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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이 영친왕 환국 막았다”

입력 : 2013-08-16 19:13:53 수정 : 2013-08-16 22:3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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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볼모로 끌려간 이은의 동반자, 이방자 여사 ‘격랑의 역사’ 회고록
“이승만, 정치 입지 좁아질까 냉대… 박정희 때 환대 받은 건 아이러니”
덕혜옹주 등 왕손들 비극적 삶 묘사
강용자 지음/김정희 엮음/지식공작소/1만3500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강용자 지음/김정희 엮음/지식공작소/1만3500원


세계 왕조사에서 조선만큼 끝이 좋지 않은 왕조도 드물다. 왕조가 막을 내린 이후 그 후손들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거나 은둔한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철저히 소외됐으며 궁핍한 삶을 이어갔다. 특히 고종의 차남이자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1897∼1970)은 이승만정부로부터 철저히 배제됐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못난 조선 왕조라지만, 전통은 전통대로 지켜지고 보존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승만정부는 그러하지 못했다. 이은의 일본인 부인 나시모토미야 마사코(한국명 이방자) 여사가 구술하고 강용자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등이 쓴 신간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는 왕손들의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마사코의 증언이다.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은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 귀국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지요. 심지어 도쿄의 살던 집을 한국 국유재산이니 200달러에 팔고 나가 달라고 주일대표부를 통해 요구해왔어요. 6·25전쟁 직전인 1950년 2월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도쿄에 온 이 대통령을 만나러 전하를 모시고 맥아더 사령부에 갔었는데, 만나는 것조차 귀찮다는 투였어요. 대통령은 전하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않고 ‘오시려면 오시오’라는 말만 던질 뿐이었어요.”

당시 주일 대표부 대사였던 신흥우씨가 두 사람을 뒤따라 나오면서 “대통령의 심리를 도대체 모르겠다. 자신도 전주 이씨 몇 대손이라고 자랑하곤 하면서 정작 종손인 이왕을 저리 냉대한다. 아마 조국에서 이왕을 동정하고 인기가 높아 자신에게 불리할 것 같으니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반면 맥아더 원수는 이은을 황손으로 각별히 대했다고 한다. 특히 6·25전쟁 당시 맥아더 원수는 이은을 군 요직에 앉히려 했었다고 마사코는 증언한다. 한국인 출신 군 전략가가 없었으니 일본 육사에서 제대로 배운 이은을 실제 전쟁에 투입하려 했다는 것이다.

부산에선 민족세력이 나서 이은의 귀국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활발했으나 실제 이뤄지진 않았다. 이승만 정부 측에선 “무슨 소리냐 그럴 일 없다”면서 일축하는 바람에 이은의 6·25전쟁 참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맥아더는 궁핍한 이은과 마사코에게 매달 적지 않은 생활비를 전하면서 황태자 대접을 했다고 한다.

고종의 차남이자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왼쪽)과 일본인 부인 나시모토미야 마사코(한국명 이방자)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 전략에 따라 1920년 일본 도쿄에서 정략적인 결혼을 했다.
이은의 환국은 박정희 시대에 이뤄졌다. 마사코의 증언이다. “1960년 7월 말 한국 대표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의장이 ‘이은 전하의 용태를 걱정하고 있다’면서 전하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적잖게 전해왔어요. 그러나 전하는 이승만의 냉대와 극심한 스트레스로 뇌혈전을 앓고 있었어요. 비행기에 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습니다.” 마사코와 박정희정부는 이은의 귀국을 서둘러 1963년 6월13일 환국했으나 의식도 차리지 못한 채 그대로 성모병원으로 입원했다.

결국 이은은 식물인간으로 투병하다 1970년 5월1일 7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종친인 이승만은 자신에게 불리할 것 같아 철저히 배제했으나 일면식도 없는 젊은 군인 박정희로부터 환대를 받은 것은 아이러니였다”고 마사코는 전했다. 창덕궁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낸 마사코는 이후 한국에서 지적장애아 후원사업 등 사회사업을 전개하다 1989년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은은 이토 히로부미의 조종으로 11세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다. 히로히토 국왕의 사촌뻘인 마사코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의 딸로 황태자비 물망에 올랐으나 정략결혼으로 이은의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망국 한을 되씹으며 몸부림치는 그분을 보며 나는 한·일 융화보다 외로운 그분의 따뜻한 벗이 되고자 했다. 험하고 암담한 인생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그녀는 “내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 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고 늘 말했다.

마사코의 증언에 따르면 이은은 결코 나약한 왕손이 아니라 심지가 굳고 대단한 애국심과 인정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조선인들이 나를 왜 망명하지도 않고 일본의 보호 밑에 있느냐는 비난을 잘 알고 있소. 내가 망명하면 조선 백성은 물론이고 왕실도 없애버리려 할 것이오. 일본 국수주의자들은 그렇게 떠들고 있는 중이오.”

이은은 일본군 사단장 재직 시절 조선 병사들을 만나면 집으로 초대해 가르침을 주며 애국심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책에선 육영수 여사의 마사코 여사 지원 내용, 순종비인 윤비, 비운의 덕혜옹주, 아들 이구(2005년 도쿄서 사망)의 한국 생활 부적응 등 조선 왕실 후손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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