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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배희칼럼]''호적''이 사라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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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6-25 15:16:00 수정 : 2007-06-25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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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부터 시효가 만료되는 말이 있다. ‘호적’이 그것이다. “호적에서 빼 버리겠다” 같은 말도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다. ‘호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흔히 쓰던 ‘내 성을 간다’와 같은 말도 곧 그 뜻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거의 불변의 것이었던 ‘성’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바꿀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법에 있어서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호적 대신 이제 우리는 자신의 ‘기본증명서’를 갖게 되고, 가족관계는 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관계증명서’에 기재되며, 혼인·이혼관계는 ‘혼인관계증명서’에, 그리고 입양이나 친양자 입양은 각각 ‘입양관계증명서’와 ‘친양자관계증명서’에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가족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가부장제에 근거한 호주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호주제를 폐지하면 마치 곧 모든 가족관계가 무너질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다. 이미 호주제는 폐지되었지만 호주제가 없어져서 어떤 가족이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호주제가 없어졌다는 것은 다만 호주와 가족구성원, 아들과 딸, 아내와 남편을 구별하던 기존의 수직적이고 차별적인 가족관계를 드러냈던 호주제와 그에 근거한 호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 혼인하면서 아내는 남편의 호적으로 옮겨야 한다든지, 이혼하여 어머니가 자녀의 친권자가 된 경우에도 자녀는 아버지 호적에 있어야 한다든지 하던 남녀 차별적인 호적 편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호주를 제외한 가족구성원들은 모두 자신을 ‘호주와의 관계’로 설명해 왔다. ‘호주의 처’ ‘호주의 모’ ‘호주의 자’ 이런 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주제가 폐지되고 그에 따라 호주제에 근거한 호적법도 ‘가족관계 등록 등에 관한 법률’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내년부터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기록부를 가지고, ‘나’를 중심에 놓고 ‘나와의 관계’로 다른 가족들을 설명하게 되었다. 진정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일단은 그저 서류 형식이 바뀌는 것이지만, 이러한 변화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호적제를 대체할 새로운 기록부에 관해 그간 많은 논의가 있었고, 내년부터 시행되는 ‘가족관계 등록 등에 관한 법률’과 그에 근거한 ‘가족관계등록부’가 사실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실제 등록기준지와 본을 기재하도록 하고 또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가족관계를 드러내도록 한 것 등에 대해 일각에서는 상당한 비판이 있다. 그러한 비판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임을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한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단 한 줄, 간단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세기가 걸렸고 그동안 몇 차례에 걸친 민법 개정을 통해 조문 몇 개씩을 삭제해 가며 이룩한 일이다.
따라서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부가 우리 이상과 조금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폄훼해서는 곤란하다. 현재의 성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누구의 자로 태어나 누구의 처, 누구의 모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 커다란 변화를 바르게 읽어야 한다.
가끔 역류하거나 엇갈린 길로 흘러갈 때도 있지만, 역사와 사회의 큰 물줄기는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이제 비로소 우리 사회도 진정한 21세기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획기적인 물꼬를 튼 것이다. 이 물줄기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진정한 양성평등을 향해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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