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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문학평론)] 연인들의 공동체 -황정은, ‘百의 그림자’

입력 : 2011-01-02 21:37:37 수정 : 2011-01-02 21: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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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연인들의 공동체는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에 궁극의 목적이 있다.

-모리스 블랑쇼


0. 그림자


그림자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림자가 일어났다니? 황정은의 소설에선 도대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가령 전작 ‘열두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에서는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는가 하면(‘모자’), 곡도라는 수상한 생물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곡도와 살고 있다’), 죽은 사람이 주인공의 등에 달려 있는 문에서 나오기도 한다(‘문’). 이런 기이한 일들을 우리는 흔히 환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을 환상이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편하게 규정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유형상 이러한 사건들은 환상의 영역에 속한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을 환상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각각의 사건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잃는다는 점이다. 환상의 사전적 정의는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다. 그러나 황정은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사건들은 모두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기담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특히 ‘百의 그림자’에서 나타나는 ‘그림자의 일어남’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현실로, 언제든지 일어날 법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누구나 그림자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림자가 일어나는가. 각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처음엔 그림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덤불을 벌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저쪽도 길인가 싶고 뒷모습이 낯익기도 해서 따라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숲은 깊어지는데 자꾸 들어갈수록 뒷모습에 이끌려서 자꾸자꾸 들어갔다.

[……]

은교 씨처럼?

네.

나처럼, 하고 대답한 순간 어, 싶었다. 발을 내려다보니 부드러운 흙에 박힌 솔방울이며 갈참나무 잎을 밟고 선 내 발의 윤곽이 어색했다. 오른쪽 새끼발가락 쪽에서 가늘고 가늘게 늘어난 그림자가 덤불을 넘어 어디론가 뻗어 있었다.

그림자로구나.

그때 알았다.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0, pp.9-10. 이하 본 작품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만 표기)


은교 씨는 숲에서 누군가에게 이끌린다. 후에 무재 씨와의 대화를 통해 그 누군가가 자신의 그림자였음을 깨닫는다. 무재 씨는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p.10)라며 은교 씨에게 주의를 준다. 여 씨 아저씨 또한 “따라가지 말았어야지.”, “그게 무서운 거지, 그림자가 당기는 대로 맥없이 따라가다 보면 왠지 홀가분하고, 맹하니 좋거든, 좋아서 자꾸 따라가다가 당하는 거야, 사람이 자꾸 맥을 놓고 있다 보면 맹추가 되니까, 가장 맹추일 때를 노려 덮치는 거야,”(pp.31-32)라고 이야기 한다. 은교 씨가 그림자에게 이끌리는 모습은 마치 ‘오뒷세이아’의 세이렌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세이렌의 목소리를 따라간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무재 씨의 목소리에서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은교 씨가 그림자에 대해 깨닫게 될 때의 묘사이다. “발을 내려다보니 부드러운 흙에 박힌 솔방울이며 갈참나무 잎을 밟고 선 내 발의 윤곽이 어색했다.”라는 표현을 통해 볼 때, 은교 씨의 시선이 사물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야기의 전체에서, 은교 씨가 사물에 대해 묘사할 때에는 이처럼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모두 열거한다. 하나의 종류로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교 씨가 존재를 대하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흙에 박힌 솔방울이며 갈참나무 잎”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상식의 수준에서 보자면 이미 나무에게서조차 그 쓸모를 다한 것들이다. 은교 씨의 시선은 그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준다.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것들은 의미를 갖는 것들이 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딛고 일어 서 있다.


①나도 살면서 이런저런 사정을 겪었는데 그림자 정도, 솟구치지 않을 수가 있나. 우리 집 현관에서 말이야, 구두를 신고 있는데, 반짝 일어서더라고. [……] 그보다 나는 식구들의 반응이 이상했어. 그림자가 멀리 가지도 않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데, 이걸 보지 못하는 건지 못 본 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거야. [……] 보시기며 새로 밥을 담은 사발 같은 것을 건네주거나 할 때도 내 그림자를 피해서 팔을 뻗고, 말을 나눌 때도 그림자의 좌우에서 서로를 보려고 머리를 좀 기울인 상태로 말하거나 하면서 말이지. (pp.44-45)


②장례식이 끝난 후 어머니는 한동안 병원에 머물러 있다가 그림자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그림자는 어머니 등에 달라붙은 채로 이미 상당히 자라서 뭐라 말할 수 없이 짙은 빛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달라붙어 있다 보니 그림자가 어머니에게 붙은 건지 어머니가 그림자에게 붙은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p.68)


①은 여 씨 아저씨의, ②는 유곤 씨 어머니의 그림자가 일어났을 때의 이야기이다. ‘百의 그림자’가 은교 씨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는 데에 반해, 위의 인용들은 모두 각 인물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여 씨 아저씨의 경우 그림자가 왜 일어났는지 직접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별로 없다. 다만 자신의 그림자가 일어난 이야기 이전에 여 씨 아저씨는 자신이 아는 ‘기러기 아버지’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기러기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소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황상 여 씨 아저씨 역시 가족을 위해 밖에서 헌신하고 있지만 집안에서는 소외된 아버지의 위치에 서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유곤 씨 어머니의 이야기는, 유곤 씨의 아버지가 공사장에서 사망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당시 유곤 씨는 짐을 정리하다 립스틱 상자를 버렸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림자에 사로잡히고 나서는 “가져와”라는 말만 계속 반복한다. 이처럼 누군가 그림자가 일어났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위기상황, 즉 비상사태에 처하게 될 때로 볼 수 있다. 그림자는 그에 대한 신호로서 나타난다.


①아버지, 아버지, 다 누구 먹이려고?

서너 번은 이렇게 물으며 불편한 심정을 슬쩍 드러낸 적도 있었으나 아버지는 대답도 없이 듣고는 그만이었다.

나는 이 아버지 손에서 컸다.

도시락은 성실하게 챙겨 주되 반찬은 단무지, 라는 식으로 무심하다면 무심하고 본래가 무뚝뚝하다면 무뚝뚝하다고 할 수 있는 양육이었다. 별다른 대화도 없는 부녀간이었다. [……] 워낙 어렸을 때 집을 나갔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p.81)


②나는 열일곱 살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따돌림이 있었다. 아이들 일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일들을 더러 겪었다. 괴롭히는 처지에서도 괴롭히는 것이 지루해지고 귀찮아지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길에서 동급생과 마주쳤다. 길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괴롭히는 무리 안에서도 괴롭힘이 유난했던 아이라서 나는 틀림없이 시비를 걸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긴장한 채로 고개를 들고 걸어갔는데 막상 그쪽에선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며 나도 지나갔으나 이튿날 무리 속에 섞여서 열심히 괴롭혀 대는 그녀를 보면서 뭔가가 맥없이 무너졌다. (pp.82-83)


위에 인용한 두 장면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은교 씨의 불행에 관한 두 개의 삽화이다. ①은 홀아버지에 의해 양육된 상황에 관한 이야기, ②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이야기이다. 앞서 불행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은교 씨는 이와 같은 에피소드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 불행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는다. 어머니에 대해선 애초에 기억이 거의 없고, 학교에서의 괴롭힘은 무리 속에서만 강해지는 아이에 대해 “뭔가가 맥없이” 무너지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은교 씨의 개인적인 불행은 그림자의 일어남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무재 씨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불행에 의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불행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개인적인 사건이 아닌, 자신들이 속한 세계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림=화가 양순열
1. 사물들


은교 씨의 시선은 어느 것 하나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밟고 있는 “솔방울이며 갈참나무 잎”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물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준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의 전자상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는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 무재 씨와 나는 그 건물 속에서 만났다. (p.29)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은교 씨의 세심한 눈길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가동과 나동과 [……]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이라는 표현을 “가동에서 마동까지”라고 바꾸어놓아도, 우리가 그곳을 떠올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왜 하나하나 건물의 동 이름을 열거하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기인할 것이다. 하나하나 소중하게 배려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이를 통해 사물들은 각자 ‘단독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각 사물이 고유하게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단일성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일성의 논리는 ‘포함인가 배제인가’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수반한다. 단일성의 논리에 의해 다수가 된 쪽은 권력을 얻게 되고, 양자택일의 논리는 폭력이 된다.

은교 씨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 괴롭힘을 당했는데, 어느 날 그중 자신을 가장 심하게 괴롭히던 아이를 만난다. 그러나 그 아이는 혼자 있을 때는 은교 씨를 괴롭히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간다. 은교 씨는 그 모습에서 실망하는데, 그 이유는 다수에서 발생하는 권력과 폭력의 실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수의 편에 섰을 때만 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형성되는 효과라는 점을 입증한다. 이와 같은 논리에 의해 발생하는 힘은 근본적으로 약자의 힘이다. 약자들은 집단에 속해 있을 때에만 강하고, 홀로 떨어져 나오면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들은 단독성을 포기하고 하나의 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단체에 스스로 편입한다. 반면에 스스로 강한 사람은 단일성의 논리에 속박되지 않고, 단독성을 스스로 보존하고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p.38)


무재 씨 역시 단독성을 중요시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위에 인용한 “가마”의 예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물들은 모두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이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부르는 것은 그 특성들을 모두 배제하고 하나의 속성만을 추출하는 행위이다. 이는 당하는 자에겐 폭력으로 여겨진다. 각각의 사물은 고유한 성질을 지키려는 노력conatus을 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에 관한 테제는 ‘에티카’ 3부 정리 6에 나타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사물은 자신의 존재 역량에 따라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알렉상드르 마트롱,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김문수·김은주 역, 그린비, 2008) 강영계의 번역은 “각각의 사물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서광사, 2007, p.162)라고 되어 있다.> 무재 씨는 “가마”를 여러 번 반복하여 “이상해”진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사물이 자신의 고유성, 즉 단독성을 지키기 위해 언어와 공명하여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전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도심 영화관 앞에 내려서 백여 미터 떨어진 전자상가를 바라보며 걷다 보면 마른 도마뱀, 자명종, 합성피혁으로 만든 혁대, 고무 제품, 건전지, 구두, 모자를 늘어놓고 파는 좌판들을 지나서 가동의 북쪽 모서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 그런 가게들 틈으로 난 골목, 이라기보다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 정도로 보이는 어둡고 좁다란 통로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간판도 탁자도 없이 점심 배달 메뉴로 백반 한 가지를 만들어서 파는 허름한 식당이 있고, 그 맞은편에 오무사가 있었다.(pp.100-102)


사물들은 저마다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저마다의 시간을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다. 사물들의 관계를 살필 때 우리는 고유한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오무사로 찾아가는 길에 대한 은교 씨의 묘사는, 시간을 간직한 사물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은교 씨는 오무사로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수없이 많은 사물들에 대해 꼼꼼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마치 벤야민이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묘사한 푹스처럼, 일상의 세속적인 것들을 모으는 수집가의 태도와 닮아있다. 은교 씨는 자신의 눈으로 저마다의 시간을 체현한 사물들을 수집하고 기록한다. 은교 씨는 자신이 기록한 사물들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사물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한다는 것은, 그것들의 존재론적 서열을 매기거나 포함-배제의 원리를 적용한다는 이야기이다. 위계와 질서를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은교 씨의 시선은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 있다. 그녀의 시선은 사물들 그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려는 노력을 한다. 이와 같은 노력은 사물들이 저마다의 단독성-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축제가 벌어지면 나동 북쪽 외벽과 정면 진입로엔 장막이 걸렸고, 그 뒤쪽엔 아무것도 신경 쓸 것이 없다는 듯 고성과 방가가 이어졌다. 장막 저편이 시끌벅적해질수록 나동은 없는 듯 어두워졌고 적막해졌다. 나동의 남쪽 외벽과 엘리베이터 곁엔 사십 년 된 나동이 아직 장사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십 년은 더 장사할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현수막과 알림 쪽지가, 어째선지 몹시 더럽혀진 채로 붙어 있었다. (p.128)


전자상가는 재개발되기에 이른다. 먼저 “가동”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공원이 생겼다. 모든 상가가 차례차례 개발될 예정이다. 그러나 “나동”은 협상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재개발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래된 건물이 지닌 시간의 가치 같은 건 안중에 없다. 오히려 흉물스럽게 여기며 감추려고 애를 쓸 뿐이다. 그리고 그 옆, 새로 생긴 공원에선 “고성과 방가가” 들려온다. 이는 은교 씨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무례하게 대하는 행위이다. 무례함은 단순히 “고성과 방가”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는 더 울 수가 없어서 아버지 곁에 그냥 서 있었고요. 돌아가신 지가 오래라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pp.114-115)


전자상가의 사물들은 시간을 그대로 축적하여 몸으로 체현하였듯이, 그 축적물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도 함께 쌓여 있다. 각자 단독성을 지닌 사물들이 모인 거대한 다양체를 일컬어 단순하
게 “슬럼”이라는 말로 획일화하고 규정짓는 일은 폭력이다. 폭력은 존재를 획일화하는 동시에, 포함하거나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대상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당하는 쪽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어떠한 배려도 찾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그림자가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답할 수 있다. 그림자는 존재에게 위기 상황이 찾아올 때 일어나려 한다. 그러한 위기는 상대에 대한 배려의 부재에서 발생할 수도 있고, 생존과 관련된 직접적인 문제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범박하게 표현하자면 억압받는 사람에게 그림자가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우리의 곁에 늘 도사리고 있는 삶의 어두움이다. 그림자에게는 입이 있다. 그 입이 산 사람의 입을 잡아먹으려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그림자가 일어나서 우리를 덮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단독성-고유성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의 단독성을 잃은 존재는 어딘가로 휩쓸려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게 될 것이다. 유곤 씨의 어머니가 그림자에 사로잡혀 같은 행동을 강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단독성을 잃은 사람의 한 모습이다.




                                                          그림=화가 양순열
2. 연인들과 노래


거대한 힘이 우리의 삶을 집어삼키려 한다. 벤야민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Ausnahmezustand, 예외상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역, 길 2008, pp.336-337)라고 이야기한다. ‘百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억압받는자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의 그림자가 모두 ‘일어났다’는 점이, 그들이 모두 억압받고 있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은 ‘비상사태=예외상태’이다. 예외상태를 누가 만드는가?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의 첫머리에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자이다.”(칼슈미트, ‘정치신학’, 김항역, 그린비 2010, p.16.)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 2항에서는“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비상사태’를 결정하고 있다는 것인가?


민간이라면,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요?

민간이라면 돈이지.

돈인가요?

돈이야.

돈이라 무서운 거야, 라면서 여 씨 아저씨는 정부가 첫 삽을 보란듯이 뜨고 난 뒤에 삽자루를 슬쩍 넘긴 셈이라며 어떻게든 그런식이라고 씨발 씨발, 하고 말했다. (p.129)


우리는 위의 인용에서 “민간”이라는 이름이 “돈”의 다른 말로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뿌리깊어서, 국민과 민간이 혼용되고 있으며, 민간과 돈이 혼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주권은 돈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비상사태=예외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돈이다. 돈에 의해 모든 사물은 그 자체의 역사성과 사용가치를 잃고, 교환가치로서만 존재하게된다. 이러한 상황은 그림자가 그 사물을 먹어치운 것이나 다름없다.

비상사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모든것을 단일화하고, 시간을 지닌 사물들에 대해 무례한 행동을 하는자들의 논리에 대항하려면, 힘으로 맞서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새로운 혁명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힘에 힘으로 맞서는 것은, 그리고 그를 통해 혁명을이룩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리 바꾸기에 불과할 뿐 이미 구축된 패러다임을 파기하진 못한다.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은교 씨와 무재 씨는 혁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들이다. 그들은 전자상가에서 노동을 하며 일상을 보내는 소시민들이고, 어떠한 단체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노동조합 같은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혁명을 진행하고 있다. 이 혁명은 새로운 인식에서 출발한다.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p.144)


무재 씨는 처음에 사람들은 누구나 본성상 “허망한” 성질을 지닌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종이박스를 줍는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다른 생각에 도달한다. 타인의 죽음은 나를 자신 안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죽음은 각자의 것일 수 없는 최후의사건이다(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밝힐 수 없는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역, 문학과지성사 2005, p.24 참조). 마찬가지로 탄생 역시 각자의 것일 수 없는 최초의 사건이다. 이 둘을 매개로 하여 나와 타인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와 같은 공동체에는 의지나 이념이 매개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  존재한다. 따라서 타인의 삶 역시 나와 무관한 것일 수 없다. 누군가의 실존양식을 통해 나는 사유한다. 할머니의 삶은 개인의 사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공동체는 어떤 하나의 이념에 사로잡혀 행동하지 않는다. 이 공동체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였지만, 하나의 이념에 의해 움직이거나 행동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각각의 단독성을 보존하는 가운데에 형성하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 공동체를 무위(無爲)의 공동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은교 씨와 무재 씨는 ‘연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어떤 당파적 성격을 띠는것도 아니고, 어떤 의식적 행동에 의한 결과물도 아니다. 그들은 ‘함께’ 있음으로 인해 공동체를 형성한다. 단순히 함께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어떤 생각을 공유한다. 그 생각이란, 사물들의 단독성에 대한 배려와 관련이 있다. 은교 씨와마찬가지로 무재 씨 또한 타인과 사물들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위의 인용에서처럼, 종이상자를 수집하던 할머니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에서 그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는 배려는 어떤 대상에 대해 특정한 판단을 내리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속성은 무위의 공동체와 닮아있다. 여기서 행동하지 않음은 행동할 수 없음과 두드러진 차이를 지닌다. 은교 씨와 무재 씨가 형성하는 공동체는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의 이항대립을 뛰어넘는다. 이를 통해 아감벤이 이야기하는 잠재성의 역량을 소진하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다.


노래할까요.

무재 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왜요.

콩밭, 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pp.73-74)


무재 씨는 이야기의 전체에 걸쳐“노래할까요.”라고 세 번 이야기한다. 그러나 앞의 두번은 노래를 하지않는다. 노래를 못하기 때문이아니다. “목이메서요.”라는 이유로 노래 부르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모습은 아감벤이 ‘바틀비, 혹은 우연성에 관하여’(Giorgio Agamben, ‘Bartleby, or on Contingency’, Potentialities? Collected Essay in Philosophy, trans.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1999. p.255.)에서 인용한 바틀비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바틀비는 충분히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일을 하지 않는다. 아감벤은 바틀비의 태도에서 잠재성을 발견한다. 여러 선택 중에서 한 가지만을 현실태로 소진시키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 이것이 아감벤이 이야기하는 잠재성이다. 잠재성은 새로운 윤리적 태도로서 남게 된다. 연인들의 공동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운데에 사회를 전복시킨다. 우리의 일상속에 깊숙이 침투한 자본주의의 위협에 저항하는 길은, 자본주의가 내놓은 양자택일의 틀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은교씨와 무재씨가 형성하는 연인들의 공동체는 노래로서 이러한 틀을 벗어난다.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천천히 걷고 있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pp.168-169)


은교씨는 이제 그림자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연인들의 공동체는 외부의 위협을 모두 무화시킨다. 그들은 행동으로 외부의 힘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함께 있다는 믿음에 의해 강해진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외부의 위협을 충분히 무화시킬 만큼 강한 것이다. ‘百의 그림자’는무재 씨의 “노래할까요.”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과연 부르기는 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단 노래가 유보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혁명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아무런 사전 공모 없이, 주도자도 없이, 조용하게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서로에게 이끌리는가. 그것은 알수없다. 다만 우리사이에 이끌림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연인들의 공동체는 이끌림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이끌림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다. 연인들의 공동체는 혁명만을 과제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대는 혁명을 수행한다. 여기서의 혁명은 누군가에 대한 배려와 애정에서 비롯한다. 혁명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랑은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는 태도이다. 사랑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때문에 이 혁명에서는 주체도 없고, 어떤 계획같은 것이 있을 수도 없다. 아직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으나,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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