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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3>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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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7-22 19:13:58 수정 : 2013-07-22 19: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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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이후 생겨난 토착성씨… 칠원윤씨 가장 오래돼 파평윤씨 근세 현대 인물과 연혁

파평윤씨 중에서 노성윤씨로 알려진 장령공계는 노성(魯城, 충남 논산)에 세거한 윤돈(尹暾)의 후손을 가리킨다. 이 가문은 학자 집안으로 유명하다. 윤돈의 손자 중에서 윤황(尹煌)과 그의 아우 윤전(尹?)이 유명하다. 또 윤황의 여덟 아들 중 윤순거(尹舜擧)·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가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윤문거는 효종 때 동래부사를 지내고 경학·성리학·서예에 뛰어났고, 윤선거는 송시열 등과 교류하던 거유로서 예송을 둘러싼 대립에서 중립을 지켰다.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은 우계 성혼(成渾)의 사위이다. 숙종 때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왕과의 배면(拜面)도 없이 상신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처음엔 송준길·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당하자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여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윤증 초상
그러한 그의 정치적 행동은 노·소분당과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송시열이 숭명의리를 견지한 반면에 윤증은 대청 실리외교를 주장했다. 송시열에게 보낸 신유의서에서 실학적 경륜을 담아 스승(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 비판함으로써 노·소간의 격렬한 당쟁이 전개되고(懷尼是非·회니시비), 노론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사후 홍주의 용계서원, 노성의 노강서원 등에 향사되었다. 윤증의 아들 윤행교(尹行敎)는 대사헌이 되었다.

이 밖에도 정승급 인물로는 윤인경(尹仁鏡)·윤동도(尹東度) 등이 있다. 윤인경은 각 조의 판서를 거쳐 인종 때 좌의정·영의정이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윤동도는 영조 때 대사간·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학자로는 윤정(尹鼎)·윤경남(尹景男)·윤낙(尹洛) 등이 유명하다.

근세 인물로는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등을 폭사시킨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시인이었던 윤동주(尹東柱), 상해임시정부 군무장이었던 윤기섭(尹琦燮) 등을 꼽을 수 있다.

매헌(梅軒) 윤봉길의 본래 이름은 윤우의(尹禹儀)이며, 봉길은 별명이다. 그는 윤승례(尹承禮)의 아들인 윤규(尹珪)를 파조로 하는 제학공파(提學公派)이다. 그의 선조는 충북 청원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증조부 때 당진군 덕산면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세 때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어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짓고, 월진회 등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일제치하 농촌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1930). 청도와 상해 등을 전전한 그는 1931년에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 수많은 일본 전범들을 살해하였다. 그 후 체포되어 오사카 형무소로 이송된 뒤, 십자가 형틀에 매여 총살되었는데(1932년), 그의 나이 25세였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용정의 명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1년 연희전문(연세대 전신)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立敎)대학과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다녔다. 그러다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건강이 악화하여 1945년 2월에 생을 마쳤다.

그는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대해 심오한 고뇌를 그린 시인으로,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시집은 하숙집 동료들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시집 형태로 발행한 것이다. 또한 그의 절정기 시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연희전문 졸업 때 발간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광복 후(1948년)에야 빛을 보았다.

윤기섭(尹琦燮)은 보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사, 신민회 활동을 하다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상해임시정부 국무원 군무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민족유일당 창설 운동을 주도하여 민족혁명당 창설에 기여를 하였다. 광복 후 2대 국회의원에 피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9년 73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순국하였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 윤증의 생가인 충남 논산의 명재고택.
그 외에도 파평윤씨 문중에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윤준희(尹俊熙)와 윤창석(尹昌錫)·윤해(尹海)·윤애경(尹愛卿)·윤석구(尹錫求)·윤현진(尹顯振) 등이 있다.

또한 현대 인물로는 정계에서 윤석구(전 체신부 장관)·윤성순(전 교통부 장관)·윤호병(전 재무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윤택중(전 문교부 장관, 국회의원)·윤건중(전 농림부 장관)·윤천주(전 문교부 장관, 국회의원)·윤성민(전 국방장관), 윤길중·윤담, 윤명운·윤병구·윤영탁·윤인식·윤형남·윤제술·윤재근·윤재욱 등 국회의원과 윤운영(대법 판사)·윤태일(전 서울시장)·윤동석(전 원자력청장)·윤태호(전 충남지사) 등이 있다.

또 학계에서는 윤석중(아동문학가)·윤태림(전 숙명여대 총장)·윤인구(전 연세대, 부산대 총장)·윤해병(의학박사)·윤덕진(의학박사)·윤갑병(경희대 교수)·윤근식(성균관대 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윤석민(대한선주㈜ 회장)·윤장섭(서울농약㈜ 회장) 등이 있으며, 연예인으로는 가수 윤도현씨가 있다.


해남윤씨는…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인물인 윤존부(尹存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윤존부 이후 7세까지 세계가 실전되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8세손인 윤광전(尹光琠)에 이르러서야 자세한 세계가 전해오고 있다.

윤광전은 공민왕 때, 사온직장(司?直長) 영동정(令同正)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해남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1354년(공민왕 3)의 노비상속문서(보물 483호)의 ‘지정십사년노비문권(至正十四年奴婢文券)’에서이다. 이것은 직장동정(直長同正)인 윤광전이 그의 둘째 아들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해 주는 증서이다.

이 문서에서도 윤광전은 이전부터 탐진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해남을 본관으로 쓴 것으로 윤광전 이후 12세손인 윤효정(尹孝貞)이 강진(康津)에서 해남으로 옮겨 거주하였고, 이때부터 해남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파악된다.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은 당대 거부였던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해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고 한다. 그는 백성이 어려울 때 사재를 털어 구휼하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 ‘적선지가(積善之家)’라는 칭송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윤효정이 바로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시대 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조부가 된다. 지금도 해남윤씨 집성촌인 해남군 연동리 마을의 70여 호는 윤효정의 후예들이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는 중종 때 홍문관부교리를 지내고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은 벼슬이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해남윤씨를 중앙 무대에서 명가의 반열에 들게 한 인물이다.

전남 해남 윤선도의 묘.
고산 윤선도는 윤의중의 손자다. 고산은 광해군 4년에 처음 관직에 나아간다. 그의 일생은 짧은 벼슬살이와 긴 유배 그리고 귀향·은둔의 연속이었다. 고산은 그보다 50년을 앞서 살았던 정철과 함께 ‘우리 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시조는 75수에 이른다.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이 그것이다. 고산은 병자호란 뒤 은둔지로 택한 보길도 앞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고 가난한 백성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고산의 증손 윤두서는 숙종 때 극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며 심사정·정선과 함께 3재로 일컬어졌다. 그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이며, 그 외의 그림은 모두 보물 481호로 지정됐다.

현대 인물은 정관계와 법조계에 윤관(전 대법원장)·윤근환(전 농림부 장관)·윤일영(전 대법관), 윤영선·윤재명·윤만석(이상, 전 국회의원), 윤철하(변호사)·윤전·윤재식(전 부장판사, 변호사) 등이 있으며, 재계에는 윤태현(전 크라운제과 사장)·윤근환(전 농협중앙회장)·윤철(전 한국포장공사 회장)·윤순복(전 삼성제약 사장)·윤규옥(성모병원장) 등이 있고, 학계에는 윤상현(전남대 교수)·윤내현(단국대 교수)·윤훈현(고려대 교수)·윤재걸(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시인)·윤주경(전남대 교수)·윤중호(연세대 교수) 등이 있다.

해남윤씨는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1만7366가구에 5만56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칠원윤씨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을 본관으로 하는 칠원윤씨(漆原尹氏)의 시조는 윤시영(尹始榮)이다. 칠원윤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윤(尹)씨이다. 시조인 윤시영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태사공으로 고명원로 대신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윤시영의 아들인 윤황(尹璜) 이후에 대한 기록이 실전되어 알 길이 없다.

그 후 후손인 윤거부(尹鉅富)가 고려 초에 보윤호장으로 나타나 있어 윤거부를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칠원윤씨가 중앙 정계에 이름은 낸 것은 윤거부의 16세손인 윤수(尹秀)이다.

그는 원종 때 장군으로, 원종의 세자 충렬왕과 함께 귀국하여 대장군에 올랐다. 그는 충렬왕조에서의 군부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 대에서 윤길손(尹吉孫)의 전서공파, 윤길보(尹吉甫)의 충의공파, 그리고 윤계유(尹繼柔)의 대장군공파가 나뉘었다. 현재는 전서공파는 후손이 없고, 충의공파에서 나뉜 5개파(충효공파, 대언공파, 칠성군파, 사윤공파, 부원군파)와 대장군공파가 있다.

윤수의 아들 윤길보는 삼중대광 첨의찬성사를 역임하였고, 귀성군에 봉해졌다.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을 지낸 윤환(尹桓)은 윤수의 손자다. 그는 충숙왕 복위 때 일어난 옥사로 원나라로 탈출했으나 충혜왕이 복위하면서 벼슬자리에 복귀한다. 무왕 때까지 다섯 왕을 섬기고 세 차례 재상을 지냈다. 고향 칠원에 큰 기근이 났을 때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했다.

정경공 윤저(尹抵)는 조선이 개국 되자 상장군에 이르렀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태종)을 도와 좌명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찬성사에 올라 칠원군에 봉해졌다. 윤석보(尹碩輔)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에 뽑혔다. 관찰사,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조인 윤시영의 묘에서 칠원윤씨 종친들이 모여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현령인 윤이(尹伊)의 아들 윤탁연(尹卓然)은 명종 때 춘추관 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관여하였다. 그는 형조와 이조판서를 거쳐 광국삼등공신으로 칠원군에 봉해졌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이외에도 한성부 판윤·좌찬성을 거쳐 숭록대부에 오른 윤사국(尹師國), 효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은 윤형은(尹衡殷), 윤치민(尹致珉) 등이 해남윤씨 인물들이다.

현대의 유명한 인물로는 작곡가 윤이상씨와 조류학자 윤무부씨가 있다. 그 외 정관계와 법조계에서는 윤병한·윤종수·윤석순·윤영 전 국회의원과 윤상현 의원(현)이 있으며, 윤창원(전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장)·윤영학(인천지청장, 변호사)·윤우정·윤병각(부장판사, 변호사)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윤병철(전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하나은행장)·윤원기(전 대한통운 사장)·윤행순(전 한전부사장, 한국남동발전 사장)·윤광순(전 한국투자신탁 사장)·윤윤수(휠라코리아 사장)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윤영연(동덕여대 부총장)·윤형원(충남대 총장)·윤병기(부산대법대 학장)·윤성아(싱가포르대학, 고려대 교수)·윤건수(포항공대 교수) 등이 있다.

현재 칠원윤씨는 파평윤씨·해남윤씨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총 1만6829가구에 5만42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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