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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여의 존재론 - ‘나’의 상실에 이르기까지(김숨 소설 읽기)

입력 : 2016-01-03 20:30:30 수정 : 2016-01-04 07: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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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새해 특집] 신춘문예(문학평론) 1.



흔히 근대를 주체가 탄생한 시기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탄생의 유일한 무대는 비극이다. 탄생이란 곧 탄생 이전의 세계로부터 추방됨을, 그리고 이전까지 속해있던 세계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근대란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박성완 역, 서울 : 심성당, 1998, 25쪽)과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위와 같은 곳)을 이어주던 탯줄이 끊어진 이후의 어떤 곳이다. 세계는 차가운 법칙과 우연의 편에 서고, 눈앞에서 타오르는 촛불은 저 먼 하늘의 별만큼이나 내게서 동떨어져 있다. 근대 이후의 인간에게 세계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무 의미도 감정도 없는 무심한 손길로 나를 휘저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비극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미에서의 비극은 아직까지는 완전한 파탄이 아닌데, 역설적이게도 세계를 타자로, 비극으로 경험할 ‘나’라는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치명적인 상실은 이 세계를 상실한 것으로 경험하는 틀 그 자체를 상실하는 것, 다시 말해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홀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단단하고 확고하게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의 직업, 나의 취향, 성격, 나의 옷과 물건과 심지어는 나의 몸까지도, 그 모든 것들이 단 한순간도 내 것이었던 적 없었다는 예감과 마주하는 순간. 내가 ‘나’라고 불러왔던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고 그것이 낯선 타자의 모습으로 느껴지는 순간.

이 지독한 파산의 순간이야말로 김숨 소설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그녀가 다루는 것은 우리 삶의 이러저러한 국면이라기보다 그에 앞서 그 모든 국면을 (불)가능하게 하는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이며,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소설은 뼈대가 되는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데에 반해, 김숨은 사건 이전의 시간을 탐색한다. 그녀의 소설에서 사건은 작품의 마지막에 와서 갑작스레 마무리되거나 혹은 끝끝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우리는 한없이 팽창된 시간 속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증해줄 무언가를 건져 올리려고 하는 인물들을 본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결코 채울 수 없는 공백과 결여뿐이다.

김숨의 소설에는 크게 두 부류의 인물이 전면에 등장한다. 「북쪽 방」의 곽노처럼 이 결여를 예리하게 감지하고 순수한 삶을 회복하려는 인물형과, 곽노의 아내처럼 마치 결여 같은 것은 없다는 듯 그것을 부정하려는 인물형이다. 그러나 두 시도는 한 문제에 대응하는 ‘둘 다 더 나쁜’ 방식을 보여주며 각자의 방식으로 실패에 이른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김숨에게 있어 이 결여가 절대적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된다. 김숨이 다루는 문제의 절박함과 불가피함의 충돌은 『간과 쓸개』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소설 전반에 감도는 숨막히는 긴장의 근원이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자꾸만 똑같은 벽에 부딪히며 생성되는 긴장이다. 그러나 이 벽이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모든 부딪힘과 반복이야말로 허무함과 무의미 속에서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김숨의 최근작 『국수』는 바로 이 지점에, 그녀가 기나긴 반복 끝에 발견한 하나의 대답과 함께 서있다.



2.



김숨의 작품 세계에서 『국수』가 갖는 의미를 바로보기 위해선 먼저 그녀가 서있던 막다른 골목의 풍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조금씩 부식되고 흩어져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이 가장 밀도 있게 그려진 『간과 쓸개』에 수록된 단편 「모일, 저녁」에서 우리는 그 풍경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화자는 6개월 만에 신탄진에 있는 부모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이 오랜만의 만남은 그 시작부터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갔을 때 아버지는 베란다에서 연탄불을 피우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연탄에 불을 붙이느라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가지를 썰고 있었다. 어머니 또한 나를 흘끔 바라보기만 할 뿐 가지만 열심히 썰었다. 식탁 위에는 두부, 양파, 대파, 오이, 밀가루 봉지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나는 태극제과점에서 사온 롤케이크와 우유를 식탁 한쪽에 조용히 놓아두었다.

“전어를 구우려고 한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53)



화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치 전어를 굽고 가지를 써는 것이 6개월 만에 찾아온 딸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 것처럼 행동한다. 화자 역시 그러한 행동을 이상하게 느끼는 대신 “롤케이크와 우유를 식탁 한쪽에 조용히 놓아”둘 뿐이다. 이렇게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우리는 가족의 만남보다 더 전면에 배치되는 음식의 이미지들을 본다. 이 음식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넘친다.’ 화자의 부모가 음식을 하는 이유가 오랜만에 찾아온 딸을 반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이를 목적에 대한 수단의 초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상연되는 음식의 이미지들은 이렇듯 한결같이 어떤 종류의 ‘초과’를 포함한다. 그리고 화자의 어머니가 빌라 앞 도로에서 “은행을 줍다가 타이어를 한가득 실은 트럭에 치일 뻔했다”(60)는 일화는, 이 음식의 이미지들에서 배어나오는 섬뜩함의 정체를 밝혀준다.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도로에서 은행을 줍는 행동이 오히려 삶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든다. 원래는 수단으로 남아 있어야 할, 우리의 삶을 위해 복무해야 할 것들이 그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한다. 처음에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인 척하지만 점점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고 우리의 삶을 어그러뜨리며, 종국에는 거꾸로 우리의 삶 전체가 그것을 위해 복무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바로 그 사실을 감지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불안에 도달한다.



“전 씨가 말이다…… 두 손으로 뱀장어를 꽉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다들 손에 뱀장어를 한 마리씩 움켜쥐고서는 멀뚱히 서서는 전 씨가 죽어가는 것을 구경만 했지 뭐냐.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서……”

“……”

“나무토막처럼 꼼짝 않는 전 씨 몸뚱이 위에서 뱀장어가 얼마나 펄펄 날뛰던지……” (67)



뱀장어를 움켜쥐고 죽은 전 씨의 일화는 이 불안의 실현을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이미지로 상연한다. 죽어서도 뱀장어를 쥐고 있는 전 씨의 손, 그리고 죽은 손에서 여전히 살아 날뛰는 뱀장어는 우리 삶의 중핵을 이루면서도 삶을 넘어서까지 지속되는 타자성에 대한 이중적인 현시이다. 중요한 것은 이 타자성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56) 뱀장어를 “아무리 못해도 백 마리는 잡”(57)는 것과 같은 반복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모든 반복은 본질적으로 반복을 위한 반복이다. 반복은 자신을 되풀이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별자리에 대한 어떤 아름다운 이야기도 별의 실재에 가닿지 못하듯, 우리는 반복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로 귀결될 운명에 처해 있다. 반복은 모든 의미가 말소되는 지점이다. 고장난 테이프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목소리, 심벌즈를 계속해서 두드리는 원숭이 인형 같은 것들이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거기서 완벽한 무의미를,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반복의 견고한 타자성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숨의 요지는 바로 이러한 반복이 우리의 가장 내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3.



만약 반복이 나의 삶과 무관한 것이라면, 그것을 도려내고 순수한 삶을 회복할 수는 없는가?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김숨에게 나의 상실이란 문제는 절박할 뿐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탁월함은 손쉬운 거짓 해결책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역시 『간과 쓸개』에 수록된 단편「북쪽 방」에서, 김숨은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다.

작품의 중심인물인 곽노는 「모일, 저녁」에서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던 상우와 같은 편에 있는 인물이다. 상우처럼 그는 “철광석을 닮”은(129) 북쪽 방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것을 선택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언뜻 삶을 철폐하려는 듯 보이지만 실은 정반대의 것을 목표로 한다. 곽노는 자신의 삶이 실제로는 자신과 무관한 반복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감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 삶은 그 실체보다 훨씬 더 부풀려진 것으로 다가온다. 그가 “우주의 팽창은 곽노 자신을 더욱 미미한 존재로 만들 뿐”(126)이라고 말했을 때, 곽노는 자신의 안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며 스스로를 미미한 것으로 만드는 타자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반복을 멈추고자 한다. “월경이 일찌감치 말라버렸는데도”(118) 오로지 습관적인 반복에 따라 “다달이 선지로 한 끼니를 때우는”(118) 아내와 반대로, 그는 “끊임없이 부동을 지향”(130)하며, “필멸에 이르려는 육신의 과장을 조금도 원치 않는다.”(130)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대상이 광물인 이유 역시 “우주가 팽창을 지향하는 것과 달리, 광물은 수축을 지향”(134)하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없이 수축되는 것, 그래서 이 무의미한 반복을 들어내고 그 속에 초라하게나마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건져내는 일이다.

이러한 기획은 실현될 수 있는가? 「모일, 저녁」의 말미에서 화자는 바싹 탄 대가리만 남은 전어를 보며 아버지가 전어의 몸통을 혼자서 홀딱 먹어치운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그러나 곧 더 기묘한 의심이 뒤를 따라오는데, 그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대가리들뿐이었는지도 몰랐다. 몸통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대가리들뿐이었는지도”(82)라는 더 근본적인 의심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똑같다. 곽노의 기획은 반복이 초과한다고 상정되는 어떤 ‘순수한 삶’이란 개념을 전제한다. 하지만 통을 모두 비워도 밑바닥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것은 넘쳐흐르는 타자성뿐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넘치는 무언가를 제거하는 즉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게 되는, 정상상태를 거치지 않고 과잉에서 곧바로 결여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물론 이 질문은 어딘가 이상하게 들린다. 넘쳐흐른다는 말은 분명히 어떤 정상적 상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젝은 과잉과 결여 사이의 이 기묘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태산을 예로 든다(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역, 새물결, 2013, 346쪽). 만약 태산에 대한 유일한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티끌 하나를 덜어내도 여전히 태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티끌은 태산에 대하여 과잉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태산을 ‘넘치는’ 모든 티끌을 제거하고 나면 거기엔 태산 또한 남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과잉이야말로 태산의 본질을 이룬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우리 속담에서도 비슷한 요점을 찾을 수 있다. ‘요란하다’는 과잉은 결국 ‘빈 수레’라는 결여가 표현되는 형식이다. 과잉은 언제나 결여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삶이 부풀려졌다는 느낌은 순수한 삶의 존재를 지시하기는커녕, 사실 삶 같은 것은 원래부터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예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로지 과잉뿐이며, 이 과잉을 제거하면 우리는 곧바로 삶 전체를 잃고 결여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김숨이 최종적으로 봉착한 역설이 있다. 반복은 분명 너무나도 낯선 타자성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가 가진 전부이다. 이는 김숨의 작품에서 무의미한 반복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왜 하필이면 음식이나 심장, 출산 같이 우리의 육체와 직결된 대상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준다. 곽노의 조카가 난데없이 “70세를 기준으로 하면 평생 26억 회를 뛴다”(147)고 하는 심장에 대해 말을 꺼내는 순간, 통상 생명의 활달한 힘을 상징하는 심장은 한순간에 기계적인 반복을 거듭하는 기괴한 사물로 형상화된다. 북쪽 방에 찾아온 곽노의 조카는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도록 아이가 없”(146)는 이유를 묻는 곽노에게 자신의 “두려움”(148)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김숨은 특정한 종이 자신을 반복하는 방법으로서의 출산이란 관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관점에서 출산은 주체의 통제 아래 있는 자유로운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체의 존재 자체가 출산이라는 반복-과정에 수반되는 부차적인 요소로 전락한다. 나의 존재가 무너지고 있다 느낄 때, 육체는 가장 견고하고 든든한 최후의 도피처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김숨은 정확히 그 최후의 도피처에서부터 시작되는 붕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완전한 수축에 이르려는 곽노의 기획은 실현될 수 없는 환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곽노는 “북쪽 방이 벽면들로 막혀 있지만, 외계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될 수 없음을”(143) 알고 있으며, “북쪽 방문이 저토록 허술하게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145)럽다고 말한다. 그가 아무리 “부동을 지향”하더라도, 북쪽 방의 거울은 “형체를 실체보다 과장할 뿐만 아니라, 기이하게 일그러뜨”(130)린다. 곽노가 끊임없이 담벼락을 무너뜨리려는 쇠공의 환청을 듣는 이유 역시, 모든 팽창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머물고자 하는 그의 시도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가장 깊은 곳에서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제까지 김숨의 작업은 이 막다른 골목의 윤곽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부딪쳐가며 끔찍한 신음과 함께 얻어낸 지도였고, 그 지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문제는 일단 그 지도를 완전히 그리는 일이 완수되고 나면 더 이상 부딪쳐야 할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끊임없는 부정과 항의와 신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시간 앞에서 서서히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일뿐인 것처럼 보인다. 김숨의 가장 최근 단편집인 『국수』에 수록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이나 「막차」 같은, 유사한 언어로 유사한 풍경을 그려낸 작품들은 그러한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문학은 언제나 모든 말이 바닥난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말이다. 김숨은 자신이 그려낸 선연한 절망의 한가운데서, 기어이 새로운 대답을 길어올리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수』는 김숨의 작품세계에서 하나의 마침표이자 새로운 전환의 지점이 된다.

이 전환을 지시해주는 작품 중 하나인「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언뜻 김숨이 이제까지 다뤄온 주제의 또 다른 변주인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작중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노인이다. 영하 13도의 겨울밤, 보일러까지 고장난 노인의 방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지니고 있는 존재는 어느 날 아내가 데려온 개다. 노인은 “개새끼와 한이불을 덮고 자느니 차라리 얼어 죽는 게 낫”<182>다고 말할 만큼 개를 혐오하며, 자신과 개 사이에 도대체 “뭔 상관이 있다는”<162> 건지 모르겠다며 선을 긋는다. 그럼에도 노인의 생사는 전적으로 개가 가진 온기에 달려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너무도 낯설고 끔찍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의 전부’라는, 김숨이 다뤄온 타자성에 대한 익숙한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타자성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노인의 태도 역시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김숨이 전작들과는 다른 시점(時點)에서 작품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그녀의 작품들에서 ‘나’의 존재는 낯선 타자성에 의해 침식되고 마침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결과는 언제나 강렬한 예감으로만 나타났었다. 그 예감에 대한 일말의, 그리고 처절한 부정은 김숨 소설을 지배하는 긴장의 근원이며, 또한 이 예감이 이미지의 형식을 빌려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김숨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수명이 진즉에 다한 보일러”<162>를 “억지로”<162> 돌릴 때 골목 밖까지 울리는 굉음과도 같았다.



하지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그 예감을 완전히 인정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럭저럭 버텨내던 보일러”<162>는 “닷새 전”<162>에 이미 고장나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위협은 작중 인물이 예리하게 감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노인의 생명을 앗아갈 듯한 영하의 추위와 철저한 고립으로 실재한다.

이는 김숨이 힘겹게 내딛은 한 걸음이다. 그러나 그 방향은, 이때까지 그녀가 애써왔듯, 절망의 바깥이 아니다. 오히려 그 걸음은 더 깊은 절망의 한복판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야 김숨은 이제까지 다가서지 못했던 풍경을 발견한다.



“개의 밤이라고 있다지 뭐예요.”

그로부터 돌아누우면서 아내가 차분히 중얼거렸다.

“뭔 밤?”

“개의 밤요, 개……” 돌아누워서인가 그는 아내의 말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 낯설고 가물가물하기만 했다. “사냥을 나간 에스키모들이 얼음 벌판에서 개를 끌어안고 잠드는 밤을 개의 밤이라고 한대요.”

“별 희한한 밤도 다 있군.”

“얼어죽지 않으려고요.”

“얼어죽지 않으려고 개를 끌어안고 잔단 말이야? 에스키모들이나 그러라고 해. 나는 차라리 얼어 죽고 말 테니.”

“천지사방 어둠과 얼음뿐이라고 생각해봐요. 온기를 구할 게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말이에요.”

아내는 개를 더 꼭 끌어안았다. <182>



“천지사방 어둠과 얼음뿐”인 밤, 개를 끌어안고 잠든 에스키모들의 이미지는 삶에 대한 어떤 은유로 작동하기 전에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그토록 강렬한 울림을 갖는 진정한 이유는 이 이미지가 발화되는 방식에, 다시 말해 아내가 이 이미지를 하나의 은유로서 ‘끌어안는’ 방식에 있다. 노인에게 에스키모들의 이야기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어둠 속 끝도 없이 펼쳐진 얼음 벌판은 「북쪽 방」의 곽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없이 팽창하며 자신을 미미한 존재로 만들 뿐인 우주와 같다. 그곳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타자성에, 개의 몸뚱이에 구차하게 들러붙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답기는커녕 우리가 마주한 패배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아내는 결정적인 전환을 성취한다. 그 전환은 노인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던 것을 발견해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노인이 저 이미지에 은밀하게 덧씌워놨던 무엇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노인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 패배를 발견하는데, 그에게 자신의 순수한 삶은 언제나 어떤 타자성에 의해 빼앗기고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에서 노인에게 순수한 삶은 ‘잃어버린 어떤 것’으로, ‘내가 언젠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서 여전히 완전하게 포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즉 노인의 전략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상실이라는 틀 안에 넣어둠으로써 지키는 것이었다. 아내가 덜어내는 것은 정확히 저 상실이라는 틀이다. 아내는 상실보다 훨씬 더 절박한 것, 말하자면 “상실의 상실”을 감수한다(이 개념과 관련된 논의는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한보희 역, 새물결, 2008, 220-221쪽을 참고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관점이 주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



문제는 여기 걸려 있는 것이 나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물론 아내의 전환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실제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한 번도 순수한 삶을 가져본 적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전환은 지극히 어려운데, 비록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해도 나의 순수한 삶이라는 관념은 실재하는 어떤 대상보다도 더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끝끝내 가능하지 않았던 것은 “폐허나 마찬가지인 입속을 내보인다는”<173> 것,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비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의 “치욕스러”<173>움을 견디는 일이었다. 이 근본적인 수치심을 통과하고 난 후에야, 내 안의 타자성은 나의 자리를 빼앗은 어떤 것이라는 외관을 벗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타자성을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으로, 비록 나 자신은 아닐지라도 “나와 가장 가까운 생명”<169>인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내는 자신의 완전한 파산을 받아들이는 겸허함과 함께 이 밤을 성스러운 순간으로서 명명한다. 그녀는 이 이미지를, 자신의 품 안의 개를, 결코 자신이 아닌 타자성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자 허락된 유일한 삶으로서 “더 꼭 끌어안”는다.



5.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나의 완전한 소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제목이 암시하듯, 새로운 탄생의 밤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표제작인 「국수」는 어떻게 나의 소멸이 나의 진정한 탄생의 순간이 되는지를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그려낸다.

이 작품의 중심이 되는 것은 화자와 그녀의 새어머니 사이의 관계이다. 화자는 새어머니를 “단 한 번도 어머니라 부르지 않”<60>으며, “그토록 부인하고 멀리하려”<60> 애써왔다. 그녀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과 “피 한 방울, 살 한 점, 뼈 한 가닥 섞이지 않은”<60> 낯선 타인이 “내 운명을 지배”<60>한다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곧 그녀가 스스로를 지탱해줄 근거를 어디서도 찾지 못했음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틀어쥐고 있는 낯선 타자성 말고는 어떤 순수한 삶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새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어머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본질적인 ‘진짜 어머니’,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생생한 존재의 보증서였다.

따라서 화자의 새어머니에 대한 부인은 본질적으로 그녀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결여에 대한 부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새어머니는 화자가 느끼는 결여를 투사하는 상징물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데, 이는 새어머니 역시 화자와 같은 욕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자신이 만드는 “알고명은커녕 감자나 호박, 파 한 조각 들어 있지 않”<54>은 국수와 같은 사람이다. 국수라면 으레 들어갈 법한 재료들을 ‘비워가며’ 최소한의 재료만을 사용하는 그녀의 조리법은, 「북쪽 방」의 곽노가 시도했던 한없이 수축되기의 기획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워내기가 또한 자신의 순수한 삶에 대한 무엇보다 강렬한 욕망의 표현임을 보았다. 화자에게 ‘진짜 어머니’가 부재한다면, 새어머니에게 부재하는 것은 ‘진짜 딸’이다. 화자의 말대로 국수는 “자식이란 끈 대신 밀가루로 반죽을 개어 끈들을 만들어”<69> 자신의 딸과, 세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새어머니의 바람이 담긴 음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바람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화자는 국수를 만들며 ‘진짜 어머니’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자신을 ‘낳은’ 사람은 새어머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것은 새어머니가 바랐던 완전한 연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역설적으로 화자는 누군가의 ‘진짜 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화자는 국수를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새어머니에게 다가가지만, 결국엔 어떤 방법으로도 좁힐 수 없는 최소한의 거리가, 결코 메워지지 않는 결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는 실패와 마주 한 순간, 화자는 그 실패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가장 아름다운 구원에 도달한다. 그것은 “한참 전부터 내 안 어딘가에서”<78> 끓고 있었던 무언가가 “당신의 부엌이 아닌 그 누군가의 부엌에서도”<78> 끓고 있을 것이란 사실의 자각이다. 우리는 각자의 결여 속에 철저히 고립되어 있지만, 자신의 결여 속에서 외따로 괴로워한다는 바로 그 지점을 경유하여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은 “구름이 바위처럼 무거워지고 바람이 성난 염소처럼 사납게 휘몰아치는 밤새, 수천 마리의 나비를 제 안에 꼭 품고 있다가 날려보내던”<78> 나무 밑동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제 그녀는 ‘비워내기’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순수한 삶이 아니라, 비어있는 것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나마 남은 밑동 속이 동굴처럼 비어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많은 나비를 품을 수 있었겠”<78>냐는 화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비어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능한 아름다움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끊어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연결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설득과 만난다. 화자는 혀에 침투한 암 때문에 괴로워하는 새어머니를 위해 손수 뽑아낸 국숫발을 뚝뚝 끊어낸다. 그것은 화자가 새어머니를 처음 만났던 날 그녀를 거부하던 몸짓과 같다. 그러나 오래전 화자가 국수를 끊어내며 자신의 순수한 삶을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서 여전히 욕망하고 있었다면, 이제 그녀는 그러한 끊어냄이 자신의 욕망을 이미 실현하는 것임을 안다. 진정한 연결은 끊어짐 속에서만 있으며, 순수한 삶이란 그것의 철저한 결여 그 자체이다. 정확히 그런 한에서, 비로소 김숨은 그녀가 그토록 염원하던 것,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6.



자명한 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질문이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는 한마디를 말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바로 그 자신의 존재를 포함한 너무도 많은 자명한 것들을 먼저 부정해야만 했다. 데카르트가 타자에 대해 소홀했다는 말 역시 무성의한 비판이다. 왜냐면 그는 타자에게 소홀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히 타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부터 먼저 물어야만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김숨의 상황도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와 같은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다. 물론 그녀는 그 탐구를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진행한다. 즉 그녀의 소설은 언제나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서 쓰인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조건을 부각시켜 다루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김숨의 소설에서 자본주의는 전제로서 고정된 지점일 뿐, 아직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숨 소설에서 자본주의 혹은 외적 사회에 대한 인식은 조금은 추상적이며 전형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다. 다시 말해 김숨의 소설은 매일 새벽까지 뱀장어를 잡아야만 지탱되는 생활이 어떻게 ‘나’의 존재를 부식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잘 보여주지만, 부유한 경제적 상황에서도 주체가 해체되는지, 해체된다면 그 양상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김숨 소설의 전형적인 풍경 중 하나인 파탄에 이른 가족 공동체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이는 그간 김숨의 소설이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이를 김숨 소설의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 수는 없다. 공정을 기해 말한다면 『국수』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김숨에게 내 밖의 사회는 아직 감히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출발지로 삼은 지점이 있을 뿐이다. 그곳으로부터의 치열한 추궁 끝에 김숨은 마침내 텅 비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며, 나아가 비어있음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나’를 찾기 위한 내적 침잠은 역설적으로 자신 안의 빈 공간을 이루는 타자들의 발견으로, 타자들을 내 존재의 조건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녀는 우리에게 결여의 존재론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그리고 비어있는 것을 비워두라는 미학적 태도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김숨이 획득한 것은 하나의 마침표이다. 그것은 말해질 것이 모두 말해졌음을 의미한다기보다, 이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마침표이다. ‘결여의 존재론’은 김숨에게 타자로 뻗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을 제공한다. 그녀에게 나 자신의 탐구와 타자의 탐구는 더 이상 상반되거나 우선순위를 정해둘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국수』에 수록된 「대기자들」과 같은 작품은 이미 그녀가 새로운 질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김숨의 독자로서. 그녀가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는 순간의 설렘과 두려움 속에서.



-김숨 작품의 본문을 인용할 경우 『간과 쓸개』, 문학과지성사, 2011의 쪽수는 ( )로, 『국수』, 창비, 2014의 쪽수는 로 표기하였다. 두 번 이상 인용될 때는 표기하지 않았다.



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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