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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43> 김영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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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2-01 15:03:37 수정 : 2010-02-01 15: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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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과학의 접목, 한국학 연구 새흐름 만들어 김영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은 과학물리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다. 문·이과를 넘나들며 강의해 왔다. 1977년부터 20년 넘게 서울대 화학과에서 강의했고, 2001년부터는 동양사학과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학생도 아닌 교수가 학과를 바꾸며 강의 주제도 바꿨으니 주목받을 일이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우리나라 성인의 머릿속에 자리한 문·이과 차원의 통념을 뛰어넘는 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해 왔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학문영역에서 종합적인 고찰과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정작 그에게는 애초부터 융합 연구나 학문 간 소통이라는 표현이 불필요했다. 학문이나 연구 자체가 서로 연결돼 있고 분류하기 힘든 특성 때문이다.

◇김영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장은 “진정한 학자는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내용과 의미를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자연과학자나 인문학도가 자신들끼리만 알아듣는 용어를 구사한다면 잘못”이라고 단언한다. 이어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다산 정약용처럼 많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과학기술을 학문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한다.
이제원 기자

2006년 2월 서울대 내의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가 통합되며 탄생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원장으로 그만큼 적임자도 없었다. 새로운 연구원 탄생에는 그간 국사나 국문학에 편중된 한국학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취지도 고려됐기 때문이다. 물론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의 이러한 이미지도 불식하려는 고려도 반영됐다. 중임까지 하며 4년의 임기를 채우고 2월 신임 원장에게 자리를 넘기는 그에 대한 서울대 안팎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여러 학문 분야를 아우르고, 각 영역이 서로 관심의 범위를 넓히는 계기와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다.

김 원장 자신도 나름의 성과를 냈다고 자부한다. 역사와 국문학에 치중한 한국학 연구의 실태가 바뀌었다. 연구원은 출범 이후 농업기술, 과학기술, 법률, 예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연구를 지속했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연구원은 다양한 국내외 학술행사를 개최하며 새로운 한국학 문화를 이끌어 왔다. 전통에 대한 관심의 범위를 넓히고 층위를 두텁게 할 수 있었다. 애초의 출범 의도에 충실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원장실 한쪽 책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구교수 지원서들이 이를 말해주는 듯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연구 흐름이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 학자가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있어요. 연구원에 재직하거나 떠난 학자들이 이곳의 경험을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며 활동하는 게 고맙지요. 서울대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바람직한 일이지요.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무엇이 성에 차지 않을까. 연구원만 넘어서면 이런 분위기 확산이 어려운 상황이다. 학문의 담장을 허물고 소통하는 게 대학 사회의 단과대와 학과 앞에서는 전혀 맥을 못 춘다. 대학 사회의 구성원들은 아직 ‘제 밥그릇 챙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문 분야와 학과의 이기주의가 만연한 문화는 여전하다.

그만큼 학문 현장의 이기주의 실태는 심각하다. 신진학자가 뿌리내리기도 힘들다. 더 큰 문제는 한국에서는 학과 교수가 아니면 강의하기도 힘들다. 연구만 하는 학자는 살아남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교수가 안 되면 연구자로 행세하기도 힘들다. 문제는 강의하는 연구자나 교수가 필요 없어도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연구 영역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분야는 사회나 학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가 답답해하는 이유다.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 일본만 하더라도 특정 분야에 연구자가 많습니다. 가령 일본 도쿄대에는 한국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있고, 교토대에는 중국 정원을 연구하는 교수도 있어요. 사회적, 경제적 효용과 무관하게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분위기를 수용할 만큼 사회가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가능한 이야기이지요.”

대학과 학계 풍토에 관한 김 원장의 따끔한 지적이다. 교육 개혁을 부르짖는 전도사가 따로 없다. 성채 안에 안주해서는 학과나 학문의 발전을 담보할 수 없다. 학과의 이기주의 극복과 함께 그가 강조하는 게 문·이과의 폐단을 없애자는 것이다. 직접 경험하고 실천한 당사자의 목소리이기에 설득력이 있다.

“한 분야에 오래 공부한 분들이 보면 제가 흔치 않은 연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관심의 범위를 넘나들었거나 일부러 연구영역을 확장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학문영역을 접한 것이지요. 화학과 동양사학이 별개로 보이지만, 우리 역사나 동양역사에 과학이나 기술 분야가 없었던 게 아니에요. 저 또한 동양사학을 연구하면서 동아시아의 유학자나 그들의 기술에 관심이 있고요.”

고등학생조차 문·이과 구분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에 그의 설명이 끌린다. 문·이과 구분이 애초 잘못됐기에 철폐하자고 그는 주장한다. 문·이과 구분은 외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제도라고 단언한다. 김 원장은 “애초 잘못된 제도를 철폐하고 교육과정을 전폭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장에서 자괴감을 느낍니다. 정책입안자를 포함해 위정자들이 억지로 나눈 문·이과 구분으로 학생들이 피해를 보고 있어요. 국가적으로도 손실입니다. 문과라고 수학을 외면하고, 이공계라고 사회 과목을 외면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배우는 학생의 시야가 좁혀지면 ‘외눈박이’ 지식인이나 전문가만 될 뿐입니다. 그건 결국 사회의 경쟁력을 낮추게 되고요. 한 예로, 과학에 대한 상식조차 없었던 이가 우주학문을 논하는 행정관료가 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문·이과 장벽이 야기하는 폐해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경험할 수 있다. 심리학과 지리학을 관습적으로 문과에 속하게 함으로써 과학적인 분석을 어렵게 했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부터 해양학이 이과로 분류되면서 해양물리학·해양화학·해양생물학만 있고, 해양교류사나 해양문학 등은 설 자리마저 잃었다. 오늘날의 학문이 점점 복잡성을 보이고 있는데, 경직된 구분과 격리 때문에 학문 발전이 더뎌지고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런데 왜 이런 구분이 생겼을까. 그간의 굴곡진 과정을 김 원장은 신간 ‘인문학과 과학’에 소상하게 풀어 설명했다. 학교의 진로 지도와 정부의 정책 집행에 문·이과 구별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추정이다. 김 원장은 “학생이 넘치고, 대규모로 일꾼을 만들어내야 했던 시절에 위정자나 학교 당국으로서는 문·이과 구분이 편리한 제도였을 것”이라며 “학생들의 필요가 아니고 관리의 차원에서 필요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기에 김 원장은 해법 모색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그도 문·이과 구분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여긴다. 이해당사자가 많고, 이런 잘못된 흐름에 익숙한 이들이 변화를 거부할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한때 시도됐다가 좌초한 경험도 있다. 학력고사가 폐지된 1993년에 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때였다. 수능에서 문·이과를 거의 구별하지 않고 평가를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대학입시에서 문과나 이과 학생들의 유·불리를 따지면서 다음해부터 시험문제 출제 방식이 문·이과를 구별하는 예전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염려 때문인지 그가 당장 실천 가능한 방법을 제시했다.

“문과와 이과 간의 장벽과 격리문제를 살펴보니, 이 상황에서 통합은 당장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통합은 불가능하더라도, 두 영역에서 인문학적 사고와 과학적 논리를 받아들이는 ‘연결’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인문학자가 과학과 기술을 모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 자연과학자가 철학과 문학을 거들떠 보지 않는 문화만이라도 불식시켜야지요.”

bali@segye.com

■김영식 원장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장. 1947년 서울 출생.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화학물리학 박사학위를,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 1977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대 화학과 교수. 2001년부터는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서양은 물론 중국과 한국 등 동양의 역사에서도 과학의 형성과정을 찾고 있다.

●저서

‘인문학과 과학’ ‘정약용 사상 속의 과학기술:유가 전통, 실용성, 과학기술’ ‘과학혁명:전통적 관점과 새로운 관점’ ‘역사와 사회 속의 과학’ ‘주희의 자연철학’ ‘과학, 역사 그리고 과학사’ ‘과학, 인문학 그리고 대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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