의심을 받는 상황이다. 정부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13만개의 청년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선 상황이다.

그러나 임금피크제 도입에 반대하는 입장에선 임금피크제로 인한 청년일자리 창출 효과는 거품에 불과하며, 오히려 근로자의 임금만 삭감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장시간 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주당 근로시간 단축 방안 역시 실효성에 대해선 회의적 시각이 많다. 이미 근로시간을 초과해 근무하고도 초과근무에 따른 추가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근로시간 단축 또한 열악한 현실은 그대로 두고 임금만 줄이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헬조선' 청년들의 자기비하 더 심화될 듯

분노하던 88만원 세대가 자기비하로 가득 찬 절망세대로 진화하기까지, 청년들의 고통은 수년에 걸쳐 이어져 왔다. 그간 누적된 고통을 최대한 신속히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국민적 설득이 결여된 일방적인 개혁 강행은 애초에 청년일자리 창출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부의 진정성과 거리가 먼 태도다.

임금 삭감과 무임금 초과근로 등 개혁의 부작용에 대한 대책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된 노동개혁이 고통받아온 청년층에게 진정 희망을 줄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갖은 내홍을 겪으며 강행해온 노동개혁이 끝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을 개혁에 걸어봤던 ‘헬조선’ 청년들의 자기비하는 더욱 심화되리라는 사실이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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