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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40년 족적'' 세상 속으로"2007년은 나를 정리한 해”

입력 : 2007-11-03 10:59:00 수정 : 2007-11-03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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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지성 133명과의 대화 모아 ''회화록'' 펴낸 백낙청 분단체제가 무너지면 특권 누리던 층 손해보는 것은 불가파한 일 다행히 한반도선 급격한 통일 안이뤄져 체제에 대한 위협은 北이 南보다 더 심각
해직… 복직… 구속… 가시밭길 걸었지만 충분히 성공적인 삶 살아와 그러나 못다한 일에 대해 아쉬움 많아 로렌스 통해 미뤘던 생각 정리하려 해

막상 그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그는 가까이서 대하기 쉽지 않은 인물로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다. 빈틈을 보일 것 같지 않은 견고한 학자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이른바 내로라하는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195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막바로 도미해 미국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브라운 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수석 졸업. 하버드대 대학원에 입학해 1년 만에 석사학위 받고 박사과정 진학을 허가받았지만 ‘조국이 그리워’ 귀국한 인물(서울대 교수 재직중 다시 도미해 197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동아일보(1959년 6월 12일자)는 브라운 대학을 수석 졸업하여 졸업식에서 대표연설을 하고 하버드 대학원에 진학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한국 학생의 우수성을 과시- 미 대학에서 우리 백낙청군이 영예의 졸업식 연설’이라고 가로 표제를 달고, ‘5개국어를 통달-하버드 대학원에 무시험 합격-여러 부분의 상도 받고’라는 세로 표제를 뽑았다.
‘우리 백낙청군’은 귀국 후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창간(1966년)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사회 진보적인 지성의 푯대 역할을 해온 이 매체를 창간한 후 그가 걸어온 길은 널리 알려진 대로이다. 그가 고희 기념으로 지난 40년 동안 국내외 지식인들과 나눈 대화를 전 5권에 이르는 ‘백낙청 회화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는데, 이 책의 2권에서 임형택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가 표현한 것처럼 “학문전공으로 말하면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영문학자이고, 문학 활동으로 말하면 평론가이며, 사업으로 말하면 ‘창작과비평’을 창간해서 끌고 온 편집인이라고 해야겠는데, 근래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 대표직을 맡고 있으니 통일운동가이기도” 해서 “올해 고희를 맞은 백낙청이란 인간존재는 무엇이라고 딱히 규정짓기가 애매”하다.
파주 출판단지에 입주해 있는 창비의 집무실 ‘심학산방’에서 그를 만났다. ‘귀공자풍의 하얀 얼굴에 체구가 약간 커 보이는 사람’(임형택)은 그날 감기에서 완쾌되지 않은 상태였다. 좋지 않은 그의 몸 상태 때문에 약속한 시간을 넘기지 말아달라는 창비 사람의 부탁을 들었던 터라 서둘러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전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피폐한 삶을 살 때 미국유학까지 다녀왔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시절 미국에서 공부한 이들이 보수적이거나 체제순응적인 경우가 많은데 유독 그는 진보적인 길을 걸어오면서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지날 달 25일 세종문회회관 세종홀에서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화록 출간기념회에서 백낙청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는 “세상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고 이날의 소감을 밝혔다.창비 제공

“한국에서 소위 명문고교를 나왔는데, 우리 세대는 특별한 면이 있어요. 우리 때까지는 병역을 필하지 않고도 유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너도나도 유학을 많이 갔어요. 내 경우 유학을 갔다는 것 자체가 특별하지는 않았는데(장학금을 받아서 갔기 때문에 특별히 풍족해서 간 것은 아니라는 의미), 대부분 돌아오면 군대에 가야 하니까 현지에 오래 머물다가 그렇지 않아도 보수적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 미국사회에 동화되는 예가 많았지요. 나는 미국에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니까 도저히 그렇게는 못살겠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가서 조국과 단절돼 여러 해 사는 게 너무 지겹고 못 견뎌서, 돌아오면 군대에 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귀국한 거지요.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과 이 지점이 다른 셈입니다. 나중에 창비를 시작했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진보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일을 하다보니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내가 볼 때는 특별히 불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당국과 마찰을 빚다보니 저항도 하게 된 거지요.”
지난 9월에 물러난 시민방송 이사장 직까지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 발을 걸치고 바쁘게 살아온 그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족적은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걸어온 일관된 걸음이었다. 그가 주창한 ‘민족문학론’이 그렇고, ‘분단체제론’이 그것이다. 분단문제를 천착한 배경의 무의식에는 6·25 때 납북된 그의 백부(백인제, 한국 현대의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그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3·1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치르고 의사가 되어 경성의전 한국인 교수를 역임했다)와 부친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까.

“실향민 집안인 데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일이 당연히 작용했겠죠. 하지만 우리 문학 하는 사람들, 특히 민족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분단문제가 핵심이었어요. 순전히 감성적인 차원에서만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다 보면 오래 가지 못하고, 고정관념으로 굳어져버릴 수도 있지요. 거기에 대해 성찰을 하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 분단체제론 식으로 발전이 됐다고 볼 수 있겠죠.”
부친의 생사 여부는 2000년에서야 그의 가형 낙환(인제대 설립자)씨가 대통령방북수행단에 포함되면서 국가정보원이 ‘부친 사망’ 사실을 확인해주어서 알게 됐다. 언제 어떻게 타계했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가족사가 그의 일관된 분단체제에 대한 천착을 이끌어낸 요인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사회의 엄혹한 분단이라는 조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분단체제가 60년 가까이 고착돼오면서 분단현실에 무감각해진 면도 없지는 않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소위 진보진영 일각에서 남북문제는 빼고 얘기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 지식인들이 ‘후천성 분단인식결핍증’에 걸린 것 아닌가”라고 우려한 적이 있다.
“보수층은 오히려 늘 분단을 의식하고 있어요. 다만 의식하는 방향이 분단체제로 형성된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불만이 없고, 누가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을 가하면 분단현실의 특수성을 무시한 비판이라고 공격하며 분단을 사용하는 게 문제일 따름이지요. 나는 특히 진보학계를 두고 에이즈에 빗대어 후천성 분단인식결핍증이라는 말을 한 건데, 진보학계에서 행세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단을 종속적인 변수로 생각하지 그게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핵심 사안으로는 안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국사회를 비판하고 판단할 때 늘 자기들이 교과서에서 보았거나 외국의 사례에서 본 척도로 진보와 보수를 따지는 것 같아요. 부분적으로 맞는 것도 있지만 현실에 밀착해서 핵심을 짚어내는 그런 면이 없어요. 그런 점을 지적해도 내가 사회과학자의 완장을 안 차서 그런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분단 상태로 오래 지속되다보니 일반 시민은 물론 학계도 분단체제에 길들여져서 분단체제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체제인데, 따라서 사람들이 변화시킬 수 있는 체제인데도 마치 항구적인 조건인 것처럼 전제하고 그 틀 안에서 진보를 논하니까 얘기가 겉돌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2005년 일본의 시사잡지 ‘세카이(世界)’ 인터뷰에서 향후 10년 안에 남북연합이라는 1단계 통일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한 적이 있다. 그때의 전망이 그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연말 대선에서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가도 큰 흐름에는 변화가 없을까. 그는 긍정적인 편이었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됐던 게 북미 대결이었는데, 미국이 정책을 바꿨고, 북이 호응하기로 결정했으니까 남쪽에서 누가 집권하든 그 방향으로 간다고 봅니다. 다만 평화와 번영 문제를 결부시켜 1단계 통일까지 계속 끌고 나아가는 게 중요한데 그거는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내용과 속도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분단체제로 이득을 얻는 남과 북의 기득권자들이 통일이 돼도 손해를 안 보는 조건이 분단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분단체제에서 특권을 누리는 층이 분단체제가 허물어질 때 손해보는 건 불가피합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한반도에서 급격한 통일은 불가능하게 돼 있습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쓸어버리거나, 인민혁명을 일으켜 기득권 세력을 쓸어버리는 일이 한반도에서는 있을 수 없어요. 너무 위험도가 높아 섣불리 그런 짓을 하다가는 다 죽게 돼 있어요. 그건 남북한 당국자들도 잘 알고 있고, 국민도 압니다. 그러니까 다른 대안이 없어서라도 지혜롭게 점진적으로 할 수밖에 없죠. 북측이 느끼는 체제에 대한 위협은 남쪽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지금 같은 분단상황에서 경제원조만 해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퍼주기가 되니까 남쪽 국민이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식으로 경제교류를 계속한다고 해서 체제가 반드시 유지될 것인가도 의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체제가 붕괴하지 않으면서도 현재와 같은 대결구도가 아닌 연합구도로 바꾸는 노력을 수반하면서 경제협력을 해야지 그쪽이 더 안전하고 남쪽 국민에게도 설득력이 있는 거죠.”
어느 칼럼니스트가 그의 분단체제론을 언급하면서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지, 통일은 당위가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의 견해도 그러할까.
“일반적 가치로 말하면 평화와 번영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가치이고, 통일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지요. 만약에 평화와 통일이 배치된다면 통일을 희생할 수도 있는데 그건 탁상공론일 따름입니다. 이런 시각도 일종의 후천성 분단인식결핍증이지요. 한반도의 경우는 우리가 덮어놓고 통일만 추구해도 평화가 보장되지 않고, 통일을 제쳐놓고 평화만 도모한다고 해도 어렵습니다.”
시종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말을 이어가던 그이도 이 발언의 말미에는 “통일을 말하는 사람들을 평화를 모르는 촌놈 취급하는 발상인데, 그걸로 기분 내려고 하면 안 된다”며 점잖은 톤으로 반격했다. 이쯤에서 문학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황석영 세대와 그 아래의 신경숙 성석제 같은 작가 세대까지만 해도 한국문학의 희망을 말하기에 함량이 충분했는데, 요즘 젊은 작가들로 내려가면 그들만의 ‘폐쇄회로’에 갇혀 독자들과 겉돌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윗세대는 희망이 있었는데 아랫세대는 희망이 없다, 그런 분석에는 동의 안 합니다. 일부 젊은 작가들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폼을 잡는 면도 있는데 김연수나 박민규 이기호 같은 작가들은 다 문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작업하는 사람들이라고 봐요. 어떤 때는 일부러 튀는 발언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더러는 작품 속의 장치로 읽어야 할 것을 작가의 신조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본말이 바뀌었지만, 사실 그를 만나기로 작정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방대한 회화록 출간 때문이었다. 그는 “내 개인의 저서 같으면 이런 얘기 못하겠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든 기록이니까 하는 얘긴데, 참 좋은 책”이라며 웃었다. 독자들에게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지만 1권부터 순차적으로 읽어야 재밌고, 그렇게 읽으면 “약간은 대하소설을 읽는 맛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화록에는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133명의 대담자들이 등장해 한국 지성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는 “금년은 나에게 정리하는 해였던 것 같다”고 ‘정리’했다. 시민방송 이사장을 6년 동안 맡아 궤도에 올려놓고 후임자에게 물려준 것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자녀를 마지막으로 결혼시켰고, 그가 모시고 살던 노모가 타계했을 뿐 아니라 40년 회화의 족적을 묶어내기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세속적인 ‘성공’의 기준을 들이대는 게 어울리지 않지만, 그는 해직과 복직, 구속의 가시밭길을 걸어왔어도 충분히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회한은 없을까. 그는 “더 잘했으면 하는 일들,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 원만하게 처리 못한 게 많다”며 “하지만 지난날에 대한 회한보다는 꼭 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하버드대 박사논문 대상이었던 영국작가 DH 로렌스를 통해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해 볼 요량이다.
비록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시종 잔잔한 목소리와 논리적인 언변으로 설득력을 발휘하는 그에게서 한국사회가 이만큼 진보하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저력의 일단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싸움이 아닌 ‘토론’이, 대결이 아닌 ‘상호 모색’이 필요한 시대의 해법을 찾으려면 그의 40년 회화록을 대하소설처럼 읽어볼 일이다.
글 조용호 문화팀장·사진 이제원 기자 jhoy@segye.com
■백낙청 연보
▲1938년 대구 봉덕동 출생. 6남매 중 셋째.
▲1954년 미국 뉴욕헤럴드트리뷴 신문사 주최 세계고등학생 토론대회 한국대표로 선발돼 미국행.
▲1955년 경기고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입학.
▲1959년 브라운대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석사과정 입학.
▲1960년 육군 제2훈련소 입대.
▲1962년 하버드 영문학 박사과정에 진학.
▲1963년 박사과정 1년 수료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에서 강의 시작.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
▲1969년 하버드대 박사과정 마치기 위해 도미, 1972년 박사학위 받음.
▲1974년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지지 문인61인 선언’에 참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선언에 참가.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해 문교부에 의해 징계 파면.
▲1977년 리영희 편역 ‘8억인과의 대화’를 발행해 반공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
▲1980년 사면, 복권과 함께 서울대 복직. ‘창작과비평’ 폐간 당함.
▲1988년 ‘창작과비평’ 복간. 하버드와 브라운대에서 강연.
▲1989년 남북작가회담 문제로 불구속 입건.
▲1994년 어바인 캘리포니아대에서 특임교수로 강의. UCLA, UC 버클리에서 특강.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출간.
▲1997년 제14회 요산문학상 수상.
▲1998년 은관문화훈장 받음. ‘흔들리는 분단체제’ 출간.
▲2001년 제5회 만해상 실천상 수상.
▲2003년 옥조근정훈장 받음. 서울대 정년퇴임.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2006년 제11회 늦봄통일상 수상. 6·15민족문학인협회 고문.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 ‘백낙청 회화록’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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