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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3> 성씨의 변천과정

태조 왕건 통치수단으로 ‘사성정책’ 수많은 성씨 생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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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3-01 21:02:29      수정 : 2011-03-01 21:02:29
#고려시대 성씨의 변화 ―성씨와 문벌의 형성

한국의 성씨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다. 태조 왕건이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사성(賜姓)정책을 시행하면서 수많은 성씨가 생겨났다. 그후 문종 때에 이르러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이 반포되면서 너도나도 성씨를 갖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또한 주요 고관대작의 자제에게 벼슬을 주는 음서(蔭敍)제까지 성행함으로써 문벌이 형성되게 되었다.

특히 성씨는 고려 중 후기에 들어오면서 외세의 침략으로 그 가치가 높아졌다. 몽고의 침략으로 자존감이 약화된 사회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 일환으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삼국유사의 단군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뿌리가 흔들린 성씨나 문벌들은 자신의 뿌리 찾기에 나섰으며, 그를 통해 문벌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가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조상을 ○○○왕, ○○○학사 등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나라의 혼란기를 틈타 멸문된 성씨에 자신을 이어붙이는 가탁(假託) 행위를 하게 되었다.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 중앙도서관 내 족보자료실로 2005년 8월 개관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지금도 주요 성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대개 중시조로 고려조에서 ○○ 벼슬을 한 누구누구라고 하면서도, 고시조에 대해선 신라시대 ○○○왕, 중국에서 건너온 ○○○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면서 자기 문벌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지거나, 멸문된 성씨에 가탁(假託)을 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성씨제도와 문벌이 형성된 시기는 고려 중 후기로 볼 수 있으며, 이미 이때부터 자신의 조상을 바꾸는 환부역조(換父易祖)나, 남의 조상에 자신을 이어붙이는 가탁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 의종 6년(1152년)에 작성된 김의원의 묘지를 보면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라고 했다. 즉, 고려 초기에는 가계를 기록한 보첩이 없었다. 따라서 향리에서 힘을 갖게 된 집안이나 신흥 문벌들은 자신의 조상을 얼마든지 바꾸고 이어붙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성리학의 전래로 사대적 성향이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조상을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성행했다.

◇지난해 5월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윤택영 재실에서 열린 ‘남산골 종가 이야기’에서 관람객들이 전주최씨 판윤공파 과천종가의 다양한 유물을 살펴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조선 전기 성씨의 변화 ―족보의 탄생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면서 우리나라의 성씨는 또 한 번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즉, 조선 건국의 중심세력이 고려 문벌귀족 출신이 아니라 향리에서 일어난 신흥사대부들이 주축을 이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 문벌에 비해 초라할 수밖에 없었던 신흥사대부들 사이에서 가계 위상을 높이기 위해 중국에서 전래한 가계로 둔갑시키는 예가 많았다. 특히 왕족, 또는 삼한 공신과 연결시키지 못한 가계를 중심으로 중국 전래를 내세웠다. 그러다 보니 현재 전해져 오는 일부 가문의 족보에서도 시조와 이를 계승하는 가계도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고려사 등 역사서에 나타난 벼슬이나 실제 행적에 비해 과대 포장된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최초의 족보는 1476년에 제작된 ‘안동권씨 성화보’이다. 그 이전엔 주로 한 인물과 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가전, 족도, 세계도가 전부였다. 이렇게 족보가 탄생된 것은 태종 때 서얼차대법이 시행되어 가계를 제대로 기록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또 세종 때 들어와서 각 지방의 인문지리를 종합하려는 움직임(세종실록지리지 발간)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리하여 15세기에 ‘안동권씨보’와 16세기에 ‘문화류씨가정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족보의 탄생은 중국에 비해 한 참 뒤처진 것이다. 중국에서는 육조시대(六朝時代)부터 시작되었는데, 주로 제왕연표(왕실계통)를 기술한 것이며, 개인들이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나라 때 관직 등용을 위한 현량과 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선대의 업적을 기록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북송의 소순, 소식, 소철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가 족보편찬의 표본이 되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는 명나라의 ‘가정각본(嘉靖刻本)’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의종(1146∼1170) 때 왕실계통을 기록한 김관의의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으나, 민간의 족보는 없었다. ‘안동권씨 성화보’ 서문을 쓴 서거정이 “우리나라에는 종법(從法)과 보첩(譜牒)이 없고, 거가대족(巨家大族)은 있으나 가승(家乘)이 없다”고 한 기록을 보아 족보보다는 문벌에 따라 그 집안의 가계를 기록한 족도나 세계도 등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15세기, 16세기 이전에는 족보다운 족보는 없었고 가계의 족도나 세계도만이 존재했었다. 그러다 보니 이후에 만들어진 족보에는 15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족도나 세계도를 그대로 수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선산김씨의 족보만 하더라도 김종직이 세조 4년(1458)에 시작해서 성종 7년에 걸쳐 자신의 시조와 직계 조상, 그리고 각 조상의 내외세계를 상술한 ‘선공보도’를 완성했는데, 이 내용을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내려오는 각 가문의 족보에서도 15세기 이전의 가계도는 그 실체에 대해 신빙성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북한의 화보 ‘조선’ 2005년 3월호에 소개된 고려왕건 화상과 왕씨 족보.
#조선 후기 성씨의 변화 ―족보를 둘러싼 갈등과 위작


이러한 족보 편찬의 분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기를 거치며 더욱 확대되었다. 임란 전까지 발행된 족보는 안동권, 문화류, 순흥안, 강릉김, 동래정 등 10개 성관 미만이며, 그 외 가첩 초보 형태로 출간된 것까지 합쳐도 대체로 30개 성관 안팎이다. 하지만 임란과 호란이 끝나고 17세기 18세기에 들어와 족보는 크게 늘어났다. 16세기 이전의 족보 형식을 띤 진성이씨, 의성김씨, 창녕성씨, 남양홍씨 등의 족보도 17세기에 들어와서 편찬된 것이다.

특히 임란과 호란 등으로 신분질서가 해이해지면서 뿌리 찾기 노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그에 따라 족보편찬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는 몽고침략으로 고려의 신분질서가 해이해졌을 때, 민족의식과 문벌의식이 강화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또 이 시기에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져야했기 때문에 너도나도 양반과 결탁하여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려 했다. 이와 함께 족보의 편찬체계도 부계친손 위주로 간행되고 적서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그러다 보니 족보 발간을 둘러싼 갈등과 소란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특히 이 시기에 발간된 족보들은 가문의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시조 또는 선조가 신라 내지 고려의 왕실, 부마, 공신이거나 고관대작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선조를 유명가문에 이어붙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모화사상에 따라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신분질서가 해이된 틈을 타 신흥세력들은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조상을 조작하고 기존의 명문들은 가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선조를 위조했다.

이렇게 족보를 위조하는 경우로 가첩, 가보, 호구, 분재기 입양문서 등을 위조하는 것은 물론 가짜 지석을 새로 발굴하거나 명문족보에서 혈통이 끊어진 계보에 이어붙이는 행위, 그리고 형제를 늘려 끼우는 식의 조작이 많이 행해졌다. 이러한 개별적인 조작 외에도 ▲가계 전체가 새로 본관을 만들어 기존의 명문귀족과 연접하는 경우도 있었고 ▲명조가 없는 파계들은 아예 명문일족과 합보를 했으며 ▲동성이본들이 족보를 합치는(합보) 경우도 많았고 ▲부를 축적한 비양반이 궁벽한 양반을 찾아가 족보편찬 경비를 부담하면서 합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동권씨 족보
#일제시대 성씨 변화 ―민적법 시행


조선 후기 성씨의 변화에서 특징적인 것은 새로 성씨를 만들기보다는 족보를 만드는 것에 초점이 두어졌다는 것이다. 즉, 신라 말 고려 초나 고려 말 조선 초의 사회적 혼란기에는 신흥세력에 의해 새롭게 성씨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족보가 만들어진 조선 후기에는 성씨를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명문귀족의 족보에 이어붙이거나 합보를 하는 경우가 주종을 이뤘다.

이런 분위기는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조치가 나와도 비슷했다. 일제는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를 허물기 위해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을 1909년에 시행했다. 즉 천민이든 양반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성씨를 갖고 호적을 신고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는 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민적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일본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 발생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했고, 그래서 생겨난 성씨가 10만이 넘는다. 성씨를 지을 때 큰 의미를 두고 짓지 않았다. 산마을에서 태어났으면 山村, 밭 가운데 집이 있으면 田中,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40%가 넘는 무성 층에게 성을 갖도록 했더니 대부분이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한 것이다. 결국 한 성씨(김씨)가 5000만 인구의 5분의 1이 되는 기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이것은 40%나 되던 무성 층이 새로 성씨를 만들기보다는 권문세도가나 거대씨족의 성씨를 빌려서 신고함으로써 생겨난 현상이다. 또한 명문세도가의 노비들이 새 성씨를 신고하면서 모시던 양반의 성을 그대로 따서 지은 경우도 있었고, 거꾸로 해방된 노비를 회유하여 성씨를 부여한 뒤 노역을 시켰던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부리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자신의 성씨를 부여해 주었던 양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제시대에 신고된 성씨가 세종 때 파악된 성씨보다 많지 않은 현상까지 빚어졌다. 이렇듯 일제의 신분질서 해방조치로서의 성씨 부여는 양반질서를 허물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거대씨족을 더욱 더 거대하게 만들어주는 역효과만 불러왔다.

#다문화 시대 성씨의 변화 ―귀화인의 성씨 만들기

이렇게 완고하던 우리나라의 성씨와 족보체계도 2000년대 들어와서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1990년대 호주제법이 폐지되고 다문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성씨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국적을 취득한 귀화인들이 새로운 성씨를 만드는가 하면, 일가친척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새로 성씨를 만들어 신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만들어진 희귀 성씨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상황이다. 강전씨, 망절씨, 즙씨, 개씨, 누씨, 군씨, 비씨, 삼씨, 어금씨, 저씨 등도 생겨났고, 본관에서도 독일 이씨(이참), 부산 하씨(로버트 할리), 구리 신씨(신의손), 몽골 김씨 등, 다양한 성씨와 본관이 생겨나고 있다.

앞으로 이 같은 현상은 더 많아질 것으로 판단되며, 그에 따라 기존의 성씨와 족보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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