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외교안보는 일관성 필요… 정권따라 정책 춤춰선 안돼”

입력 : 2013-12-31 17:57:00 수정 : 2013-12-31 17:57:0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전문가 릴레이 인터뷰 - ①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갑오년(甲午年)이다. 두 갑자 전 갑오년에 조선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제국주의의 격랑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무능하고 허약했던 조선은 한반도 지배를 노린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의 다툼 속에서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한 채 패권 경쟁의 승자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2014년 갑오년을 맞은 한반도 상황은 120년 전보다 더 엄혹해졌다. 한반도는 분단됐고 남북한은 군사적 대치 상태다. 대한민국은 구한말 조선이 아니지만 당시의 열강들은 덩치가 더 커졌다. 냉전 이후 유일 패권국이 된 미국은 태평양 국가를 선언하며 새롭게 부상 중인 중국과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그동안 감췄던 발톱(군사력)을 세우기 시작했다. 동북아의 안보지형이 구한말 못지않은 위기 변수로 요동치면서 한반도가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섰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국내 최대의 민간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아산정책연구원의 함재봉(55) 원장을 만나 한반도의 생존전략을 물었다.

―동북아의 시계가 19세기 말로 되돌아간 것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높다.


“지난 수십년간 동북아 각국은 경제 발전 등 대내 문제 해결에 주력했다. 우리는 경제 개발과 민주화를 이뤄야 했고, 중국과 러시아도 경제 개발을 하면서 대내 안정에 집중해야 했다. 일본도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면서 경제 발전에 올인했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에는 미국이 구축해놓은 안보 틀 내에서 평화가 비교적 잘 유지됐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경제 발전을 토대로 대외 문제에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우리도 G20(주요 20개국)과 핵안보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제이슈에 앞장서고 있다. 일본은 외교안보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고, 북한도 나름대로 핵·미사일을 활용해 자기 입지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동북아의 정세 기조가 경제에서 갑자기 외교안보 문제로 바뀌면서 각국 간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외교안보 각축전이 벌어졌던 19세기 말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격랑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에 따라 19세기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조지프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지난해 말 방한 기간에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지 말라’고 언급했다. 한국의 중국 편향을 경고한 메시지로 읽혔다.

“우리가 미·중 사이에서 워낙 고민하다 보니까 바이든의 발언에 과잉반응하는 것 같다. 바이든의 발언 논란은 영어식 표현에 대한 오해다. 미국 정치상황을 잘 안다면 바이든 부통령이 그런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최근 내가 백악관 지인들을 만나서 확인해 보니 모두 ‘우리가 어떻게 부통령을 보내서 한국 같은 중요한 동맹국을 협박하겠느냐’고 말하더라. 바이든의 발언은 미국 문화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바이든 발언의 진짜 의미는 1980, 90년대부터 미국이 쇠퇴한다, 아시아에서 빠져나간다는 말이 많았지만 미국은 떠나지 않았으며 매번 돌아왔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한·미 동맹을 토대로 북한의 위협에 맞서면서도 북한의 변화를 위해선 중국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다. 우리의 미·중 외교는 어떤 기조를 택해야 하나.

“미·중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세련돼 있다. 한·중, 한·미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광범위하다. 지난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란초미라지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은 다른 어떤 정상회담보다 시간도 길었고 다양한 이슈를 다뤘다. 미·중은 자기들끼리 무수한 조정작업을 통해 충돌을 방지하며 협력의 큰 틀을 깨지 않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최근 ‘중국은 신흥대국과 기존 대국 간에 존재해온 충돌이라는 숙명을 깰 수 있다’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최근의 방공식별구역 갈등을 보라. 우리는 이 사안이 미·중 간 정면 충돌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큰 충돌 없이 잘 조정됐다. 오히려 미·중 간 충돌을 기대했던 일본만 머쓱해진 결과가 됐다. 우리가 이런 두 나라 사이에서 (노무현정부 때처럼) 중간 (균형자) 역할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우리가 처한 입장을 ‘있는 그대로’ 미·중 양국에 솔직하게 설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고모부인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전격적으로 제거했다. 북한 정권의 불확실성이 동북아의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1950년대 김일성이 남로당과 연안파, 소련파를 숙청했을 때는 그냥 어느 날부터 관련 인물들이 언급 안 되고 사라져 버리니까 숙청됐을 것으로 생각했다. 북한 내부적으로 처참한 숙청이 일어났더라도 외부에서는 직접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공개 숙청했다는 것은 잘 이해가 안 된다. 북한 주장대로 장성택이 진짜 반란을 기도했다면 장성택이 어떻게 그런 단계까지 갈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북한 내부적으로 균열이 심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또 어린 김정은이 그냥 욱하는 심정에서 저지른 짓이라면 앞으로 (김정은이) 어떤 심리상태로 통치할지 심히 걱정된다. 북한 정권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 중국은 (장성택 처형이) 북한의 대내 문제고 어떻게든 6자회담을 열자고 주장하지만 내심 굉장히 당황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도 북한의 ‘민낯’을 본 만큼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달라질 거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하고 보조를 맞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로 한·일 관계가 또다시 벼랑 끝에 섰다.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아베의 참배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이 아베 정권의 성격에 대해 드디어 한·중과 같은 식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의 급부상과 북한 핵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 3국 협력을 강조하면서 한국이 역사 문제로 일본에 대해 너무 비타협적으로 나온다고 우려해 왔다. 실제로 미국은 이런 의견을 여러 경로로 한국 측에 전달해왔다. 그러나 이번 아베의 참배 사건을 계기로 아베 정권이 잘못된 이념적 바탕에서 여러 개혁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도 느끼게 된 것 같다. 우리로서는 이전보다 과거사 문제를 풀어가기가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앞장서 일본을 비판함으로써 미국이 또다시 ‘한국이 좀 과하다’고 식상해하지 않도록 적절히 관리하면서 (아베에) 비판적 시각을 갖기 시작한 미국을 활용하는 외교를 펴야 한다.”

―집권 2년차로 접어든 박근혜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박근혜정부의 정상외교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잘했다. 정상회담과 만찬, 의회연설 등은 역대 최고로 잘했다. 그런데 외교안보라는 것은 회담 자체도 중요하지만 실무진에서의 후속조치도 실제 회담만큼이나 중요하다. 한·미, 한·중 정상회담으로 양국 관계의 분위기는 잘 조성됐지만 이제는 그것을 굳힐 수 있는 후속조치가 필요하다.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정상회담이 잘됐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중 정상회담을 잘했다고 하는데 중국이 왜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그은 것인지, 한·미 정상회담 잘했다는데 미국은 왜 한·일 갈등에 대해 일본 편을 드는 것인지 불만을 느끼는 국민이 적지 않다. 외교안보 부처들이 정상회담의 성과를 구체적 결실로 이어지게 만드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동북아 격랑을 헤쳐나가기 위해 우리 외교에 필요한 것은.

“워싱턴이나 베이징에 가보면 그쪽 사람들은 대놓고 ‘한국 외교안보 정책은 지속성이 없다’고 불평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도 사람도 너무 바뀐다는 것이다. 그동안 좌우 정권이 교체하면서 북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햇볕정책’(김대중정부의 대북유화정책)에서 ‘5·24 조치’(이명박정부의 대북제재조치)까지 스펙트럼의 진폭이 컸다. 국내 정치가 대외 정책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외교안보 정책이 직접적으로 국내 정치의 연장선상에 놓여선 안 된다. 미국은 집권정당이 바뀐다고 해서 한반도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구한말 우리가 친청, 친러, 친미, 친일로 원칙 없이 그때그때 시류에 편승해 정책을 바꾸다 보니 결국 나라를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맞았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대담=김동진 기자, 사진=허정호 기자 bluewins@segye.com

■함재봉 원장은…

●1958년생 ●칼턴칼리지 경제학 학사 ●존스홉킨스대 정치학 석·박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사회과학국장 ●미 남가주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겸 국제관계학부 및 정치학과 교수 ●랜드(RAND)연구소 선임정치학자 ●현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대표 저서:‘Confucianism for the Modern World’(2003)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2000) ‘탈근대와 유교’(1998)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