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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36〉강릉최씨

본관 같으나 시조 다른 3계통 있어… 강릉 등지서 문벌 형성한 명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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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8-28 21:07:43      수정 : 2012-08-28 21:07:43
강릉최씨는

강릉최씨(江陵崔氏)에는 본관을 같이하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3계통이 있다. 경주최씨 계통에서 갈라져 나온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고, 전주최씨 계통에서 갈라져 나온 대경공(大卿公)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또한 상계 계통은 알 수 없으나, 고려 충숙왕의 부마로 화성도위(華城都尉)에 봉해지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른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그중 경주최씨 계통은 고려시대의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이었던 최필달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최씨 상계보에 따르면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 최치원의 후손인 최승로(崔承老)의 증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치운(崔致雲)과 최수성(崔壽城)을 들 수 있다. 최치운은 시조 필달의 16대손으로 세종 때 명신이었으며, 형옥(刑獄)에 밝아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였다. 최수성은 최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시문·서화·음률·수리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경주계 강릉최씨는 낭장공파 양근파 비인공파 용연동파 행정파 안동파 수헌공파 문정공파 해창공파 춘천파 황주파 고성파 정선파 생원공파 신리파 경성파 태안파 제학공파 충주파 장단파 냉정파 의주파 덕원파 능주파 사간공파 등이 있다.

그 외 고려 충숙왕의 부마인 최문한을 시조로 하는 강화계(江華系)가 있다. 최문한은 삼중대광 벼슬을 지내다 말기에 강릉으로 낙향했는데, 그 자손들이 강릉과 충북 충주에 문호(門戶)를 열고, 현재는 삼척·양양·평창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최문한계에는 부사공파 통정공파 참봉공파 훈도공파 참의공파 충순위공파 진사공파(형) 판서공파 교수공파 부정공파 진사공파(호) 참판공파 등이 있다.

또 대경 최흔봉을 시조로 하는 전주계(全州系)가 있다. 그는 전주최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상계가 고증되지 않고 있다. 전주계 강릉최씨의 주요 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자점(崔自霑),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세건(崔世楗), 인조 때 진주목사를 지낸 최응천(崔應天) 등이 있다. 이들 전주계는 희경공파 대사간공파 예성공파 전서공파 등으로 나뉘어 있다. 강릉최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4만4704가구에 총 14만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최씨의 6.6%를 차지하는 숫치이다. 

강릉최씨 경주계의 연혁과 인물


시조는 고려 때 삼중대광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경흥부원군에 봉해진 충무공 최필달이다. 그의 증손인 최숭언(崔崇彦)은 고려 때 삼중대광으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세손인 최한주(崔漢柱)는 충렬왕 때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강릉최씨 경주계에서는 최필달·최숭언·최한주를 가리켜 강릉최씨가 자랑하는 삼군(三君)이라고 칭하고 있다.

고려말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역임했던 동강(東崗) 최원량(崔元亮)의 손자 최치운(최안린의 아들)은 조선 전기의 명신으로 세종 때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고려말인 1390년(공양왕2)에 태어난 그는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두루 관직을 역임하며 덕망과 식견을 인정받았다. 또한 다섯 차례나 명나라를 다녀오는 등 외교면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왕명을 받아 대명률(大明律)을 참고하여 ‘무원록’을 주석하여 억울한 옥사(獄事)가 없도록 하였다. 술을 좋아했는데, 세종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친필로 계주(戒酒) 어찰(御札)을 내리기도 했다.

최치운의 둘째 아들 최응현(崔應賢)은 단종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나 고향의 노모 봉양을 위해 지방 수령직을 자청하였다. 성종 때 모친상을 당하고 나서야 중앙 관직에 나서 예조 참의(禮曹參議),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했다.

최응현의 셋째 아들인 최세절(崔世節)은 연산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급제를 했다. 하지만 중종반정으로 발표가 보류되자 후에 상소를 올려 장원급제를 추인받게 되었다. 그후 벼슬길에 올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황해도와 경상도 관찰사·대사헌·형조·호조판서를 지냈다.

최응현의 손자로 최세효의 아들인 최수성(崔壽城)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조광조·김정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고 문장과 서예·미술·음악 등에 출중하여 ‘사절(四絶)’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혼탁한 세태를 개탄하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대천을 돌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하지만 남곤의 미움을 샀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모함을 받아 35세라는 짧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최세절의 증손자인 최기벽(崔基?)은 광해군 때 성균관에서 교수하고 있을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극력 반대했으며, 조카인 최문한으로 하여금 전횡을 일삼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목을 베라는 항소문을 올리도록 했다. 그 일로 동생인 최기백(崔基?)과 함께 금고형을 받아 원주에서 살다가 인조반정 후에 복권되었다. 그의 아들 최문오(崔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고, 둘째 최문활(崔文活)은 군수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셋째 최문발(崔文潑)은 시문에 능하여 ‘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남겼다. 또 막내 최문식(崔文湜)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숙종 때 황해도 관찰사·대사간(大司諫)·예조참판·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했다.

강릉최씨 전주계의 연혁과 인물

강릉최씨 전주계의 시조 대경공 최흔봉은 고려태조인 왕건의 딸인 옥경대주를 맞아 부마가 되었다. 고려개국공신록에 의하면 최흔봉은 개국공신 사등십사원 중의 한 사람으로 명주인관대경(溟州人官大卿)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전주(완산) 최씨였지만, 사는 고장이 강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흔봉에 대한 고증은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즉, 태조가 궁예 휘하에서 군대를 이끌고 원주와 강릉(명주)를 장악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설과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할 때 전주지역에 세거하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설, 그 자손(11세 휘능공)이 상당부원군에 훈봉되었음을 볼 때 청주지역 호족이었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따라서 강릉최씨 전주계가 전주최씨로부터 분적된 것은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나, 정확한 상계는 고증되지 않고 있다. 다만, 최흔봉의 12세손인 충숙공(忠淑公) 최입지(崔立之)가 강릉군에 봉해지고, 최안소(崔安沼), 최유련(崔有漣) 등 삼대에 걸쳐 평장사를 지내고, 모두 강릉군에 봉해진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강릉최씨로 분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입지·최안소·최유련뿐 아니라, 최안소의 동생인 최안빈(崔安頻)은 판서직을 역임한 후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지고, 셋째인 최안언(崔安彦)은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로써 강릉최씨 전주계는 명문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강릉최씨 전주계의 중시조격인 충숙공 최입지는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은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匡靖大夫門下平理上護軍)을 거쳐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조선 개국 후 수태사태상(守太師太常)으로 증직되었고, 세종 때에는 영의정에 가증(加贈)되었다.

그의 세 아들이 모두 출중하였는데, 맏아들 최안소는 충숙왕 때 경상도 존무사에 임명되었고, 충목왕 때는 통정대부 안동판관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시중 동중서평장사에 올라 강릉군에 봉해졌고, 공민왕 때에 순성보리공신(純性輔理功臣)에 책봉되었다.

최안소의 장남 최유련은 공민왕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공신으로 강릉군에 봉해졌다.

최유련의 아들 최이(崔?)는 공양왕 때 사헌집의(司憲執義)가 되었다.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있을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던 태종 이방원과 친교를 맺어 조선 개국에 기여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 우부승지(中樞院右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태조 때는 중추원부사가 되었으며, 정종 때는 좌군총제와 대사헌을 겸직하였다. 또 공조,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세종 때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명나라 태종이 죽자 진향사로 연경에 다녀온 뒤 숭록대부(종1품)이 되었다.

최수(崔洙)는 최입지의 5세손인데, 세조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성종 때 진잠현감(鎭岑縣監)에 제수되었다. 이어 박천(博川)과 서천군수(舒川郡守)를 지냈으며, 그 뒤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강릉최씨 강화계의 연혁과 인물

강릉최씨 강화계의 시조 충재 최문한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가 되어 삼중대광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역임했다. 충숙왕의 딸 선덕공주와 혼인한 그는 고려의 국운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자신의 애마가 강릉 용지에 빠졌다가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강릉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손에서는 손자 최윤(崔允)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3형제 중 둘째 최자호(崔自湖)는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대사간과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막내 최자점(崔自霑)은 성종 때 등과하여 감찰과 정언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管校理)를 지내고 평강·고성·금성 등지의 군수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최자점의 손자 최연(崔演)은 홍문관 제학과 수찬·장령·필선 등을 거쳐 충청도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폈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를 지낸 후 중종의 ‘애책문(哀冊文)’과 ‘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그의 조카 최운우(崔雲遇)는 명종 때 횡성현감을 역임했고, 최응천(崔鷹天)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목사를 역임했다.

강릉최씨 근현대 인물

강릉최씨는 지금도 강릉 등지에서 주요 문벌을 형성하고 있는 명문가 중의 하나이다. 근현대에도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는데, 그중 최규하 전 대통령이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외무부 통상국장을 시작으로 외무부장관을 지내고 국무총리·대통령 서리가 되었다가, 대한민국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 10·26, 1980년 5·18 등 역사적 격랑을 겪으며, 원만한 성격으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지만, 역사적 반동(전두환 집권)을 물리칠만한 확고한 리더십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외 강릉최씨의 근현대 인물 중에서는 최종영 전 대법원장과 최각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최돈웅 전 의원, 최종찬 전 건교부 장관, 최문순 강원도지사 등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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