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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돼지코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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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3-26 21:12:56 수정 : 2014-03-26 23: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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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그런 돼지코가 없어요.”

얼마 전 미국 온라인 상점에서 ‘직구(직접구매)’ 형태로 60인치 삼성 TV를 샀다. 국내에서 300만∼400만원에 파는 제품을 200만원에 샀다는 뿌듯함도 잠시, 난관에 부딪혔다. 전원을 연결하려다 보니 TV 뒷면에 이상한 전기코드가 달려 있었다. 어릴 적에나 보던 11자 형태의 코드였다. 수출용 제품이라 거실 벽에 달린, 동그란 구멍의 콘센트에는 맞지 않았다. 이 TV를 우리나라 전압에 맞게 쓰려면 ‘돼지코’가 필요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15년 전, CD플레이어 같은 고급 전자기기를 팔던 부산 남포동 뒷골목의 한 전자상가는 전국에서 몰려든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가까운 일본에서 배에 실어 몰래 들여온 이른바 ‘병행 수입’ 기기들이 인기가 좋았다. 가게 유리문 밖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서서 바다를 건너온 신형 외국산 기기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훔쳐보곤 했다. 소니, 파나소닉, 산요 등 일본산 전자기기는 당시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로망’이었다. 삼성과 LG 등 국내 제품은 인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220V 전압을 쓰는 국내에서 110V용 외국 제품을 사용하려면 11자 모양 코드 앞에 끝이 둥근 어댑터를 꽂아야 했다. 이때 필요한 게 돼지코 어댑터였다. 네모난 콘센트 가운데의 구멍 2개가 돼지 콧구멍을 연상시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조병욱 사회부 기자
오랜만에 돼지코를 사기 위해 서울 광화문의 대형 매장을 찾았다. 진열된 어댑터는 종류도 모양도 다양했지만 정작 찾는 부품은 없었다. 넓은 매장을 한참 헤맨 끝에 돼지코와 비슷해 보이는 변환 장치를 발견했다. 그러나 110V를 220V로 바꿔주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연결만 가능한 제품이었다. 서울역 주변의 몇몇 철물점까지 돌아봤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발길을 돌려 용산 전자상가를 찾았다. ‘이곳에서 파는 부품들을 모으면 슈퍼컴퓨터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듣는 곳인 만큼 돼지코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점원들은 한결같이 “요즘 누가 그런 걸 쓰냐”고 되물었다. 이젠 돼지코의 행방이 궁금했다. 한 부품 제조업체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업체 직원은 “220V를 110V로 바꿔주는 제품은 많아도 그 반대 형식의 돼지코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수입 전자제품이 많지 않은 데다 우리나라 제품을 들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세월이 변한 것이다.

어렵사리 인터넷을 뒤져 주문한 돼지코가 도착했다. 500원짜리 돼지코를 사는 데 3000원의 택배비를 내고 나니 왠지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남포동 전자상가는 옷가게로 바뀐 모양이다. 일제 전자제품을 최고로 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나라 전자제품이 어느새 그 윗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옛 추억이 떠오른다.

조병욱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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