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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65〉 달성(達城), 대구서씨(大丘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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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1-07 21:58:43      수정 : 2014-01-07 21:58:43
◆달성서씨(達城徐氏), 대구서씨(大丘徐氏)는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모두 서씨의 종가인 이천서씨에서 분관된 성씨이다. 이천서씨 문헌에는 서신일의 손자가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徐熙) 장군이고, 그 서희 장군의 아들 4형제 중 서유(주)행(徐惟(周)行)이 달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같은 시조가 아니다. 달성서씨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구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들은 달성서씨의 향파(鄕派)와 경파(京派)였는데, 조선 숙종 28년(1702)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의견 충돌로 경파가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서씨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렇듯 한 뿌리이지만, 계대가 실전되어 다른 본관을 쓰게 된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광산김씨, 연안이씨와 함께 조선 3대 명문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천서씨가 해주최씨, 남양홍씨 등과 함께 고려의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다면, 달성·대구서씨는 조선시대를 주름잡은 명문거족이었던 셈이다. 그중 한양에 거주하던 달성서씨의 경파, 즉 대구서씨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주로 지방에 머물렀던 향파인 달성서씨의 시조는 서진이다. 그는 고려시대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에 오르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에 봉해졌다. 또 그의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穎)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 

충남 예산에 있는 대구서씨 시조 서한의 묘. 서한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대구서씨는 조선 초 서거정과 중기 서성을 거치면서 조선의 대표적 명문가로 우뚝 섰다.
달성서씨의 분파로는 현감공파, 학유공파, 판서공파, 감찰공파, 진사공파, 생원공파, 참판공파, 종사랑공파로 나뉘어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달성서씨는 총 13만2270가구에 42만93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반면 달성서씨 중에서 주로 서울(한양)에 거주했던 경파는 영조 이후 대구서씨로 분관했는데, 시조는 고려 때 군기소윤을 지낸 서한이다. 대구서씨는 서진을 시조로 하는 달성서씨와 근원이 같지만 분파된 시기와 계대를 확실히 고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구서씨는 시조 서한 이후 2∼6세의 세계가 실전되었다. 그래서 전객사를 지낸 7세 서익진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8세가 호조전서를 지낸 서의이고, 9세 서미성(徐彌性)이 조선에 출사하여 안주목사를 지냈다.

또 조선의 대문호인 서거정과 약봉 서성 이후 가문이 크게 일어나 상신(재상)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배출하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분파로는 만사공파, 전첨공파, 첨추공파, 도위공파, 봉사공파, 사가공파, 서흥파, 춘헌공파, 승사랑공파, 장원공파, 훈련봉사공파, 배산파 등 12개파가 있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대구서씨의 인구는 총 7645가구에 2만27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모화관과 영은문을 인수해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서울 서대문의 독립문, 서재필 동상이 독립문을 지켜보고 있다.
◆달성서씨 연혁과 인물

달성서씨는 시조인 서진이 봉익대부 판도판서에 오르고 달성군에 봉해진 이후 아들 서기준과 손자 서영까지 3대에 걸쳐 달성군에 봉해졌다. 이후 증손인 서균형(徐鈞衡)이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돈(辛旽)을 탄핵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아들 서침은 정몽주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조선 개국 이후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다.

서침은 3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장남 서문한(徐文翰)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을 거쳐 현감을 지냈고, 차남인 서문간(徐文幹)도 중시에 올라 현감을 역임했으며, 3남 서문덕(徐文德)은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냈다. 또 대사간이었던 서충(徐衷)의 증손인 서한정(徐翰廷)은 세종 때 진사로 태학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나,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 기슭에 은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응시(徐應時)는 중봉 조헌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이조판서에 추증), 서인충(徐仁忠)은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김상헌과 함께 화의를 반대했다. 또 서수천(徐壽千)은 이순신 막하에서 선봉수문장으로 임명되었다.

근현대 들어 구한말에는 시서화에 능해 팔능(八能)이라 불렸던 서병오(徐丙五)가 있으며,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서상일(徐相日)과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된 서상한(徐相漢) 형제가 유명하다. 또 사헌부 감찰 서목렬(徐穆烈)의 아들 서재승(徐在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주 근방에서 활약하였다. 

조선 초기 대표적인 문호였던 서거정.
◆대구서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대구서씨는 시조인 서한 이후 2∼6세가 실전되어 알 수가 없다. 그 후 전객사를 지낸 서익진(7세)을 중시조로 모시며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달성·대구서씨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대문호로 알려진 서거정(徐居正)이다. 그의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성종 때까지 6왕 45년간 6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조선의 대문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번역했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는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문선(東文選)’ ‘필원잡기(筆苑雜記)’ 등이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가 있다.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이 서거정의 종현손(형의 고손)으로 달성·대구서씨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 약봉 서성(徐?)이다.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서해(徐?)이다. 어머니는 좌의정 이고(李股)의 딸이다.

그는 선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의 검열,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도승지·황해감사·평안감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연에서 성혼·정철을 헐뜯는 정인홍 일파를 배척하다 왕의 미움을 샀다.

형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계축옥사(광해군 5년)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단양 등지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복귀하여 대사헌 등을 역임하다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도로 호종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기고 시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藥峯集)’이 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대구 달성공원 내에 있는 달성서씨 유허비. 달성공원은 세종 때 달성서씨 문중에서 국가에 헌납하여 생겨난 공원이다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서경우(徐景雨)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고, 넷째 아들 서경주는 선조의 딸 정진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서경우의 아들 서원리(徐元履)는 현종 때 병조참판을 지내고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 서문중(徐文重)은 숙종 때 영의정을 하였다. 약봉의 둘째 아들 서경수(徐景需)의 증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은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이다. 이렇듯 그의 자손 중에서 3대 정승, 3대 대제학, 3대 대학자가 계속 배출되면서 300여 년에 걸쳐 가장 번성한 명문가문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서종태(徐宗泰)는 숙종 때 영의정을 했고, 그의 둘째 아들 서명균(徐命均)은 영조 8년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며, 서명균의 아들 서지수(徐志修)는 영조 42년에 영의정을 지내 서경주의 집안에서 3대에 걸쳐 정승이 나왔고, 또 서지수의 아들 서유신(徐有臣)이 순조 때 대제학, 그의 아들 서영보(徐榮輔)가 대제학, 손자 서기순(徐箕淳)도 대제학을 하여 3대에 걸쳐 대제학이 배출됐다.

삼대 정승을 배출한 집안은 대구서씨 외에 청송심씨(심덕부·심온·심회), 동래정씨(정유길·정창연·정태화), 청풍김씨(김구·김재로·김치인)가 있다.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안으로는 대구서씨(서유신·서영보·서기순) 외에 광산김씨(김만기·김진규·김양택), 연안이씨(이정구·이명한·이일상), 그리고 전주이씨(백강 이경여 집안) 집안이다. 그런데 삼대 정승과 대제학을 지낸 집안은 대구서씨가 유일하다.

오죽하면 야사에는 만조백관이 거의 서씨 일문(一門)이어서 왕이 농담하기를 “어미 쥐가 새끼 쥐를 거느리고 나다니는 듯 하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약봉가(藥峯家)’는 선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약 300년간 조선 정계에서 주요 역할을 하였다. 또 구한말에는 개화파로 유명한 서광범(徐光範)과 서재필(徐載弼) 등을 배출하였다

세종 때, 달성서씨 문중에서 토지를 국가에 헌납하자 이를 포상하려 했지만 ‘서침’은 그 대신 국가에서 서민의 환곡을 탕감해줄 것을 건의했다. 이에 세종이 회화나무를 심어 서침의 마음을 기리게 해서 생긴 나무가 달성공원 내에 있는 서침나무이다.
◆대구서씨 근현대 인물

서광범의 증조부는 영의정 서용보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徐相翊)이다.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등의 영향을 받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 망명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김홍집 내각에서 법무대신에 임용되었으며, 내무대신 박영효와 갑오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내각이 무너지자 공사직에서 해임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폐병으로 죽었다.

서재필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충남 논산에서 자라다 서울로 왔다. 갑신정변 때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냉대하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내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와 형, 아내가 음독자살하고 동생 서재창(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은 굶어 죽었다.

주경야독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 창설자의 딸인 뮤리얼 암스트롱과 결혼하였다. 갑오경장 후 박영효의 권유로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였으며, 독립문을 세웠다. 하지만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측의 추방운동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3·1운동 후 미국에서 한국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이승만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하였다. 광복을 맞은 후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하는 동안 대통령 추대를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와 시국 혼란을 개탄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숨을 거두었다.

이외 달성·대구서씨 현대인물로는 정계에서는 서정희 서우석(이상 제헌국회의원), 서인석 서청원 서석재 서종열 서상목 서병수 서갑원 서영교(이상 국회의원), 서동권(법무부장관·국가안전기획부장), 서정화(내무부장관), 서석준(상공부장관), 서상철(동자부장관), 서종철(국방부장관), 서승환(국토부장관), 서일교·서윤홍(대법관), 서정신(법무차관), 서경석(외무부 기획관리실장)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서돈각(경북대총장), 서성택(국민대이사장), 서정상(우석대이사장), 서명원(충남대총장)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서민석(동일방직사장), 서정한(한국합금철회장), 서갑석(한국리스회장), 서병찬(조흥은행장) 등이 있으며, 시인 서정주, 극작가 서항석, 소설가 서기원, 가수 서수남, 배우 서인석 등이 달성·대구서씨 문중 인물이다(전·현직 및 달성·대구서씨 구분 없음).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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