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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드라마 뒤에 가려진 막장 같은 삶

입력 : 2010-08-29 09:17:20 수정 : 2010-08-29 09: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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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엑스트라들 TV 밖 거리로 나섰다 드라마 속에서 대사 한 줄 없이 스치듯 지나가는 보조출연자(엑스트라)들. 주인공들의 화려한 연기에 시청자들이 손뼉을 칠 때 그들은 성공을 꿈꾼다. ‘행인1’, ‘행인2’로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지만 그들이 없다면 어떤 드라마도 빛을 낼 수 없다. 현실세계에서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드라마 속에서보다 훨씬 낮다.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회원 100여명은 27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한 기획사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노동자와 아르바이트생들이 받는 최저임금이나마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지난 4월 말 대형 기획사(캐스팅업체) 등과 임금을 협약했다. 그동안 하루 일당(일과시간 기준)으로 받던 3만7000원을 4만원으로 인상하고 근로기준법에 따라 연장, 야간, 철야수당을 받기로 한 내용이었다. 협약 체결 전에는 24시간 촬영 현장에 있더라도 3만7000원을 받을 뿐이었다. 보조출연자들은 협약 체결로 형편이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기대했다. 헛된 기대였다. 협약 후 24시간 일했는데도 손에 쥔 건 5만1000원이 고작이었다. 일당 4만원에 야근비 1만1000원이 붙은 돈이다. 시간당으로 따지면 2125원. 최저임금 시간당 4110원의 절반 수준이다.

이들이 촬영현장에서 받는 대우도 열악하기 그지 없다. ‘반장’한테서 ‘야!’란 소리를 듣기 일쑤다. 심한 욕설을 듣기도 하고 맞기도 한다. 여성들은 더 심한 비하성 말까지 듣는다. 그래도 하소연할 수 없다. 항의하는 순간 다음 출연 기회는 사라져 버린다.

“최저임금 보장하라” 27일 방송보조출연 근로자들이 서울 여의도 한 기획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근로기준법에 준한 법적 수당 지급 등 근로조건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허정호 기자
◆인모(47·여)씨:‘상상플러스’, ‘연개소문’, ‘태양의 여자’ 등 출연=
2005년 남편의 사업 부도로 그는 하루 아침에 16억원의 빚을 짊어졌다. 남편은 연락을 끊었다. 이때부터 인씨는 보조출연자로 나섰다. 붙임성 좋은 성격 덕에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출연할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한 달 내내 뛰어도 손에 쥔 수입은 70만∼100만원이었다. 그나마 연이틀 촬영이 잡힐 때에는 집에 가지 않고 영등포역 등에서 노숙하며 차비 등을 아껴가며 모은 돈이었다. 이걸로 빚을 조금 갚으면 남는 돈이 없었다. 집도 없어 아이들은 친척집에 맡겼다. 대학을 다니는 첫째 딸과 대학 진학을 앞둔 둘째 딸을 위해 아들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돈을 벌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늙었다’는 이유로 출연 횟수는 많아야 월 3∼4회로 20여만원의 돈을 벌고 있다. 언제 출연 연락이 들어올지 몰라 고정적인 일도 잡지 못한다.

◆안모(59·여)씨: ‘에덴의 동쪽’, ‘태양의 여자’, ‘일지매’ 등 출연=“촬영 중인데 ‘반장’이라 하는 사람들이 ‘저 냄비들 세워’라며 소리를 지르더군요. 무슨 말인지 몰라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여자 보조출연자들한테 일어나란 얘기였대요.”

안씨는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 대신 생활비를 마련하겠다고 2005년부터 보조출연자 생활을 했다. 수입이야 형편없는 수준이다. 안씨가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인간 이하의 대우였다. 30∼40대 ‘반장’들이 아버지뻘 되는 60대 보조출연자들한테 하는 행동을 보면 ‘이곳이 대한민국이 맞나’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벌어 그날 사는 그들에게 반항은 곧 ‘왕따’를 뜻했다.

안씨는 “보조출연할 때 입는 옷을 세탁하지 못해 촬영 후 피부가 안 좋은 출연자가 수두룩하다”며 “화려한 드라마 속에 우리 같은 보조출연자들의 피눈물이 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구모(60)씨:‘전우’, ‘구미호 여우누이뎐’ 등 출연=“경주 촬영을 갔다 오니 출발에서 도착까지 33시간이 걸렸어요. 그리고 9만원을 받았어요.”

정년퇴임 후 일거리를 찾다 지난해부터 보조출연자로 나선 구씨가 ‘최악의 직업’을 선택했음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씨는 “방송국에 가서 얘기했더니 통장을 보여주면서 기획사에 제대로 돈을 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기획사는 방송국이 돈을 적게 준다고 하고”라며 울분을 토했다.

기획사들이 보조출연자 임금을 두 달 후에나 지급하는 것도 문제다. 그는 “출연자가 한두 명도 아니고 그 돈을 가지고 무얼 하는지. 다음 출연을 못하니 따지지도 못하고 참는 수밖에 없어요”라고 전했다.

구씨는 촬영장에서 5000원씩을 기획사에 내고 식사하러 갔다가 겪은 서러움도 소개했다. 반찬에서 위생상태까지 너무 안 좋아 주인에게 따졌더니 “4000원짜리 밥인데 그 정도면 됐지”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그 적은 임금을 받는 출연자들의 식사값에서 1000원을 떼먹었던 것이다.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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