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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인터뷰] 배우 박원상을 읽는 9가지 키워드

입력 : 2012-12-02 12:46:13 수정 : 2012-12-02 12: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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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원상(42·사진)이 대중에 주목받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숭실대 독문학과 재학시절 처음 연극무대에 올랐고 1996년 '세친구'(감독 임순례)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수많은 연극과 영화에서 주·조연 가리지 않으며 연기력을 쌓았고, 올 초 340만 관객 동원이라는 이례적인 흥행기록을 낸 '부러진 화살'(감독 정지영)에서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변호사 박준 역으로 출연해 관객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문제작 '남영동 1985'(감독 정지영·11월22일 개봉)를 들고 관객들을 다시 찾았다. 극 중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을 모델로 한 인물 '김종태'로 분해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등을 다 받아낸 데다, 아무리 배우라도 주저할 수밖에 없는 성기노출까지 감행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장면 속에 그가 있었고, 칠성판 한 가운데 누워 애처로운 눈빛으로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끝내달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 보는 내내 가슴 아팠다.

개봉에 앞서 박원상을 만났다. 박원상은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에 대한 'AtoZ'부터 영화에 대한 디테일한 부분까지 빠지지 않고 모두 얘기해줬다. 주어진 1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인터뷰 일정에도 열정만은 식지 않아 보였다. "좀 더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게 하려면 인터뷰를 하나라도 더 해야 한다"며 주연배우로서 의무감도 드러냈다.

그런 와중에 박원상이란 배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의 입에서 유수처럼 흘러나오는 주옥같은 말들에 "책을 한 권 내보시는 게 어떻겠어요?"란 말이 절로 기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박원상은 "에이, 나도 다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지. 하늘 아래 새로운 게 또 어딨겠어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와의 '토크'를 이렇게 기자의 전유물로만 묻어둘 수 없다는 생각에 그의 이야기들을 '키워드' 별로 소개하려 한다. 박원상이란 배우는 이제야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그의 연기인생은 현재진행형이고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Life goes on'

◆ 키워드 1. 운명에 관하여

"1996년 숭실대 졸업하고 연극반 선배가 연출한 '운명에 관하여'란 작품에 1인7역으로 캐스팅됐어요. 이창동 감독님이 쓴 책을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 저의 영원한 스승이신 이상우 선생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극단 차이무 대표)의 눈에 띄어 고(故) 박광정 형님에게 절 추천해주셨어요. 그 후 광정이 형이 연출한 연극 '비언소'에 캐스팅됐고, 극단 차이무 단원이 됐죠. 그런 인연들로 인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참 나란 사람, 인복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운이 참 좋았어요. 영화와의 인연은 '와이키키 브라더스'(감독 임순례·2001)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임순례 감독님과는 '세친구'(1996)에 출연한 인연으로 연락이 닿았죠. 1차 오디션은 보지도 않고 '낙하산'으로 2차 오디션에 합류한 셈이 됐는데 3차까지 통과하고 황정민씨와 제가 최종 캐스팅됐어요. 그렇게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찍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영화를 계속 할 수 있게 됐고 오늘에 이르렀죠."

◆ 키워드 2. 연극은 배고프다

"몇몇 연극인 출신 배우들이 아침 TV프로그램에 나와 과거 힘들었던 얘기들을 하시는데 전 그 소리를 듣는 게 제일 싫어요. '저 선배 웃기네? 누가 등 떠밀어서 억지로 연극 했나'라며 속으로 흉도 보고 그래요.(웃음) 연극은 재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당연히 상업성이 떨어져요. 그 사실 모르고 연극 시작하는 배우들이 있을까요? 다 알면서도 연기가 하고 싶어 시작했을 거 아니에요? 저도 연극할 때 연봉이 230만원이었는데, 1년 내내 좋은 안주에 술 먹어가며 잘 살았던 것 같아요. 돈 떨어지면 벌어오면 되는 거고, 연기가 좋았기에 힘들지 않았어요. 많은 연극인들이 지금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지만, 다 꿈을 위해 연기를 시작한 사람들이란 건 잊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연극=경제적 어려움'이란 인식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제 주변에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밝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동료들이 있으니까요."

◆ 키워드 3. 정지영 감독

"참 많은 세월을 돌고 돌아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만나 뵙게 된 느낌이랄까요. 연극에서 이상우 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영화에서 '영원한 스승'을 만난 것 같아요. 감독님은 그런 사제 관계는 원하지 않으시지만, 제 마음 속엔 그렇단 얘기예요.(웃음) 감독님은 분명 권위가 있으신데, 결코 사람을 대할 때 권위적이지는 않으세요. 늘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죠. 제가 '남영동 1985'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감독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두 작품을 만난 올 한해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감독님과의 인연, 그리고 '남영동'을 통해 만난 선후배님들과의 인연도 못 잊을 거예요." 

◆ 키워드 4. 인연

"아까부터 인연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배우에게 있어 인연은 참 소중한 것 같아요. 살다보면 출연하기로 했다가 놓치는 작품도 생기고는 하는데 그것 역시 제 인연이 아니었던 거죠. 그럴 때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아~ 그 작품 내가 했어야 했는데' 우스갯소리도 해보지만 결국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기에 곧 체념해요. 영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프레임 중에 하나를 떼어다가 들여다보는 거잖아요. 그 프레임 안에는 제가 있을 수도,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인연이 소중하다는 거예요. 사람을 먼저 만나든, 책(시나리오)을 먼저 만나든 관계없어요. 책은 별론데 사람이 좋을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은 좋은데 책이 별로일 수도 있으니까요. 책에서는 허술했던 부분이 사람간의 관계를 통해 시너지효과를 내서 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는 거고요. 간혹 실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남영동'처럼 10편 중 한 편 가슴 뻑뻑해지는 작품을 만날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거기서 또 힘을 받아서 또 다른 10편을 찍을 수 있으니까요."

◆ 키워드 5. 트라우마

"사실적인 고문장면을 찍었지만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같은 건 정말 없어요. 원래 잘 까먹는 성격이거든요.(웃음) '남영동' 다 찍자마자 '12월23일'(감독 이환경)과 '진영이'(감독 이성은)란 작품에 바로 투입돼야 했어요. 두 작품을 즐겁게 촬영했더니 '남영동'에서의 물고문은 다 잊어버렸어요. 배우들은 한 신, 한 신 완성될 때마다 본능적으로 전에 찍은 장면을 지우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일종의 '포맷본능'이랄까요? '남영동' 촬영한 지 몇 개월이 지나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기자간담회를 했는데, 기자들한테 질문을 받으니 별로 기억나는 게 없더라고요. 저의 경우에는 극한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한 방어기재 같은 게 있었나 봐요. 물고문 연기를 처음할 때는 정말 당황했어요. 아마 연기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가봤을 거예요. 칠성판에 다리가 묶인 채 코로 물이 들어오는데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죠. 다들 제가 연기 중인지, 진짜인지 헷갈려 하셨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그런데요. 그게(고문) 또 적응이 되고 요령도 생기더라고요. 감독님과 시간을 정해 놓고 '컷'하기로 했는데, 그 시간이 10초 20초 점점 늘어났어요. 김근태 의원님은 수기에서 절대 적응하기 어려운 고통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래도 연기였으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 키워드 6. 대기만성형 배우

"주변 분들이 그렇게 평가해주신다면 고맙게 받아들여야죠.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론 다른 생각도 해요. 내 가치는 결코 '성공'에 있지 않으니까요. 연기는 어디까지나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그 재미가 없어지면 직종변경을 해야겠죠. 연기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조금이라도 설레고 재미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단, 연기를 10여년 해왔는데, 연기가 재미없어지는 날은 아주 한참 뒤에 왔으면 좋겠어요.(웃음)"

◆ 키워드 7. 캄보디아

"'알 포인트'(감독 공수창·2004)란 영화 때문에 캄보디아란 나라를 좋아하게 됐어요. 얼마 전 친구랑 다시 갔는데,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죠. 도로에는 저희를 앞질러 가는 차들도 있었고, 트럭들도 있었어요. 저희 차 뒤에는 소달구지 같은 차에 네 가족이 타고 아주 느린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어요. 그때 '아, 사람마다 살아가는 속도는 다 다르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속도에 너무 민감해 하며 살아가잖아요. 조금이라도 다른 차 추월하지 못할까 안달복달하면서 달리는데, 그 캄보디아인 가족은 달랐어요. 우리는 '조금 더 빨리'라는 것도 '잘 살아보자'란 의미에서 그러는 것 같은데, 둘러보면 더 잘 살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좀 더 가치 있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면 그런 가치들을 느낄 새조차 없잖아요. 요즘 사람들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아요."

◆ 키워드 8. 양복점 아들

"제 마음이 여유롭다고요? 저는 충청도 산골에서 상경해 청계천 '하꼬방' 생활부터 시작하신, 청파동에서 40년 넘게 '삼광양복점'을 운영한 부모님 밑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장사가 잘 됐을 때는 부모님이 밤새 재봉틀 돌리는 소리도 들었지만, 기성복이 대중화되면서 양복점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시기가 왔죠. 그렇게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재물에 대한 욕심요? 저라고 왜 없겠어요. 그런데 재물에 대한 욕심은 상대적인 것 같아요. 지금도 아내와 아들 둘, 행복한 가정을 이뤄 살아가는데 크게 부족한 건 없으니까요. 재물보다는 얼마 전 별세하신 고 장민호 선생처럼 70대까지 왕성하게 연기생활을 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에요. 캄보디아에서 70대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그분은 그 연세에도 세상을 온통 '호기심'으로 바라보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어요."

◆ 키워드 9. 관객들에게 한 마디

"'남영동'이 불편한 영화라고, 어려운 영화라고 극장에 가는 게 두렵다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께 '주저하지 마세요. 그냥 이런 영화예요'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늘 먹던 김치찌개에서, 오늘은 몸에 아주 좋은 음식을 먹으러 온다고 생각하시고 편한 마음으로 오세요. 영화의 의미에 혹시라도 마음을 보태주고 싶으시다면 더 좋겠고요. 영화를 보고 나면 더욱 힘을 받고 가실 거예요."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한윤종 기자 hyj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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