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국내에선 정치범죄 드라마 ‘내부자들’이 흥행돌풍을 일으킨 가운데, 영국은 ‘레전드’로 들썩들썩했다. ‘내부자들’에 정치깡패 안상구 역의 이병헌이 있다면, ‘레전드’에는 전설적인 갱스터 크레이 형제를 연기한 톰 하디가 있다.
훗날 ‘레전드’가 영화사에서 회자되는 영화가 된다면 전적으로 톰 하디의 연기력 때문일 것이다. 한 영화에서 1인 2역을 연기한 배우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하디만큼 해낸 배우는 없었다. ‘레전드’에서 그는 1960년대 영국 런던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쌍둥이 형제 레지 크레이와 론 크레이 역을 맡아 생애 첫 1인 2역에 도전했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실존인물인 크레이 형제에 대한 사전지식이 조금은 필요하다. 1933년 런던 이스트엔드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 레지와 론 크레이는 젊은 나이에 갱단의 리더 자리를 차지한 후 런던의 나이트클럽을 하나 둘 접수하면서 경찰조차 건드리기 어려운 정치·사회적 거물로 성장해나갔다. 크레이 형제는 사후(死後) ‘갱스터의 전설’로 불렸을 정도로 런던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진다.(실제 크레이 형제의 묘비에는 ‘주의: 이 지역에 범죄자가 있습니다’란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LA컨피덴셜’ ‘맨 온 파이어’ 등의 각본가로도 유명한 브라이언 헬겔랜드 감독은 크레이 형제 이야기를 극화하기로 결심했고, 레지와 론을 동시에 연기할 배우로 머릿속에 오직 톰 하디만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캐스팅을 수락한 하디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디는 정말 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1인 2역 연기를 보여줬다. 레지와 론은 한 엄마 뱃속에서 나왔지만 성격이나 행동, 성향은 전혀 다른 인물들이다. 이는 외모에서부터 드러나는데 형 레지는 언제나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는 단정한 스타일인 반면, 동생 론은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는 ‘올백’ 머리 스타일에 안경을 끼고 카디건 같은 편안한 스타일을 추구한다. 촬영 당시 톰 하디는 입에 교정기를 물고 두 사람의 다른 치열을 표현하는가 하면, 헤어라인에도 변화를 줘 같은 사람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디는 두 인물에 전혀 다른 자세와 표정, 말투, 행동패턴 등을 심었다. 한 명의 배우가 두 캐릭터에 동시에 생명을 불어넣은 셈이다. 그는 심지어 어깨가 굽은 정도, 걸음걸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자세의 디테일까지 신경쓰는 꼼꼼함을 발휘했다. 레지와 론은 같은 영국식 영어발음을 구사하지만 악센트와 억양이 완벽히 달라 관객들이 대사만 듣고도 이들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이는 영화 두 편을 찍는 노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하디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만장일치로 ‘톰 하디!’를 외쳤던 감독과 제작진의 마음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이된다. 전 세계 관객들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등 전작들에서 이미 그의 진가를 알아봤지만 ‘레전드’를 통해 또 다른 하디의 매력, 능력, 그리고 가능성과 마주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레전드’는 갱스터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스릴러 장르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 제작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멜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나 크다. ‘내부자들’ 같은 수컷 냄새 강하게 풍기는 액션물을 기대하고 갔다면 남녀 주인공의 사랑타령에 적잖이 당황할 수도 있다.
반면 이는 하디의 달콤하면서 부드러운 매력과 만날 기회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도 된다. 단순 무식하긴 해도 거친 남자의 순정에 설레지 않을 여성관객은 아마 없을 것.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을 오마주한 듯한 창문 프러포즈신 속 장난꾸러기 같은 하디의 미소와 ‘레몬 드롭스’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레지가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었던 단 한 명의 여인, 프랜시스 시어 역의 에밀리 브라우닝은 갓 사랑을 시작한 여자부터 절망에 빠져 위태위태한 여자의 심리까지 진폭이 큰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킹스맨’의 황태자 태론 에거튼의 깜짝 이미지 변신을 기대해봐도 좋다. 청소년관람불가. 132분. 12월10일 개봉.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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