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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16> 이씨(李氏)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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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10-04 22:07:00 수정 : 2011-10-04 22: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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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서 가장 많은 성씨… 李耳라 불린 노자서 기원 우리나라 이씨(李氏) 현황

지난 15회까지 김씨(金氏) 본관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 연재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에서는 진흥왕,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고구려에서는 장수왕 때부터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 인구가 가장 많은 김씨는 신라계와 가야계로 나뉘는데, 사성 김해김씨와 같은 외래 성씨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또한 같은 계통의 김씨도 수많은 본관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본관들에 따라 유래와 전통이 각기 다름을 파악하였다.

그러한 것은 이씨(李氏)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씨는 김씨보다 인구는 적지만, 기원이 훨씬 더 다양하다. 이씨 전체 인구로 보면 경주계 이씨와 전주계 이씨로 나뉘지만, 그 외에도 전혀 다른 계통의 본관들이 존재한다. 즉, 이씨는 신라 6부족 중의 하나인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하는 경주(慶州)이씨 계통과 중국에서 건너온 이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전주(全州)이씨 계통 외에 또 다른 중국 계통(연안·延安, 고성·固城, 상산·商山, 안성·安城, 태안·泰安, 평산·平山이씨, 원주·原州이씨 구파 등), 만주계통(청해·靑海이씨), 월남계통(정선·旌善, 화산·花山이씨) 등이 있다. 심지어 김알지의 후손으로 경주김씨에서 분적한 광산(光山)이씨, 가야 수로왕계통의 김해허씨(金海許氏)로부터 갈라져 나온 인천(仁川)이씨도 있다.

이렇듯 김씨가 신라계와 가야계, 그리고 사성김해김씨처럼 계통이 단순한 반면에 이씨는 유래와 기원이 대단히 다양하다. 그래서 같은 이씨를 쓰더라도 그 조상은 전혀 다른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음은 같지만 한자는 다른 이씨(異氏 또는 伊氏)도 존재한다.

이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 약 450본 또는 550본에 가까운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시조가 밝혀진 것은 120본이며, 현존하는 이씨 본관은 100본 정도로 파악된다. 주요한 본관으로는 앞에서 거론한 전주이씨, 경주이씨 외에도 연안이씨, 전의(全義)이씨, 광주(廣州)이씨, 한산(韓山)이씨, 덕수(德水)이씨, 용인(龍仁)이씨, 여주(驪州)이씨, 성주(星州)이씨 등이다. 이씨는 2000년에 실시된 주택인구 총 조사에서 김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데, 전체 인구는 약 679만5000명으로 전 국민의 14.8%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전주이씨가 238만명, 경주이씨가 122만명, 성주이씨가 15만4000명, 광주이씨가 14만2000명, 연안이씨가 12만7000명, 한산이씨가 12만명, 전의이씨가 11만2000명, 함평이씨가 10만3000명 등이다. 

노자.
이씨의 기원 - 중국


김씨가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씨라면, 이씨는 전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씨이다. 중국의 고사성어에서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뜻은 일반 사람 중에서 셋은 장(張)씨고 넷은 이(李)씨라는 뜻이다. 원래 중국 성씨 중에서 이씨가 가장 많고, 두 번째는 왕(王)씨, 세 번째는 장씨이다. 그런데 고사성어에서 왕삼이사(王三李四)가 아니라 장삼이사라고 한 것은 왕(임금 )이 셋이라는 것이 불경 또는 역모의 의미가 있어 왕씨 대신 장씨를 거론한 것이라고 한다. 어찌되었든, 장삼이사의 고사성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씨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를 자랑한다. 중국인과 화교, 기타 우리나라의 성씨까지 합하면 1억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씨의 기원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자두나무, 그리고 노자(老子)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씨는 오얏리(李)를 쓰는데, 그것은 노자가 오얏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만들어진 성씨라는 것이다. 즉,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현묘내편(玄妙內篇)에는 “노자의 어머니가 노자를 81년 동안 임신하였다가 자두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왼쪽 겨드랑이를 갈라서 노자를 낳았다”고 하고, 또 중국 허난(河南)성의 민간전설에서는 81년 동안 임신해서 낳은 노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어서 노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어쨌든 노자는 태어날 때부터 귀가 커서 이이(李耳)라고 불렸는데, 그로 인해 이(李)씨를 득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설이 전해오는데, 관직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즉, 요(堯)임금 때 고요가 대리(大理)라는 관직을 지냈는데, 자손들도 대대로 대리라는 관직을 역임해서 성씨를 이(理)씨로 하였다. 그런데 이(理)씨를 이(李)씨로 바꾼 사람은 이이정(李利貞)이라는 설과 노자라는 설이 있다. 이이정이라는 설에 의하면, 은나라 말기 이이정의 어머니가 왕의 폭정을 피해 달아나다 자두로 허기를 채웠는데, 은나라가 망하고 다시 돌아와 고현(苦縣)에 정착한 뒤 자두나무의 은혜를 기억하여 성씨의 한자를 바꿨다는 것이다. 반면 노자라는 설의 주장은 노자 이전에는 이씨가 보이지 않는데, 노자 이후에는 이씨가 보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이정의 후예인데, 조상들이 대대로 이관(理官)을 지냈기 때문에 이씨를 득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대대로 대리라는 관직을 써서 이(理)씨 성을 얻게 되었는데, 훗날 이징(理懲 이이정의 아버지)이 난을 피하다가 자두를 먹어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그 후 자두를 재배하면서 신성시하게 되되어 이(李)씨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백(李白)의 집에도 도리원(桃李園)이 있었고, 이씨가 세운 당나라 황궁 뜰에도 자두나무가 많았다는 것에서 유래된 이야기다.

그 외 소수민족이 성씨를 바꾸면서 이씨를 사용하게 된 경우가 있다. 즉, 제갈량이 서남지방의 소수민족을 평정한 후 그들에게 조씨(趙), 장씨(張), 양(楊), 이(李) 씨 등을 하사했다. 또한 선비족 중에서 한족이 된 후 이씨로 성을 바꾼 경우가 있는데, 이들이 낙양(洛陽)이씨이다. 그 외에도 북위시대 고호(高護)씨가 효문제를 따라 중원에 들어온 후 이씨 성을 쓰게 되었다.

대체로 앞에서 말한 설을 종합하면, 이(李)의 득성 시조는 이징의 아들인 이이정으로 여겨지며, 중시조는 그의 후손인 노자, 이이(이이정의 11세 또는 13세, 17세손)로 여겨진다. 노자 이후 이씨는 당나라 황실을 비롯하여 12개 정권과 60여 제왕을 배출한 성씨가 되었다. 

이알평 전설이 갓든 표암.
이씨의 기원 - 한국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이씨는 계통이 대단히 다양하다. 그중 대표적인 두 계통은 경주이씨와 전주이씨라고 할 수 있다. 인구는 전주이씨가 본관별 성씨 인구 중 3위(261만명, 김해김씨와 밀양박씨 다음)로 많지만, 다른 본관으로 분적한 성씨까지 합하면 경주 이씨도 그에못지않다. 실제 이씨에는 다양한 계통이 존재하지만,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본관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이씨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본관은 경주이씨이다. 경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6부족의 하나인 급량부(양산) 촌장인 표암공(瓢岩公) 이알평(李閼平)이다. 그는 기원전 117년에 태어나서 6부 촌장과 협의하여 57년에 박혁거세를 왕위에 추대한 인물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를 비롯하여 소벌도리(蘇伐都利)·구례마(俱禮馬)·지백호(智伯虎)·지타(祉他)·호진(虎珍) 등 6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각각 사로육촌(斯盧六村)의 촌장이 될 때, 그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경주 남산에서 6명의 촌장이 솟아났다는 설도 있다. 알천양산촌은 서기 32년(유리왕 9) 6촌을 6부로 이름을 고칠 때 급량부(及梁部)가 되었다. 박혁거세를 왕위에 추대한 후 그는 신라개국좌명공신이 녹훈되고 각간, 아찬을 역임하였으며 군무를 주관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알천양산촌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에 급량부로 개칭되었으며, 유리왕 때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진흥왕 이전에는 6부의 이름만 거론될 뿐, 이씨 등의 성씨가 쓰이고 있지 않다. 심지어 신라 왕족의 성씨도 진흥왕 대에 이르러 거론되는 만큼,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긴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중시조인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알평의 36세손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
전주이씨는 신라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2세손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사적기록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안사는 원래 전주에서 살았는데, 그곳 지주와 사이가 나빠 삼척으로 옮겨갔다가 간도지방으로 가서 원나라의 다루가치(지방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와 아들 도조(度祖) 춘(椿)은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 벼슬을 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를 지냈다. 그 후 이자춘은 공민왕의 북강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 함락에 공을 세우고, 그 지방의 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다.

현재 전주이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의 상계에서 분파된 파와 이안사 이후에서 태조 이성계 이전에 갈라진 파, 그리고 이성계 이후 갈라진 왕자, 대군파로 구분된다.

그 외 우리나라 이씨에는 중국 계통의 연안이씨(延安, 시조 당나라 장군 이무·李武), 고성이씨(固城, 시조는 한나라 문제의 24대손인 황·璜) 등이 있으며, 만주계통으로는 청해이씨(靑海, 시조는 이지란으로 여진명은 퉁두란이었고 여진의 금패천호였다)가 있다.

또, 그 외 외래 성씨로는 정선(旌善), 화산(花山)이씨가 있는데, 이들은 안남국(安南, 지금의 베트남) 계통이다. 정선이씨의 시조 이양혼(리즈엉꼰)은 베트남 리 왕조 인종 이건덕(仁宗 李乾德)의 셋째 아들이다. 제5대 신종 이양환(神宗 李陽煥)과 왕위를 다투다가 북송으로 망명하였고, 다시 고려로 들어와 경주에 정착했다고 한다. 화산이씨의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안남국왕 이천조(李天祚)의 둘째 아들이며, 이용한(李龍翰)의 동생이다. 이용상은 고려 고종 때 변란을 피해 황해도 옹진(甕津)의 속진인 화산(花山)에 정착하였다.

이 외에 경주김씨와 김해허씨로부터 갈라져 나간 광산이씨와 인천이씨가 있다. 광산이씨는 김씨(金氏)의 후예로, 궁예의 6세손인 이종금(李宗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강감찬 장군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거란의 3차 침공 때도 강화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본래의 이름인 김일형 대신 이종금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다.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그의 6대조인 허기(許奇)가 당나라에 갔다가 안록산의 난을 피난하는 현종을 호종한 공으로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원래 성인 ‘허’자 앞에 ‘이’자를 붙여 왔는데, 그의 대에 와서 이씨로만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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