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유순하(71)가 최근 펴낸 문화에세이 ‘당신들의 일본’(사진·문이당) 에필로그에서 언급한 대목이다. 이것만 접하면 이 책이 얼핏 일본을 극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일 것 같은데 기실 한국인 입장에서 뼈아픈 내용이 압도적이다. 최근 이 책을 다룬 인터넷 포털 기사에 순식간에 270여개의 댓글이 올라왔는데 그중 대부분이 지은이에게 막말을 하며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내용이었다니 짐작할 만하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자격지심을 가장 먼저 거론한다. 그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열등감의 사생아인 자격지심으로 말미암아 시달리지 않는 인간은 역시 없다”면서 “문제는 그 정도인데, 평균적 한국인의 대일 자격지심은 자해 수준에 이를 만큼 그 정도가 분명히 지나치다”고 적시한다.
일찍이 1980년대 초반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시 전두환 정권은 전국적으로 관제 궐기대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 결실은 독립기념관 건설로 이어졌는데, 정통성 없는 정권이 대일 자격지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결과였다는 시각이다. 독도 문제나 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면 일본은 무심한데 한국의 규탄 분위기는 순식간에 극단 상태가 된다고 본다. 그 결과 일본의 얕은 수에 휘말려 독도는 국제적인 이슈로 떠올랐고 교과서는 그것대로 개선은커녕 악순환의 골로 접어드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는 “힘센 놈은 깐족깐족 웃는데 힘이 달리는 놈은 눈물 콧물까지 질질 흘려가며 고래고래 소리지른다”면서 “결국 자격지심의 총화인 궐기대회는 배만 더 고프게 했지, 아무 소용도 없는 헛짓”이라고 단언한다. 태산처럼 가라앉아 힘을 키우는 게 유일한 대응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책 정도로 친일파 비난을 받는 우리 현실이 정말 한심합니다. 책을 읽어 보지도 않고 자격지심을 건드리는 내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대일관계에서 극복해야 할 핵심입니다. 일본을 배우자는 게 아니라 우리를 알자는 겁니다. 일본은 잔인할 만큼 우리를 솔직하게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광복절을 일주일 앞둔 지난주 금요일(8일) 오후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베레모를 쓴 예리한 눈매의 마른 노년이었다.
유순하는 1968년 ‘사상계’ 희곡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지만 오래 직장 생활을 하며 침묵을 지키다 1980년대에 다시 소설로 등단해 이산문학상과 김유정 문학상 등을 받으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동안 펴낸 책만 장편소설 12권, 창작집 7권, 문화 에세이집 7권, 동화책 2권 등 30여권 가까이 된다. 1990년대 말부터 본의 아닌 ‘절필’ 기간을 거쳐 최근 단편 ‘바보 아재’로 EBS라디오 문학상을 받으면서 새롭게 부각되는 이 즈음이다.
“교토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한국으로 들어왔으니 일본과의 인연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다만 가족사의 인연으로 일본에 대해 많이 듣고 생각하면서 일본에 대해 많이 쓰고 읽고 조건반사적으로 대일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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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침묵 끝에 발표한 단편 ‘바보 아재’로 올 ‘EBS라디오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유순하. 그는 최근 펴낸 에세이집 ‘당신들의 일본’에서 일본을 대하는 한국인의 자격지심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제원 기자 |
유순하의 이력도 그의 조부들만큼이나 평탄치는 않다. 그가 제대로 제도 교육을 받은 건 초등학교 때까지뿐이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연간 결석일수가 100일이 넘었는데 담임의 배려로 겨우 졸업했다. 이후 충주비료공장 노동자로 들어갔다가 군에 다녀온 뒤 ‘원고지 1만장만 쓰면 글쟁이가 될 수 있다’는 춘원의 말을 상기하고 원고지 5000장을 사서 쓰기 시작한 그해 ‘사상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전 세계에 40여개 지점을 거느린 한미합작회사 한국 회사에서 오래 직장생활을 하다 노사문제와 그가 합작회사를 배경으로 쓴 단편이 문제가 되어 1987년 해고 통지를 받았다. 먹고사는 건 퇴직금이나 아파트가 있어 어찌 해보겠는데, 2녀1남 세 아이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지는 것 같아 ‘아비는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전동타자기를 두드렸다고 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아버지가 두드리는 타자기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고, 그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고 말한단다. 두드리다 보니 작품들이 쏟아져나왔고 각광받았다.
그의 이력과 생각에서 짐작하듯 사실 유순하는 한국 문단에 독특한 존재다. 동인도 없고 매인 이념도 없다. ‘생성’이라는 작품은 그가 몸담은 합작회사의 노사분쟁이 생생하게 스며들어 민중주의 작가인 것처럼 오해받지만 그건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담았을 뿐인데 세상은 그에게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그는 좌나 우, 자본이나 노동 그 어느편도 아닌 니코스 카잔차키스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자유’를 지향한 쪽이었다. 그러한 심정을 담은 중편 ‘한 자유주의자의 실종’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당시 다시 상을 받았지만, 패거리를 짓지 않거나 옹호받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그는 소외된 존재일 수도 있다.
사실 그가 이 책에서 “나는 당신들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를 괴롭힌 것, 세계를 유린한 것, 그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그것은 그 당시 세계 질서였다”면서 “우리가 당신들의 제국주의적 침략 근성을 바락바락 욕할 때 나는 심한 모순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중국 정벌을 자랑삼고 있으며, 베트남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우리가 저지른 엄청난 죄악에 대한 반성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라고 기술하는 대목은 아슬아슬하다. 일본과 비교한 한국 문화의 30가지 항목을 차분한 인내심을 발휘해 읽고 무사히 에필로그에 이를 수 있다면, 일본은 물론 한국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태도의 진정성에 충분히 감응할 수 있다. ‘우익의 오야붕’이라고 표현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해 유순하는 이날 “아베는 극우가 될 수밖에 없는 관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때 걷는 모습은 저돌적인 일본인의 전형적인 걸음걸이”라면서 “아베는 일본을 묘혈로 끌고 들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이웃나라에게도 참 쉽지 않은 존재”라고 부연했다. 헤어질 무렵 그가 말했다.
“내 소설은 이제 안 읽어도 그만이지만 이 책만큼은 꼭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일관계가 첨예해질수록 나를 욕하는 사람도 많아지겠지만, 우리 사회의 성찰 능력을 믿습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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