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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송시열·송준길 등 유학 거목 배출한 명문가

관련이슈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입력 : 2014-04-08 20:43:57 수정 : 2014-04-08 20: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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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1> 은진송씨(恩津宋氏) ◆은진송씨는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충남 논산 은진면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성씨로, 여산송씨와 더불어 송씨의 양축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조선조에서 송시열, 송준길 등 수많은 유학자와 인물을 배출한 명문거족의 하나이다.

은진송씨는 여산송씨와 마찬가지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내고 우리나라에 건너온 송주은(宋柱殷)의 후예로 전해지고 있다. 여산송씨 문중에 따르면 은진송씨는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아우 송천익(宋天翊)이 은진에 세거하면서 은진송씨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증빙할 자료는 여산송씨 측의 족보 외에는 없다. 또한 송천익 이후의 세계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은진송씨는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源)을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송대원 이후 6대손 송유(宋愉)의 아들 대에서 송계사(宋繼祀), 송계중(宋繼中) 형제가 있는데, 송계중의 후예가 사직공파(司直公派)를, 송계사의 아들 송요년(宋遙年), 송순년(宋順年)이 각각 목사공파(牧使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를 형성했다. 이들 3파는 다시 후대에서 50여 파로 갈라진다. 

대전 은진송씨 묘역 대전에는 은진송씨 집안의 공동묘지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인 대전의 은진송씨 공동묘지는 묘지 발전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분파된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위의 파를 3대 종파로 하고, 그다음으로 합파(合派)와 분파(分派)로 나뉜다. 합파에는 안악공파(安岳公派), 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송담공파(宋潭公派),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습정공파(習靜公派), 수옹경헌공파(睡翁景獻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가 있다. 또 세분화된 분파에는 삼가공파(三嘉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사우당효정공파(四友堂孝貞公派), 동춘당문정공파(同春堂文正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추파공파(秋坡公派), 우암문정공파(尤菴文正公派), 동파공파(東派公派) 등이 있다.

은진송씨의 유명인물로는 송유, 송인수, 송준길, 송시열, 송근수, 송병선 등이 있으며, 조선조에서 상신 2명, 문형 1명, 호당 3명, 문과 급제자 74명을 배출했다. 유학자 집안답게 개인 문집을 낸 사람도 230여명에 이른다. 특히 은진송씨의 인물들은 목사공파와 정랑공파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은진송씨는 총 6만4590가구에 20만88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은진송씨의 연혁과 인물

은진송씨의 시조는 고려 때 판원사는 지낸 송대원이다. 그는 송씨의 도시조인 송주은의 후세이자 여산송씨 송유익의 아우인 송천익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실증적 자료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에 은진송씨 문중에서는 고려 때 판원사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을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송대원의 증손인 송명의(宋明誼)가 경상도 안렴사를 거쳐 사헌부 집단에 이르렀으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충남 대덕군에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다.

은진송씨가 가문으로 일어나게 된 데는 송명의의 며느리이자 송극기(宋克己)의 부인인 류씨(고흥백 류준의 딸)의 노력 덕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성균관 진사에 뽑혀 개성에서 살고 있는 송극기의 부인이 되었는데, 송극기가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청상과부가 된 류씨는 부모님의 재가 권유도 마다하고 아들인 송유(宋愉)를 업고 송도에서 시댁이 있는 회덕까지 500여 리를 걸어왔다고 한다. 

송유가 지은 쌍청당 은진송씨가 3대 종파로 갈리며 번창하는 역할을 한 송유가 지은 쌍청당, 조선 전기 건축양식을 파악할 수 있다.
어렵게 충청도로 내려와 아들(송유)을 키웠으나, 아들마저 단명하여 세상을 뜨고 손자인 송계사와 송계중 형제 때부터 가문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송계중의 후손이 은진송씨 사직공파를 형성했으며, 송계사의 아들인 송요년과 송순년에서 각각 목사공파와 정랑공파가 나와 은진송씨의 3대 종파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유 이후 은진송씨 가문의 인맥을 살펴보면, 쌍청당(雙淸堂) 송유의 증손 송여해(宋汝諧, 송순년의 아들)가 성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에 이르렀으며, 송여해의 맏아들 송세충(宋世忠)이 군수와 장령(掌令)을 지냈다. 

송세충의 아들 송기수(宋麒壽)는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도승지로 위사삼등공신(衛社三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4명의 임금을 섬기며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송기수의 사촌인 송인수(宋麟壽)는 당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좌윤에 올랐다. 하지만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인해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그는 평소에 너무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사람들에게 ‘서음(書淫)’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패관잡기’에는 “인자하고 정성스러워 착한 일을 보면 배고픈 사람이 음식 탐내듯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죽임을 당한 을사사화는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윤원형 등 소윤이 윤임 등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원래 중종의 비는 단경왕후였으나 소생 없이 폐위되었으며, 이후 윤임의 누이동생인 장경왕후가 세자(인종)를 낳고 죽자 이어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가 들어가 경원대군을 낳았다. 이로 인해 경원대군의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대윤과 소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인종이 죽자 소윤 일파가 음모를 꾸며 대윤을 몰아낸 사건을 말한다. 이때 사촌형제간 인 송기수는 소윤편을 들었고, 송인수는 윤임과 함께 죽임을 당한 것이다.

송기수의 아들 송응개(宋應漑)와 송응형(宋應泂)은 선조 때 대사간과 황주목사를 각각 역임했다,

또 송귀수의 아들 송응기는 의금부도사를, 송응기의 아들 송방조(宋邦祚)는 병조좌랑과 평안도 병마평사를 역임했고, 송방조의 아우 송갑조(宋甲祚)는 유생(儒生)으로서 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유적에 삭제되었으나,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했다. 정묘호란 때 세자를 따라 완산에 내려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가하였다. 그의 아들이 조선 주자학의 거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다.

송시열은 일찌기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에게 인척이었던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동문수학하였고, 이후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송시열은 인조 때 36세로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효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효종 승하 후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다. 74세 되던 해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하지만 숙종 때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유배되고,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송시열 초상
송시열의 기본 사상은 주자학 중에서 예학이었다. 그는 율곡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을 잇는 학자로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당대 당쟁의 정중앙에 위치한 인물이다. 조선의 붕당정치를 얘기할 때 송시열을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인조∼숙종에 걸쳐 네 명의 임금을 섬기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4색당쟁의 난세를 살았다. 영·정조 이후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기호학파와 노론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이로써 그의 이론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통적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영천군수였던 송이창의 아들로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1624년에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효종 때 김집(金集)의 천거로 발탁되었다. 부사, 진선, 장령을 거쳐 집의(執義)에 올랐고 송시열과 함께 북벌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김자점과 원두표 등을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였지만, 김자점(金自點)이 송시열, 송준길의 북진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자신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거부하다가 1658년 대사헌을 지냈다. 당시 송시열은 이조판서로 송준길과 함께 국정을 주도하였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된 뒤 우참찬, 좌참찬 겸 좨주(祭酒), 찬선(贊善)을 지냈다.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문묘를 비롯해 공주 충현서원(忠顯書院)에 배향되었다.

송시열이 후학 양성했던 괴산 화양동 서원 송시열이 화양구곡이라며 만년 후학을 양성하며 머물렀던 충북 괴산의 화양동. 그곳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제사지내기 위한 만동묘가 있고, 이후 송시열의 후학인 권상하, 정호 등이 화양동서원을 세웠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 속하여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쓰는 한편,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춘당집’과 ‘어록해’(語錄解)가 있고, 글씨로는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부산), ‘윤영순절비문’(尹榮殉節碑文·남양) 등이 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목매어 순절한 송시영(宋時榮: 송시열의 사촌)과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삼송’으로 일컬었던 송규렴(宋奎濂: 이조판서였던 송국전의 아들)이 있다.

송규렴은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는데, 효종 때 급제하여 현종 때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 송준길의 죄를 풀어줄 것을 간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1680년 경신대출척 이후 서인이 정권을 잡자 복권되어 대사간 등을 지냈다. 후에 지돈령부사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송규렴의 아들 송상기는 노론의 중진으로 대사헌,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유배되어 죽었다. 또, 송시열의 손자인 송주석(宋疇錫)은 ‘향동문답(香洞問答)’을 저술하였으며, 정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송덕상(宋德相)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영조 때 묘향산에서 학행으로 명성을 떨쳤던 송능상(宋能相)이 있고, 송인상(宋寅相)의 아들로 이조판서와 우찬성(右贊成)에 오르고, ‘성담집’을 저술한 송환기(宋煥箕)가 있다. 또, 송환명(宋煥明)의 아들로 ‘이기일도설(理氣一途說)’을 지지했던 송치규(宋穉圭)가 있고, 철종 때 승지를 거쳐 이조참의를 역임한 송달수(宋達洙), 고종 때 좌의정으로 개화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송근수(宋近洙)의 형제가 있다.

또, 송병선(宋秉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자 음독 자결하였다. 그의 동생 송병순도 한일합병이 되자 음독 자결하였다. 1926년 순종의 죽음에 문상을 온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先)도 은진송씨 가문의 인물이다.

◆은진송씨 근현대 인물

현대인물은 송진백 제헌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송인상(전 법무부장관), 송석하(육군소장) 등이 있으며, 국회의원으로 송원영·송효순·송천영 등이 있고, 송장헌(대한의사협회장), 송기철, 송민호, 송재만 등 고려대 교수와 송명관(변호사), 송건호(한겨레신문대표이사), 송효빈(한국일보논설위원), 송희빈(충청은행장), 송재오(국민은행장), 송재영(충남대교수)씨 등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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