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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몰락은 일제탄압보다 내부분열 때문"

입력 : 2006-03-30 15:35:00 수정 : 2006-03-30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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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가 죽자 교주제 존폐 갈등
.천도교(교령 한광도)가 최근 언론에 공개한 ‘천도교 약사(天道敎略史)’에는 일제강점기 천도교 몰락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일제의 탄압보다 교단 내 신·구파 분열을 꼽아 눈길을 끈다. 또 일제 말기에 일어난 천도교 농민운동은 사회계몽운동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가장 늦게까지 펼쳐졌던 것으로 밝혀졌다.천도교는 1981년 ‘천도교 백년약사’ 상권을 간행한 이래 25년 만에 하권격인 ‘천도교 약사’를 간행했다. 상권이 동학(東學)시대의 교단사를 기술했다면, 하권은 1906년 이후부터 1976년까지의 ‘천도교시대’ 교단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후의 교단사는 당시 교단 수장을 역임했던 역대 교령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기술을 유보했다고 한다.
‘천도교 약사’에는 일제강점기 천도교 몰락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 있다. 천도교는 3·1운동의 민족지도자 33인 중 한 사람이자 동학의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1861∼1922)가 박해를 피해 일본에 체류하던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하면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명한 1860년을 포덕 1년으로 삼으면 올해로 포덕 147년을 맞는다. 천도교는 의암 생존 당시만 해도 국내 최대 종단에 속했다.
의암이 옥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1922년 숨을 거두자, 새 교주의 추대를 놓고 신파와 구파로 갈리며 갈등을 겪게 되면서 교세가 약화되기 시작했다고 ‘천도교 약사’는 분석하고 있다. 신파는 교주제를 없애고 새 지도자를 민주적 절차에 의해 뽑자는 쪽이었고, 구파는 교주제를 옹호하는 쪽이었다. 일종의 간부들 간 주도권 싸움이었다.
신·구파는 결국 1925년 천도교 조직을 둘로 나누어 운영하게 되었고, 중앙종리원 건물도 나누어 쓰기에 이른다. 분규 직전까지만 해도 천도교는 교인 수가 300만명을 웃돌아 국내 최대 종단이었으나, 신·구파 간 싸움이 계속되면서 청년과 여성 단체가 분열되고 전국 교당이 와해되기 시작해 교세가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신·구파는 분열 5년 만인 1930년 신파가 구파의 대도주 승통제를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합동이 이루어졌으나, 1932년 1년3개월 만에 다시 분열된다. 신파와 구파는 2차 분규 후 8년간 각기 독자적인 조직체계로 운영해 나갔다. 1937년 이후 일제가 전시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종교를 탄압하자 분열로는 더 이상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신·구파는 1940년 재결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오랜 분규로 교단은 지방 교당까지 사분오열됐고, 재기불능 상태에서의 재결합은 옛 영광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분규 와중에 교인 절반 이상이 이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도교 약사’ 책임집필자 김응조(71)씨는 “평안북도 강계 교당의 경우 4000호가 넘게 예배에 참석하고 중학교까지 경영할 정도의 대형 교당이었으나, 분규에 휩싸이면서 재산을 팔아치우는 등 끝내 지리멸렬하고 말았다”며 “지금 후진들은 당시의 분규가 천도교를 망쳤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치집단이 아닌 신앙집단인 만큼 교리나 의암의 교시에도 어긋나는 분열만은 막았어야 했다”며 “당시 어느 한쪽이라도 양보했다면 오늘의 천도교가 이 정도로 낙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일제강점기 천도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다양한 신문화운동은 굉장한 사회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천도교 청년당은 1908년 일제가 토지조사령 등 명목으로 토지 수탈을 감행하자 농민부를 비롯한 7부문 운동을 전개하면서 농민운동에 적극 대처했다. 1925년에는 조선농민사를 창립한 뒤 월간 ‘조선농민’을 발간해 농민교양사업에 힘썼다. 농민사는 1931년 농민공생조합을 결성, 전국적으로 공동경작을 시행하는 한편 평양에 농민고무공장을 만들어 고무신을 염가에 공급했다. 1937년 일제의 대륙 침략(중일전쟁)으로 국내 모든 자생적 농민운동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천도교 농민운동은 당시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농민총동맹보다 더 큰 규모로 농민운동을 이끌어 갔다. 이러한 사회운동 저력은 오늘날에도 천도교에 면면히 남아 재도약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신국판 574쪽으로 된 ‘천도교 약사’는 116년간의 천도교 주요 역사가 담겨 있어 우리 근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동학 천도교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한편 천도교는 오는 4월5일 최대 명절인 ‘천일기념일’(창도 기념일)을 맞아 서울 종로구 경운동 중앙대교당을 비롯해 각 교구와 경주 용담성지에서 기념행사와 7일간 특별기도(3월29∼4월4일)를 봉행한다.
정성수 기자 hul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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