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송영애의 영화이야기] 응답하라! 그때 그 시절 '극장傳'

관련이슈 송영애의 영화이야기

입력 : 2013-12-20 16:53:12 수정 : 2014-01-04 10:36:0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지금은 사라진 영화관에 관한 추억
스카라극장/사진=한국영상자료원
서울 시내에 있었던 영화 상영관 중 국도극장, 국제극장, 단성사,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아세아극장, 아카데미극장, 을지극장(파라마운트극장), 중앙극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재개봉관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던 경남극장, 금성극장, 대지극장, 동화영화관, 명동극장, 미우만극장, 성남극장, 시공관, 시네마코리아, 오스카극장, 우미관, 코리아극장, 평화극장, 화신영화관 등을 들어본 사람은?  

위에 나열한 영화관들은 모두 사라져 지금은 없다. 건물조차 사라지거나, 건물은 남아있어도 더 이상 영화관은 아닌 곳들이다. 예전에 주로 갔던 영화관과 요즘 찾는 영화관들을 비교해보면 추억이 남아있는 곳은 별로 없다. 불과 10~20년 사이 동네 빵집이나 슈퍼마켓이 사라지듯 많은 영화관들도 사라졌다. 

대전이 고향인 필자는 학창시절 대전극장, 아카데미극장, 서라벌극장, 중앙극장, 신도극장 등을 다녔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아카데미극장 이외에는 모두 남아 있지 않다. 상경한 이후에는 씨네하우스, 그랑프리극장, 동아극장 등을 즐겨 찾았는데 이곳들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시 극장은 요즘의 멀티플렉스 영화관과는 많이 달랐다. 내관과 외관은 물론, 좌석에 앉아 영화를 관람하는 분위기도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에 비해 영화를 보는 내 마음 또한 달랐을 것이다. 

과거에는 일단 특정 영화가 아니어도 되는 데이트나 시간 보내기 경우를 제외하고, 영화를 보려면 어느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보통 영화관에서 한 편의 영화만 개봉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그랬다. 전국이 다 마찬가지였다. 한국영화 사상 첫 서울관객 100만명을 돌파한 '서편제'(감독 임권택, 1993)는 서울에서 단성사 한 곳에서 개봉됐다. 요즘 식으로 하면 스크린 1개에서 100만 명 이상을 불러 모은 셈이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물론 장기 상영을 했기 때문이지만 어마어마한 숫자임은 분명하다.  

영화 상영 정보는 신문 광고나 영화 월간지를 통해 접했다. 금요일 마다 일간지 문화면을 채운 영화 포스터, 골목 곳곳에 붙어있던 영화 포스터를 통해 상영 영화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주간지 마지막 부분에는 전국 영화관의 상영영화 리스트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소개됐다. 전화예매도 되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고, 당일 표는 그 날에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던 영화는 개봉 날 아침 줄을 서서 표를 샀던 시기도 있었다.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에 영화전용관이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이후였다. 일제 강점기가 배경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영화관이 서울 종로에 있던 단성사나 우미관이다. 종로3가의 단성사는 1907년 공연장으로 출발하여 1918년 영화전용관으로 전환된 조선인 상대 영화관이었고, 종각에 있던 우미관은 1912년에 개관한 조선인 상대 영화관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영화관의 지리적 요건에 따라 조선인 상대와 일본인 상대로 나뉘었는데, 무성영화 시기에는 영화관에 고용된 변사가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해방 후 국도극장으로 바뀐 황금관은 1913년에 개관한 대표적인 일본인 상대 영화관으로 1999년 철거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국도호텔이 세워졌다. 충무로에 있었던 스카라극장은 1930년 일본인 상대의 약초극장으로 개관했다가 해방 후 수도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극장명이 바뀐 것인데, 1956년 '자유부인'(감독 한형모)이 개봉된 영화관으로도 유명하다. 2005년 철거될 당시에는 '시사회 전용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필자가 마지막으로 갔던 것도 '바람난 가족'(감독 임상수, 2003)의 시사회였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를 보기 위해 단성사 앞에 운집한 관객들/사진=한국영상자료원
해방 후 적산불하를 통해 한국인으로 주인이 바뀐 영화관 중에는 중앙극장이 있다. 중앙시네마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텐데, 원래는 극장 앞마당이 넓었지만 도로 확장으로 앞마당은 사라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상대로 나눠있던 서울 시내 영화관들이 해방 이후에는 외화관과 방화관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외화관이었던 단성사는 외화 중에서도 액션영화를 주로 상영했고, 중앙극장은 외국 멜로영화를 주로 상영했다고 한다. 한때 중앙극장과 단성사의 주인이 같았는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영화수입사 사장이기도 했다. 반면 국도극장, 명보극장 등은 대표적인 방화관이었다. 방화관과 외화관의 구분은 나름 확실했던 것 같다. 1966년 스크린쿼터제가 도입되면서 모든 영화관들이 연간 일정 일수 이상 한국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그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방화관과 외화관 명칭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개봉관, 재개봉관 혹은 1번관, 2번관, 3번관이라는 명칭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모든 영화관이 개봉관이지만, 사실 꽤 오랫동안 전국에는 개봉관과 재개봉관이 나뉘어 있었다. 도심에 있는 객석 1천석 이상의 대형 영화관들은 개봉관으로 허가를 받아 운영되었지만, 규모가 작거나 변두리에 위치한 영화관들은 개봉관에서 상영이 끝난 영화의 필름은 가져다 다시 상영하는 재개봉관이었다. 그 중에는 동시상영관들도 많았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던 학생들은 개봉관보다는 재개봉관에서 영화를 봤다. 재사용 필름이다 보니 화질이 떨어졌어만 값이 싼 게 장점이었다.  

개봉되는 순서에 따라 개봉관은 1번관, 재개봉관은 2번관, 재재개봉관은 3번관 등으로 부르기도 했고, 뒤로 갈수록 화질은 더욱 나빠져 닳고 닳은 필름이 끊어지는 경우 영화관에서 이어 붙였기 때문에 상영 중에 뚝 뚝 끊어지는 장면이 있기도 했다. 한 필름으로 여러 재개봉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경우에는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필름을 옮기면서 아찔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보통 장편 극영화 한 편은 필름 2릴 분량이기 때문에 한 극장에서 첫 번째 릴을 상영하는 동안 다른 극장에서는 두 번째 릴을 상영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그 밖에 영화관 앞에 걸려 있던 직접 그린 대형 간판, 버스 정류장마다 빼곡하게 붙어있던 영화 포스터들, 인기가 많은 영화의 경우 불법이기는 하지만 입석도 있었던 영화관 내부, 본 영화 상영 전에 꼭 봐야만 했던 대한뉴스와 문화영화(정부홍보영화) 등은 이제 모두 추억이 되었다. 

현재 서울 시내에 이름이 남아있는 전통적인 영화관은 대한극장, 서울극장, 피카디리극장, 허리우드 극장 정도다. 1959년 재개봉관 신영극장으로 출발해 2003년부터는 멀티플렉스로 운영되던 아트레온은 얼마 전 CGV 신촌아트레온으로 바뀌었고, 1958년 반도극장으로 출발한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은 2010년부터 롯데시네마 피카디리로 운영되고 있다. 종로2가 낙원상가에 위치한 허리우드극장은 1969년에 개관한 개봉관으로 현재는 관이 나뉘어 서울아트시네마와 실버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울극장과 대한극장은 개관 당시 주인이 여전히 소유하고 있는데, 현재는 모두 멀티플렉스로 운영되고 있다. 필자에게 추억으로 남아있는 대전의 극장들 중에서도 멀티플렉스로 운영되고 있는 아카데미극장을 제외하고는 백화점이나 주차장 등으로 바뀌었다. 

명보극장/사진=한국영상자료원
1990년대 초 홈비디오가 대중화가 되기 전까진 개봉관에서 영화를 놓치면, 재개봉관을 찾아가야 했고, 그마저 놓치게 되면 몇 년 후 지상파TV에서 명절 특집으로 볼 수도 있었다. 인기가 없었던 영화는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품이 많이 들었고, 나중에 또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봤기 때문에 감동이 더 컸던 것 같다. 

요즘의 멀티플렉스 영화관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예전의 영화관들이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모습도 달라졌다. 일단 영화관에 가서 시간이 맞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기다리던 영화는 미리 예매를 해 보기도 한다. 3D, 4D, IMAX 상영관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설사 영화관에서 영화를 못 봤다 해도, 영화를 볼 방법이 얼마든지 많다.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면 지금의 영화관 역시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추억의 공간으로 기억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비록 영화관의 외양이나 문화가 달라질지 몰라도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나 사라지지 않은 것은 바로 영화관에 대한 기억과 추억일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는 영화관은 없다.

어린 시절 살았던 집, 단골 분식집, 빵집, 구멍가게, 극장 중 아직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날 맞아주는 장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영화관들, 그리고 앞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곳들에 대한 기억이라도 잘 챙겨야겠다. 

혹시 1960~70년대 서울 지역 개봉관과 관련된 보다 자세한 정보가 궁금하신 분들은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했던 구술채록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도 참여했던 이 연구에서 명보극장, 단성사, 스카라극장 등에서 근무한 분들의 구술 채록을 한 바 있다.   

서일대 영화방송과 외래교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
  • 수지 '하트 여신'
  • 탕웨이 '순백의 여신'
  • 트리플에스 코토네 '예쁨 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