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8〉 임씨(任씨), 풍천임씨

관련이슈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입력 : 2013-09-30 21:19:10 수정 : 2013-09-30 21:19:1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임(任)씨에 대하여

맡길 임(任)을 쓰는 임씨는 풍천임씨와 장흥(長興)임씨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외에도 곡성(谷城), 과천(果川), 아선(牙善), 회덕(懷德), 진주(晉州), 함풍(咸豊) 등이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임(任)씨는 5만3000여가구에 총 17만20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중 풍천임씨가 9만9986명이며, 장흥임씨가 2만5000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이 통계는 1985년 국세조사 때보다 인구가 줄어든 것으로 되어 있어, 통계상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조사할 때 조사원들이 임(林)씨와 임(任)씨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생긴 착오로 판단된다.

그중 풍천임씨는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사람인 임온(任溫)을 시조로 한다. 장흥임씨의 시조는 임호(任灝)로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 정종 때 귀화하여 정안현(定安縣·지금의 전남 장흥군 관산읍)의 당동리에 정착하였기에 장흥임씨라 정했다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관산임씨라고도 한다.

맡길 임(任)을 쓰는 풍천임씨 등은 적은 인구수(현재 본관 인구 순위에서 풍천임씨는 82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170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할 정도로 명문집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임사홍(任士洪) 등의 사건으로 인해 부침도 많았던 집안이다. 

사명대사 서거 400주년을 기념해서 열린 추모대제 장면
◆풍천임씨(豊川任氏)는

풍천임씨의 본관이 경북지방의 낙동강변에 있는 풍천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데, 풍천임씨의 본관은 황해도 지방의 풍천을 의미한다. 풍천임씨의 시조 임온은 중국 소흥부 자계현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고려 충렬왕 때 그의 5대손인 임주(任澍)가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살았기에 황해도 풍천에 사적(賜籍)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즉 풍천임씨의 옛날 보첩에는 시조 임온에서 5세에 걸쳐 중국에서 살았고, 6세손인 임주에 이르러 고려에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후 황해도 풍천 남쪽 박달산 아래 도곡리에서 발견된 임주의 조부 임도(任徒)와 부 임천유(任天裕)의 비(碑)와 지석(誌石)이 발견됨으로써 중국거주설이 부정되었다.

또한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는 설에 대해서도 충렬왕 당시에는 제국대장공주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충렬왕이 연경(지금의 북경)에 볼모로 있다가 원나라 세조의 딸인 흘도로공주(忽都魯公主)와 결혼하고, 부왕이었던 원종(元宗)이 서거함으로써 귀국하게 되었다는 기록만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풍천임씨 대종회 측에서는 중국 도래설에 대해 ‘확증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찌되었든 풍천임씨가 한 가문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임온의 5대손인 임주에서부터라는 것은 대체로 일치한다. 즉, 임주는 고려 충렬왕을 섬기어 일찍이 경상도 안찰사를 역임하고 감문위대장군(종4품)으로 벼슬을 마쳤다. 그리고 임주의 아들 대에서 삼사판사(三司判事) 임자송(任子松)과 민부전서(民部典書) 임자순(任子順)이 나와 두 파로 나뉜다. 임자송은 백파(伯派)의 시조가 되고 임자순은 중파(仲派)의 시조가 되었다. 또, 두 파는 다른 이름으로 부원군파(府院君派·백파)와 전서공파(典書公派·중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 파에서는 조선조에서 고르게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상신 1명에 호당 6명, 청백리 2명이 배출되고, 공신 1명, 장신 3명이 배출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에서 임천유(상호군), 임자송(찬성사), 임자순(개성유수), 임덕유(공조판서) 등이 있으며, 조선조에서는 임원준(우참찬), 임사홍(도승지), 임희재(서예가), 임응규(유정, 사명대사), 임유겸(공조판서), 임추(호조참판), 임권(좌참찬), 임열(한성판윤), 임호신(형조판서), 임성고(형조판서), 임백경(우의정) 등이 있다. 또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481명인데, 그중 문과급제자가 148명, 무과 24명, 사마시 308명, 역과 1명이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현재 인구는 총 9만9986명이다. 

표충사의 사명대사 영정
◆연혁과 풍천임씨의 인물

풍천임씨가 하나의 가문으로 성장한 것은 시조 임온의 5대손인 임주에서부터이다. 임주는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고는 하나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고려 충렬왕을 섬기어 일찍이 경상도 안찰사를 역임하고 감문위대장군(종4품)이 되었다.

그의 아들로 임자송과 임자순이 있는데, 임자송은 백파의 시조가 되었고 임자순은 중파의 시조가 되었다. 백파의 시조 임자송은 동지밀직사를 거쳐 익찬공신의 호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됐다. 이후 충숙왕 때 일등공신으로 서하군에 올랐으며, 조적의 난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에 올라 서하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로 인해 백파는 부원군파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중파의 시조 임자순은 통정대부로서 민부전서를 역임하고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임자송의 5대손이 세종 때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 좌찬성(종1품) 임원준(任元濬)이다. 그는 세종과 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는데, 10세에 시를 지었다고 한다. 처음 과거시험을 칠 때 부정행위로 시험볼 자격을 박탈당했는데, 이후 회복되어 장원급제하고 승승장구하여 서하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이 갑자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임사홍이다. 

풍천임씨 대종회에서는 경기도 남양주 진접읍에 선조제단비를 설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성종 때 도승지까지 올랐던 임사홍은 사림에게 밀려나 있다가 연산군(燕山君)이 왕위에 오르자 연산군과 친분이 있던 아들 임숭재의 힘을 빌려 복귀하였다. 그 후 연산군에게 폐비윤씨 사건을 고해바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물론 연산군이 이미 폐비 윤씨사건을 알고 있었고, 단지 이용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찌되었든 갑자사화로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관련인물 10여명이 사형당하고, 한명회(韓明澮), 정여창(鄭汝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며, 성종 때 직제학을 지낸 임희재(任熙載)는 연산군과 친했던 아버지 임사홍, 형 임숭재와 달리 연산군을 비방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외 임사홍의 아들인 임광재(任光載)는 예종의 사위가 되고, 임숭재(任崇載)는 성종의 사위가 되었다. 

이후 임자송의 7대손인 임열(任說)은 명종 때 한성판윤과 제학을 지냈고, 임자순의 6대손인 임유경(任由謙)은 중종 때 한성판윤과 공조판서를 지냈다. 또 그의 아우 임유손(任由遜)은 감찰을 지내 가문을 번창시켰다. 이 두 집안이 풍천임씨 2대 인맥을 이루고 있다.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밀양의 홍제사 경내에 있는 표충사비는 국난이 닥치면 땀(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임열의 후손에서는 고종 때 우의정을 지낸 임백경(任百經)이 있고, 학자였던 임성주(任聖周)가 있으며,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임국로(任國老), 현종 때 병조참판을 지내고, 명신으로 이름이 높은 임유후(任有後)가 있다.

특히 임성주는 율곡의 학풍을 이은 주기철학의 대가이다. 그는 경학과 성리학을 규합해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하고 ‘녹문집(鹿門集)’을 남겼다. 그의 누이도 윤지당 임씨로 조선조에 몇명 안 되는 여류성리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녀가 죽은 뒤 동생인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가 유고를 정리하여 ‘윤지당유고 2권’을 간행했다.

한편 임유겸의 후손에서는 중종 때 예조참판을 지낸 임추(任樞), 역시 중종 때 병조·예조 판서를 지낸 임권(任權)이 있으며, 임추의 아들로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임호신(任虎臣)과 형조참의를 지내고 역시 청백리에 오른 임보신(任輔臣) 등이 대를 이어 청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임유손의 후손에서는 남원부사를 지낸 임현(任鉉), 숙종 때 형조참판을 지낸 임홍망(任弘望), 정조 때의 학자였던 임태춘(任泰春), 헌종 때 형조판서를 역임한 임성고(任聖皐), 고종 때 훈련대장이었던 임태영(任泰瑛), 철종 때 성리학의 대가였던 임헌회(任憲晦) 등이 나왔다.

또 풍천임씨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을 꼽을 수 있다. 그의 본관은 풍천임씨로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이다. 호는 사명당이며, 법명은 유정이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임수성(任守成)의 아들이다. 부모가 모두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였다. 1575년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가서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찾아가 수행하였다. 

갑자사화를 불러온 임사홍의 아버지이자 신동으로 유명했던 좌찬성 임원준의 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건봉사(乾鳳寺)에서 의승병을 모아 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승군(僧軍)의 총사령관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그 후 한양 근처 삼각산과 노원평 일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에 선조가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또 국방에 힘을 기울여 많은 산성을 증·개축했는데,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南漢山城) 등이 그것이다.

그 후 선조의 부름을 받고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하는 등 8개월 동안 노력한 끝에 전란 때 인질로 잡혀간 35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입적했고, 그의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석장비(石藏碑)를 세웠는데, 석장비문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직접 지었다. 또 밀양시에 있는 홍제암 내에 사명대사의 표충비(表忠碑)가 있는데, 국난이 있을 때 땀(또는 눈물)을 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하다. 

 
인절미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난갔을 때, 농가에서 떡을 지어 바쳤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이에 인조가 신하에게 그 떡의 이름을 물었으나, 신하가 대답을 못하고 임씨 농가에서 지어왔다고만 했다. 이에 인조가 임씨농가에서 지은 떡의 맛이 일품이라는 뜻으로 ‘임절미’라고 했고, 이것이 인절미가 되었다.
◆풍천임씨의 근현대인물

풍천임씨의 현대 인물은 해방 후 정치인이자 학자였던 임영신(제헌의원·상공부장관·중앙대 총장)씨가 유명하다. 그외 정관계 인물로는 임흥순(서울시장), 임지호(대전시장), 임관호(제주도지사), 임철호(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임문환(농림부장관), 임태희(대통령비서실장·노동부장관·국회의원), 임용순, 임병수, 임철순(국회의원), 임충빈(육군참모총장), 임응순(정보사령관), 임항준(대법관), 임좌순(중앙선관위 사무총장), 임지순(예비역 중장)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임창호(대한생명보험회장), 임필호(고려통운 대표), 임희준(한일소주 사장), 임태건(진양산업 대표) 등이 있다.

또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임숙재(숙명여대 총장), 임혁백(고려대 정책대학원장), 임정순(서울대 의대학장), 임종순(연세대 교수), 임기순(화가), 임형빈(추계전문대학장), 임효재(서울대 박물관장), 임홍순(이화여대 교수), 임재경(한겨레신문 편집인), 임인재(서울대 교수), 임택근(문화방송 전무), 임달호(한양대 학생처장), 임헌영(문학평론가) 등이 있다.

법조계에는 임항준(대법원판사, 변호사)을 비롯하여 임두빈(변호사), 임대화(전 서울민사지법부장판사), 임휘윤(검사) 등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
  • 오마이걸 유아 '완벽한 미모'
  • 이다희 '깜찍한 볼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