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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초대석]이상수 노동부 장관 "비정규직법은 타협의 산물…보완해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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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10-27 16:54:00      수정 : 2007-10-27 16:54:00
[토요초대석]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얼굴선이 굵다.
짙은 눈썹에 윤곽이 뚜렷한 프로필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인상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장관은 첫인상과 달리 ‘로맨티스트’다.그는 노래부르기를 좋아한다. 특히 가곡을 좋아한다.
그가 지난해 2월 노동장관에 내정됐을 때 난마처럼 얽힌 한국노동문제를 풀어나갈 적임자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하마평도 그래서 나왔다.
그런 이 장관이지만 최근 논란이 되는 비정규직 문제를 제외하면 1년8개월 동안 노동부를 무리없이 이끌어 왔다는 평가다.
24일 단풍이 짙게 물들어가는 관악산 자락의 정부과천청사에서 이 장관을 만났다.

―1988년 정계에 입문, 정치권에서 활동하다 노동부 장관으로 변신했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노사 간에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노사 모두 만족시키는 정책을 펴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죠. 재임 내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같았습니다.”
―재임 중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정말 많은 일을 해결했습니다. 안으로는 노동부에 산적했던 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작년에 노사정 간의 합의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을 마련했고, 40년 만에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밖으로는 노동부 산하 고용지원센터의 인적·물적 인프라를 확장한 일을 꼽고 싶어요. 선진고용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지금까지 50여개 청사를 매입했습니다. 내년 말이면 전국에 72개 고용지원센터 청사가 들어섭니다.”
노동행정의 중심축을 기존의 노사문제에서 고용문제 쪽으로 전환시켰다는 설명이다.
―지난 7월 처음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과 관련,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법은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노사 양측 타협의 산물입니다. 중간에서 노동부는 샌드위치가 됐습니다. 그렇지만 시행 4개월밖에 안 됐잖아요.”
―그럼, 법 개정은 언제쯤 가능하겠습니까.

“우선 법 효과에 대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해 보완책을 마련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 6개월이나 1년은 지나야 하고…. 그때쯤이면 경험을 통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겁니다. 다음 정권에서 해야 할 몫이라고 봅니다.”
―비정규직 남용 방지와 올바른 고용 관행 정착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법 취지 구현을 위해 노사가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중요합니다. 정부도 이런 노사의 자율적 노력을 지지하고 경험과 합의를 바탕으로 비정규직법 제도 정착에 노력할 것입니다.”
―장관직 그만두면 다시 정치할 생각입니까.
“당연히 18대 국회에 들어가야죠. 지금도 대통합민주신당 당원인데.”
곧바로 친정집 복귀를 고대하는 눈치다.
―언제까지 장관을 할 건가요.
“글쎄, 바로 나가기는 힘들 것 같고 정기국회 후 남아있는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대선 뒤에나 가능하지 않겠어요.”
―2002년 대선 당시 선거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구속됐다 사면됐는데.
“내가 대선자금 문제에 연루된 것은 캠프에서 후원회장직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총대’를 멘거죠. 노무현 후보 후원회장직을 맡으려고 한 사람이 없었어요. 며칠을 고민하다 후원회장직을 맡기로 했는데 그게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이 장관은 당시 억울함이 컸던지 장황하게 부연설명을 했다.
“당시 여당이 400억여원을 모금했는데 이 가운데 영수증을 끊지 않거나 법인 대신 사장 명의 영수증을 발부한 3건 26억원이 문제가 됐습니다. 모두 후원금을 낸 기업 쪽에서 요청한 것인데 이게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된 된 거죠. 양비론에 몰려 희생양이 됐고, 제도 개선을 위해 독배를 마셨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관행을 뛰어넘지 못한 데 대해서는 국민께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억울하지요. 젊어서 옥고(49일)를 치를 때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대선자금 문제로 5개월간 수감생활을 할 때는 가슴 속에 피눈물이 고였습니다. 감옥에서 단전호흡과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았으면 몸이 망가졌을 겁니다.”
―정계에 복귀할 경우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요.
“당시 과거 관행대로 선거자금을 모은 게 문제가 됐지만 검찰수사 결과 개인적으로 단 한푼도 유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상수는 역시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았지만 다음 총선에서 국민으로부터 진짜 사면을 받고 싶습니다.”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총대를 멨다가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87년 민주화운동 시절에도 인권변호사로 나섰다가 구속됐고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5년 보궐선거 때까지 포함하면 세 번 총대를 멘 셈입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그런 일이 없어야지요(웃음). 그런데도 자신은 없어요. 사주팔자에 총대 메는 기질이 나와 있더라고요. 이제는 지휘관이 돼야지요.”
―88년 재야 추천으로 정계에 진출하시면서 평민당 대변인으로 활약하셨는데 그때부터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이 있었나요.
“변호사 시절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꽤 오래됐죠. 예전에 제가 잘 나갔습니다.
43세 초선의원으로 당대변인으로 활약했지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선 노무현, 이해찬 의원과 ‘노동위 삼총사’로 이름을 날렸어요. 공무원들 사이에선 ‘노무현은 송곳으로 찌르고, 이해찬은 면도칼로 베고, 이상수는 도끼로 내리친다’는 얘기가 돌았지요.”
―내년이면 정치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는데 다시 정치를 한다면 어떤 꿈이 있습니까.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정치를 하는 게 꿈입니다. 주위에서는 국회의장 얘기도 있는데 하지 않을 겁니다. 당에 들어가서는 당지도부를 개혁하는 데 일익을 담당할 겁니다. 현재 대통령 선거는 너무 낭비적입니다. 내각제 개헌이 필요해요. 여야를 초월해 내각제를 추진하는 그룹을 만들 겁니다. 대통령제는 승자독식구조예요. 한마디로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이죠. 대통령제는 정치인에 대한 검증이 안 되지만 내각제는 검증할 수 있잖아요. 이제는 우리나라도 내각제를 할 때가 왔어요. 정치개혁의 꿈이 있는 한 이상수는 젊습니다.”
이 장관은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이번 대선을 어떻게 봅니까.
“정치가 생물이라서…, 앞으로 남은 2개월이 상당히 길잖아요.”
이 장관은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해 갔다. 그러나 정치인 시절을 얘기할 때면 얼굴이 환해지고 목소리와 제스처가 커졌다. 그는 천상 정치인이었다.

대담=홍성일 사회팀장
사진=김창길, 정리=박병진 기자

■프로필
▲1946년 전남 고흥 출생 ▲1965년 여수공고 졸업 ▲1973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 ▲1978년 20회 사법시험 합격 ▲1980년 광주지법 판사 ▲1982년 변호사 ▲1985년 노동법률상담소장 ▲1988년 13·15·16대 국회의원 ▲2006년 2월 22대 노동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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