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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91〉 건축가 이종호

입력 : 2014-03-13 21:59:06 수정 : 2014-03-13 22: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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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호라는 건축가


건축가 이종호. 나는 그를 아주 잘 안다. 그러나 그를 직접 만나 본 횟수를 헤아린다면 열 손가락 중에서 몇 개도 쓰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건축계 행사에 참석했다가 얼핏 인사를 나누고, 조금 위 연배였던 그가 나를 격려하는 말을 해주면 나는 감사하다고 되돌리는, 그런 의례적인 수준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떤 만남은 수만 번 만나더라도 아무런 감흥이나 교감이 없을 수 있지만, 어떤 만남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번개를 맞은 듯한 깨달음이나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주기도 한다고. 그와의 만남은 번개가 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그에게는 꼭 배워야 할 어떤 자세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를 직접 만나기 훨씬 전, 집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던 중에 그가 지어준 집에 살고 있는 건축주를 먼저 만났었다. 그리고 속초 가는 국도변에 있는, 그가 설계한 휴게소의 주인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건축주들은 한결같이 그를 회상하며 대단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보통은 그런 존경심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의례적인 수사에 그치기 마련인데, 그가 설계한 건물의 건축주들은 무척 달랐다. 건축가와의 작업과정에 대해 어떤 불만도 없었고, 칭찬을 넘어 심지어 존경을 나타내는 그들의 태도에 적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모든 전문가들이 자신의 직능을 펼치는 데 가장 원하는 상황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이다. 혹은 수용자의 폭넓은 이해와 배려와 더불어, 직능에 대한 혹은 개인에 대한 약간의 존경이 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건축가 이종호는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런 관계 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관계가 한쪽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해서이거나 적당한 눈속임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떠한 진정성이나 감동이 오고 가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 힘이 무엇일까 참으로 궁금했다. 그를 잘 안다는 사람들을 만나 여러 차례 물어보기도 했다.

건축이 땅을 압도하지 않고, 땅이 가진 잠재력을 충분히 이끌어내는 건축가 이종호의 홍천 팜파스 휴게소
출처:플러스 1994년 10월호
‘건축가 이종호를 소개합니다’라는 글에서 고 정기용 건축가는 이종호를 “누구보다 우리나라 도시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속에 깊이 내재하는 현실성을 읽으려 노력하는” 건축가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양구에 세운 박수근 미술관은 건축이 어떻게 ‘건물’을 넘어서 훼손된 땅을 치유하며 작은 도시가 어떻게 ‘문화’의 이름으로 새롭게 생성될 수 있는지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주었다”(한겨레21 제629호, 2006년 09월 29일자)며 극찬했다. 시립대 김성홍 교수는 “이종호의 건축은 매끄럽지도, 정교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힘이 있다. 인간 이종호가 그렇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흉물스런 국도변 휴게소는 뒷산이나 계곡을 가로막고 뜨내기 여객에게 호소한다. 도로와 평행하는 스트립 몰의 전형을 따랐다면 묻혔을 대지의 잠재력을 이종호는 절묘하게 살려냈다. 주차장-계단-포디엄-일자형 매스를 해체하고 그 안에 마당을 담았다. 동시에 보강블록조, 목조트러스, 침목을 써서 값싸고 거친 구축의 미를 그는 누구보다 먼저 시도했다. 달리는 차창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는 홍천휴게소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단골들이 꾸준히 찾아와 여행의 속도를 늦추고 들뜸을 가라앉히는 장소가 되었다.”(김성홍, ‘이종호와 한국현대건축의 지형도’, 건축과환경 2004년 10월호)

# 보이지 않는 가치를 존중하는 건축가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그가 지어놓은 건물을 통해서였다. 서울에서 속초로 가는 도중 나오는 홍천 국도 변에 있는 평평한 듯하면서도 뾰족하게 서있는 ‘팜파스 휴게소’와 욕심 없이 무심하게 지어놓은 것만 같은 ‘율전교회’가 그것이다. 나무와 시멘트 블록 그리고 그 사이를 무덤덤하게 이어주는 유…. 아주 단순한 재료와 단순한 구법으로 집을 지었는데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그 집이 무척 새로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건축가 이종호. 그는 책상 위에 오랫동안 놓아둔 채 언젠가 꼭 풀어보리라 마음먹은 숙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에 대해 이런저런 분석을 하며 칼을 들이대고 해부해 보았지만 뾰족하게 나오는 답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그의 건축주들이 나에게 던져준 의문과 같았다. 단순하지만, 그리고 날카롭지도 않지만, 장황한 이론을 들이대지도 않지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 아마 이종호는 그런 건축가였을 것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침목 데크와 그네가 인상적인 팜파스 휴게소 마당.
새롭지 않음 속에 있는 새로움. 이런 말장난 같은 이야기 속에 그의 건축이 존재한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재료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구법, 그리고 누구나 가능한 건축적인 접근 속에서 특이한 것을 끄집어내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무척 느리게 움직이지만 곧바로 핵심으로 파고드는 어떤 대단히 수준 높은 예술가의 손길이 닿은 듯한 건축을 통해 유명해진 1990년대 중반, 그는 유학을 가지도 않은, 화려한 경력도 없는, 30대 후반의 젊은 건축가였다.

건축이 땅을 압도하지 않고, 땅이 가진 잠재력을 충분히 이끌어내는 건축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존중하는 건축가라는 것이 이종호에 대한 대체적인 세간의 평가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에 대한 그의 글을 따라가 보면, 그는 건축 자체보다 건축에 담기는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볼 줄 알았던,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기억을 담고 싶어 했던 건축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기억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관심을 가지며 이어졌다. ‘명지대 방목기념관’에서는 학교 설립자의 기념관이 전망 좋은 식당이 되어 기념을 일상으로 변환시켰다. 백자를 만들던 도요지 발굴 기념 박물관인 ‘분원 백자관’에서는 멋진 달항아리 분원 백자보다는 깨진 파편들과 도공의 기억이 더 앞에 나서 있어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노근리 역사 평화박물관’은 미군에 의해 벌어진 양민 학살을 다루고 있으나, 그 전체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며, 분명한 것은 당시 굴다리 안에서 죽은 이들이 체험했을 그 공포와 유족들의 고통이다. 그는 “섣부른 애도는 금물이다. 어떤 정치적 윤색도 안 된다. 오직 상실의 아픔만이 있을 뿐이며 학살의 현장을 바로 앞에 둔 기념관은 오직 그 장소로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돌무더기 속으로 사라지는 듯한 모습의 ‘박수근 미술관’ 또한 일상의 풍경에서 관객을 다른 세계로 이끄는 매력적인 건축이다.

“박수근 미술관에서는 결국 화가와 방문객이 만나야 하는 문제였다. 그림을 담는 미술관에 앞서 청년 박수근을 만들었던 풍경을 방문객이 함께 보는 장치로서의 미술관이 더 큰 관심이었다. 그러니 미술관은 얕은 구릉의 풍경 속으로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이종호, 건축디자인신문 에이앤뉴스, 2012년 7월)

이종호는 자신이 속한 직능의 범위 안에서 성과를 이룬 존경받을 만한 건축가였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부정되었던 모양이다. 어떤 무례함과 무능함이 하나의 ‘건’으로 사람을 취급했던 모양이다. 누구보다 땅을, 사람을 존중했던 예의 바른 건축가였던 그는 그런 무례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박수근을 만들었던 풍경을 방문객이 함께 보는 장치로서의 미술관을 의도한 건축가 이종호의 박수근 미술관.
출처: C3 korea 2004년 10월호
# 존경 없는 시대에 등 떠밀린 죽음

존경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극존칭을 쓰며 그 사람을 배려하는 행위, 그런 단순한 것만이 아니다. 존경이란 존재에 대한 인정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는 존경이 없다. 모든 것을 자신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모니터 위에서 쉽게 꺼낼 수도 집어넣을 수도 있는 실제가 아닌 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실제로 있다. 나와 똑같은 기반 위에 엄연히 있다.

이종호의 봉사활동에 가까운 수많은 공공건축에 대한 기여, 건축가이자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어지던 행정과 관련된 의혹과 의심 속에는 어떤 존경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종호는 아산에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지었다. 그는 흙을 들어올려 집을 가렸다. 흙을 파내고 묻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고 흙을 덮은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건물은 높지 않다. 그리고 뾰족하지도 않다. 그러나 묘한 카리스마와 묘하게도 솟아오르는 감동을 준다. 그는 “내가 이순신기념관에서 하고자 했던 일은 분명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해방이었다. 그리해서 상식 속의 장군이 아닌 각자 내면의 장군이 될 수는 없는가에 대한 시도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당초의 계획에서는 이순신 유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난중일기’가 중심에 놓이는 개념이었다. 그는 맨 마지막 전시실에 이르면 실제 날짜와 같은 일자의 일기를 낭독하는 소리가 바닥에서 흘러나오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가의 의도는 무시되었고, 어디에서나 흔하게 사용되는 전시기법들이 전시장을 뒤덮었다. 이순신기념관 세 번째 전시실에서는 노량해전 4D 영상물이 상영되게 되었고, 이종호는 생전에 “유원지처럼 4D 영상물 상영으로 이순신을 기념하는 것은 이순신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박수근 미술관.
모두 알다시피 이순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전공을 세웠다. 그의 백전백승은 세계 전쟁사에 있을 수 없는 전과였고, 심지어 그의 전과가 믿을 수 없는 기록으로 치부돼서 인정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이다. 그는 모든 전투에서 다 이겼다. 다만 그가 극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의 무능’이었다. 어떤 영웅도 이겨낼 수 없는 무기력함과 치졸함 속에서 사투를 벌이면서도, 그는 어떤 적도 이 땅에 발을 들일 수 없도록 완벽하게 막아냈다. 그리고 그는 장렬하게 바다에서 산화했다.

믿을 수 없다. 그렇게 유능한 장군이 그렇게 싱겁게 세상을 버릴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죽음을 그리고 그 정도로 한심했던 나라의 무능을.

지금이 그런 시대인가. 영웅도 아닌 그저 자신의 직능에 충실하던 평범한 사람들조차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좌절하게 만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드러내놓고 무능한 시대인가.

명예를 빼앗는 것이 가장 잔인한 살인의 방법이다. 우리의 영웅들은 명예를 위해서 자신을 버렸다. 대마도에서 일본에 항거하며 죽음을 택한 마지막 선비 최익현이 바랐던 것은 조선의 명예였고, 자신의 명예이기도 했다.

가장 올바른 자세로 건축을 했던 건축가 이종호는 공교롭게도,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어디로 간 건지 알지 못한다. 나는 숙제를 끝내 풀지 못한 채, 책상 위에서 치우지도 못한 채 계속 바라보아야만 할 것 같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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