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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독일 출신 귀화 한국인 빈도림씨

“한국은 내 운명… 자연도, 문화도, 사람도 너무나 사랑한다”
한국에 반한 파란 눈의 청년…‘동양을 꿈꾸는 집’서 제2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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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1-20 17:31:32      수정 : 2013-01-20 17:31:32
파란 눈의 스무 살 독일 청년은 유독 동양의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독일에서 이 청년의 관심을 채워줄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한국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대학이 유일했다. 그래서 1972년 대학 입학 때 동양학부를 선택했다. 동양학부에 가는 학생 대부분은 동양의 대명사인 중국학과와 일본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유럽에 덜 알려진 신비의 나라 한국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가지 않는 한국학과를 택했다. 모험이었다. 한국학에 목말라 했던 디르크 퓐들링(Dirk Fuendling·60),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 오직 한국을 알기위해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 유학을 마친 그는 독일의 대학에서 한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0년 만에 다시 ‘제2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와 독일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이후 주한 독일대사관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 결혼도 하고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귀화해 어엿한 한국인이 됐다. 이름도 빈도림으로 바꿨다.

지난 19일 전남 담양 전원주택에서 만난 그는 개량한복을 입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까지 구사하는 영락없는 ‘한국 아저씨’였다. 한국에서 30년을 산 그의 삶에 한국과 독일을 잇는 문화전도사의 기품이 엿보였다.

전남 담양에 있는 빈도림씨 집 현관에 걸려 있는 간판 동몽헌(동양을 꿈꾸는 집).
◆한국에 반한 파란 눈의 독일 청년


빈도림씨의 고향은 베를린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1972년 독일 보훔대에 입학한 그는 동양학부를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고교 시절 우연히 조선시대의 미술작품을 보고 난 후 그는 한국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었다. 당시 한국학과가 개설된 대학은 2곳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들 대학에서는 한국에 관심있는 중국과 일본학과 교수들이 부수적으로 한국학을 가르쳤다. 한국학과는 중국학과 일본학과의 파생 학문에 불과했다. 당시 유럽 국가 대부분은 독일처럼 한국에 관심이 저조했다. 유럽에서 한국학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빈씨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대학 3학년 때 아예 서울로 날아왔다. 서울대의 교환학생으로 들어와 꼬박 3년을 공부했다. 이때 빈씨는 ‘참 아름다운 나라구나. 아마 내가 이곳에서 평생을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1975년 독일에서 처음으로 보훔대에 한국학과 박사과정이 개설됐다. 빈씨는 뛸 듯이 기뻤다. 독일 한국학과에서 내리 석·박사 과정을 모두 마쳤다. 그는 1984년 보훔대학에서 ‘한국어의 의성·의태어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독일에서 한국학 박사학위 4호다.

박사학위 취득 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에게 한국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대구의 효성여대에서 독일어과 교수를 뽑는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한국에 살고 싶었던 그는 천금같은 기회로 알고 곧장 한국으로 날아왔다. 이때부터 그는 환갑이 될 때까지 30년간 한국에서 살고 있다. 고국인 독일에서보다 한국 땅을 밟고 산 기간이 더 길었다. 그의 한국식 이름 빈도림의 한자는 객빈(賓) 길도(道) 수풀림(林)이다. 그가 손수 지은 이름으로 ‘자연에 사는 나그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에서 결혼해 1남 2녀를 길렀다. 어찌 보면 여느 한국인과 똑같은 삶을 산 것이다. 2005년에는 귀화해 아예 한국인이 됐다.

빈도림씨가 전남 담양에 있는 자신의 집 서재에서 한국에 살면서 한국어로 번역한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독일 가교 역할하는 ‘문화전도사’


빈씨는 1992년 8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주한 독일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사관에서 통·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한국어에 능통하고 사교적인 성격의 그에게 한국·독일의 주요 인사들을 연결해 주고 통역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정관계 인사들을 자연스럽게 두루 알게 됐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그는 한국을 방문하는 독일 대통령과 총리 등 독일 VIP급 인사들의 통역업무를 주로 맡았다. 때론 한국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할 때도 통역요원으로 수행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가 됐다. 2000년 4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베를린 자유대학을 방문해 남북한의 화해협력 의지를 담은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문을 작성할 때 빈씨는 독일 통일의 과정과 내용을 소개하는 등 깊숙이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빈씨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한국과 독일의 숨은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독일의 대통령과 총리가 방한할 때는 사전에 한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두루 소개해 한·독 정상회담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빈씨는 “한국과 독일의 역사와 문화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빈씨는 독일대사관에 근무하면서 한국인 이영희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씨는 당시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서 번역을 하면서 빈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빈씨의 자녀 1남 2녀 모두가 부모처럼 다른 나라의 배우자를 만나면서 글로벌한 가족이 됐다. 이영희씨는 “한국의 명절 때 자녀들이 모이면 꼭 국제회의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빈씨는 한국의 고대문화에 필이 꽂혔다. 집안에는 손수 쓴 4자성어가 곳곳에 붙어 있다. 한국 가사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빈씨는 이와 관련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는 요즈음 한국 내 독일 관련 모임에서 한국과 독일 문화를 비교하는 강의를 하고 있다. 2015년 담양에서 열리는 세계대나무박람회 추진위원장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불교 경전을 독일어로 옮긴 데 이어 최근에는 원불교 교전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빈씨는 믿는 종교는 없지만 불교나 원불교를 동양학으로 보고 서구로의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빈씨는 “오천년 역사의 한국에는 유럽 어느 나라에도 없는 예의범절이 있다”며 “이런 문화자원이 마음에 들어 한국 생활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빈도림씨가 전남 담양에 있는 자신의 집 뒤편에 마련한 밀랍초 공방에서 손수 만든 밀랍초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전통 초 밀랍초 복원 구슬땀


빈씨 부부는 우연한 기회에 전남 담양의 산골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대사관 근무를 하던 1996년 화가인 한국인 친구로부터 담양의 땅을 구입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친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 좋고 산 좋은 작업실로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 옥천골을 골랐다. 하지만 사정이 어려워진 친구는 언젠가 빈씨 부부가 “전원 생활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하고 구입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빈씨 부부는 흔쾌히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빈씨 부부는 결혼할 당시 어느 시기가 되면 한적한 시골에서 살자고 약속했다. 빈씨는 유난히 전원 생활을 좋아하는 부인에게 그 약속을 하루라도 빨리 지켜주고 싶었다. 우연히 땅을 구입한 지 4년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2000년 독일대사관 통역관 업무 형태가 프리랜서로 바뀌면서 빈씨는 시골 땅을 둘러볼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이때부터 빈씨 부부는 주말을 담양에서 보냈다. 어느 날에는 작은 텃밭을 만들고 작물도 가꿔 보았다. 도시 생활에서는 느끼지 못한 자연의 순리와 이치를 배우는 듯했다. 2002년 부부는 미련없이 서울 생활을 접었다. 황토를 이용해 그림같은 하얀 집 두 채를 지었다. 그리고 현관에 동몽헌(東夢軒)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동양을 꿈꾸는 집’이라는 의미의 동몽헌은 독일에서 살던 집에 붙였던 이름이다. 자신들이 손수 지은 집에 들어온 첫날밤, 빈씨 부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빈씨 부부는 처음엔 낯선 시골 생활이 불편했다. 하지만 세상의 창인 인터넷이 연결되면서 번역작업도 가능해 불편함은 이전보다 크게 줄었다.

담양에서 전원 생활을 하던 빈씨 부부는 밀랍초를 운명처럼 만났다. 전원 생활 여섯 달 만에 자신들이 살던 보금자리가 군립묘지로 조성된다는 발표가 났다. 다른 집터를 알아보던 중 우연히 한봉업자의 집을 방문했다. 이 집 한쪽에 밀랍, 즉 한봉 벌집이 버려진 채 수북이 쌓여 있었다. 빈씨는 독일에서 취미로 배웠던 은은한 향초의 밀랍 공방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석유 찌꺼기로 만든 파라핀에 밀려 사라진 밀랍초를 다시 만난 것이다. 얼마 후 군립묘지 조성 계획은 백지화됐다. 이때부터 빈씨 부부는 밀랍초를 공부했다. 신라시대부터 사용된 밀랍초는 우리 고유의 초였다는 것도 알게 됐다. 부인 이영희씨는 “문헌을 보니 밀랍초는 주로 양반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임금의 하사품으로 이용됐다”며 “파라핀이 들어오면서 밀랍초가 사라졌다”고 했다.

빈씨 부부는 밀랍초 제조법을 복원하느라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결국 독일로 건너가 전통제조법을 배워 왔다. 지인들에게 하나 둘 나눠주던 밀랍초는 어느새 대량 판매로 이어졌다. 주로 사찰과 교회, 예식장 등이 단골 거래처가 됐다.

담양=한현묵 기자 hanshim@segye.com

● 프로필

△1953년 독일 베를린 출생 △독일보훔대학 동양학과 졸업 △서울대 교환학생 3년간 재학 △독일 보훔대학 한국학과 박사학위 취득 (논문 주제 ‘한국어의 의성·의태어에 관한 연구’ ) △대구 효성여대 독일어과 교수 △주한 독일대사관 통역관 △담양 ‘빈도림 꿀초’ 대표 △2015 세계대나무박람회 추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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