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사정으로 쉽니다.” 팬데믹이 발발하기 전이던 2017년 12월 어느 날 오후, 봉천동 인근을 산책 중이던 소설가 조경란은 동네 초입의 한 식당 앞에 붙어 있는 종이 안내문을 보게 됐다. 안내문은 비툴비툴한 글자로 씌어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보통 ‘개인 사정’이라고 하는데, ‘가정 사정’이라고 쓴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어요. 저 식당의 가정 사정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매일 그 식당 앞을 지나다녔습니다. 두 사정의 같고 다름에 대해서 닫힌 문밖에서 떠올려보려고 했죠. 그 식당은 끝내 다시 문을 열지 않았고요.”
그는 노트에 적었다. ‘가정의 사정들’. 다른 사람의 가정 사정에 대해서 더 깊이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가정의 사정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했고, 여기에 사회적 이슈들도 맞물려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즈음 우연히 본 신문 사회면 기사도 가슴에 박혔다. 그해 연말 열린 불꽃놀이 축제에서 종이쪽지들이 바람에 날리면서 인근 아파트 단지로 떨어졌고, 이로 인해 아파트 경비원들이 종이쪽지를 치우느라 고생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불꽃놀이를 보고 즐긴 사람도 많았겠지만, 축제에 쓰인 종이쪽지를 끝끝내 치우며 고생하는 사람도 있겠구나.
쓸쓸한 가게의 안내문과 많은 시민들이 즐기는 축제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겹쳐지면서 소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집과 사람에겐 사정이 있으므로 소설은 단편소설 한편이 아니라 여러 편의 이야기로 파생될 것이라고 생각됐다. 이듬해 2월 말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연작 소설의 첫 편 「가정 사정」이었다.
조경란 작가가 가끔은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아픔을 엇갈리거나 교차하듯 간직하고 살아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작 소설 『가정 사정』(문학동네)을 들고 돌아왔다. 4년 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소설집에는 표제작 「가정 사정」을 비롯해 「내부 수리중」, 「분명한 한 사람」, 「개인 사정」 등 8편의 단편이 담겼다. 「가정 사정」만 문예지 등에 발표됐을 뿐, 나머지 7개 작품은 이번에 처음 발표됐다.
표제작이자 2020년 김유정문학상 후보작에 올랐던 「가정 사정」은 아내와 아들을 불시에 잃고 남겨진 경비팀장 윤씨와 그의 딸 정미 부녀가 처음으로 둘만의 새해를 맞는 모습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윤씨는 고층빌딩에서 떨어진 종이 꽃가루를 치우다가 다리 골절로 입원하게 되고, 힘겹게 수선 가게를 운영 중인 중년의 딸 정미는 가게를 닫고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향하게 되는데.
“정미는 검은색 매직으로 또박또박 썼다. 가정 사정으로 쉽니다. 가게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리고, 그 위에 안내문을 붙였다. 아버지에게 비 예보를 전해드려야지. 그보다 먼저 아파트 야산에는 왜 올라가신 거냐고 싫은 소리부터 할지도 모르지만. 그늘진 골목을 정미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41쪽)
작가 조경란은 왜 각자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 대체로 엇갈리다가 아주 가끔 공감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써야 했을까. 그의 작가적 행로는 어디를 향해 나아갈까. 조 작가를 지난달 30일 전화로 만났다.

―표제작 「가정 사정」의 두 인물 윤씨와 딸 정미 모두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물들이다.
“특별한 사람을 등장시켜서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왜 평범하지 않은지, 그 사람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소설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저에겐 더 어려웠다.”
―소설 도입부의 수선가게 및 수선 묘사 디테일이 눈에 띄는데.
“제가 사는 동네에 자주 다니는 옷 수선집이 있다. 늘 왔다갔다 하면서 아주머니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가서 지켜보고 취재를 했다. 재봉틀을 배우기도 하고. 물론 소설을 쓰기 위해서 배우거나 한 건 아니었다. 원래 관심이 있었다. 재봉틀이나 깁고 꿰매다는 표현들도 좋아하고.”
―딸 정미가 아빠의 병문안을 가는 인간적인 결론을 취한 것 같다.
“가족이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감정을 막 표현하거나 농담을 하거나 따뜻하게 지냈던 가족이 아니다. 작은 사고가 일어나고 작은 상처를 받으면서 둘밖에 없구나, 하고 느끼면서도, 하루하루 견뎌 나갈 수 있는 미지근한 가족의 사랑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부녀 이야기쯤 되겠다.”
「내부 수리중」은 아이를 갖지 못해 괴로워하는 중년의 기태와 연호 부부가 몰래 괴로워하며 공감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불을 켜야겠어, 여보. 아내가 산의 젖은 흙을 여기저기 묻히고 있는 기태를 봤다. 기태가 가진 불안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눈빛으로. 이제 그들은 알 게 될 것이다. 시작된지 구일 후 수색은 성과 없이 종료된다는 것과 그 일과 무관한 듯 조금씩 나빠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아내가 지금부터 자신들이 시도하는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을 밀어내는 힘으로 가게 문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보여서 기태는 자신의 부족한 손으로 얼른 아내의 손을 맞잡았다.”(78쪽)
―이 소설은 어떻게 나왔는지.
“한 연쇄 살인범이 감옥에서 소녀를 죽였다고 자백을 하면서 그가 말한 아파트의 흔적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시신을 유기한 장소에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기사를 보고 아파트 주민들이나 새로 들어온 사람들, 집을 얻는 게 꿈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저지른 죄는 아니지만 어떤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남는 일이 있는데, 어떤 부족함으로 상대의 손을 잡는 과정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소설 「분명한 사람」은 오숙이 7년 전 모임에서 자신을 챙겨주던 선생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가 모임을 함께 했던 유니콘과 재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숙은 글을 쓰면서 치유 받고 선생의 격려로 힘을 얻어갔던 자신을 떠올리며 조용히 흐느끼게 된다. “쓰세요, 어떤 글이든. 그런데 시작도 전에 포기하게 되거나 시작해도 쉽지 않을 거예요. 힘들 때마다 그 책에 찬사를 해줄 사람을 떠올려보는 거예요. 한 사람은 있어요. 내 쪽의 그런 분명한 한 사람. 때론 그게 나 자신이 될 수도 있겠죠.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내고 또 받는 거예요. 그렇게 계속하다보면 뭔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 힘을 내서 살아야 할 때가 많으니까.”(153쪽)
―오숙과 선생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머니가 팬데믹 당시 받은 첫 재난지원금으로 싱크대를 바꿨는데, 그때 청소를 하다가 옛날 사진이 나왔다. 사진을 보면서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번듯한 직업도 없는 여성 오숙이 지금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당신 잘 될 거야 꼭 찬사를 받는 날이 올 거야, 라고 말해주는 분명한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조금 나은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분명한 한 사람이 누구에게나 있었으면 좋겠어, 나에게도, 하는 마음으로 썼다. 개인적으로, 어머니가 기저질환자라서 꽤 오랫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다. 책 읽고, 원고 쓰고, 줌으로 강의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오래 고립돼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 그래 잘 될 거야, 지금은 어렵지만 나아질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분명한 한 사람이 있을 텐데, 우리가 자기 문제에 너무 매몰돼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소설집 속의 「양파 던지기」, 「이만큼의 거리」,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등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가족을 둔 생존자 가족의 일상을 다루면서 유가족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르고 있다.
마지막 작품 「개인 사정」은 백화점에서 일하는 인주가 코로나 확진자가 다녀가면서 3일간 백화점이 문을 닫게 된 뒤 오빠가 입원한 대구의 병원을 찾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인주는 오빠의 부탁으로 7세 아이 규이와 그의 토끼를 만났다가 뜻하지 않게 휴가를 연장하게 된다. “모르는 청년의 일로 가슴 아파하는 아주머니에게 인주는 말했다. 왜 슬픈 이야기는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어줄까요. 인주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슬픈 이야기들이란 사실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이라고.”(291쪽) 조금씩 부족한 이들이 서로 손을 맞잡게 되는 소설의 마지막은 특히 전지적 시점을 바뀐 뒤 다가올 잿빛 미래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부모 없이 자란 이들의 상처와 그들의 보이지 않는 연대도 엿보인다. 인주라는 인물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아이의 생명권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부모에게 어떤 분노 같은 게 있었다. 이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하는 질문이 처음이었다. 그러다가 인주와 오빠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즉,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했을 때 서울의 한 백화점에 23번 확진자가 나와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23번 확진자와 연관된 작은 여진 같은 일을 생각하다가 백화점에서 일하는 직원 중 휴가다운 휴가를 가지 못한 채 원치 않는 휴가를 가는 분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인주라는 캐릭터를 구상했다. 상처 받은 이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본능적인 일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 그 아이는 누구에게 마음을 붙이면서 살아갈까, 생각해보니, 아마 다리를 절뚝거리는 관절염에 걸린 토끼를 본능적으로 못 본 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연결,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번 연작 소설집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작가에게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 이웃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 세계를 바라보는 눈 세 개의 눈이 있다. 저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주위에도 관심을 갖고 살아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여덟 번째 소설집인데, 이번 소설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첫 번째 눈에서 두 번째 눈으로 가게 됐다고 생각한다. 눈을 하나 더 뜨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지만, 드디어 두 번째 눈이 생기기 시작했구나, 하는 걸 느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앞으로 ‘이웃’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알고 싶어졌다며 이웃에 대해 쓰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소설집의 주제는 이웃 사정이 되려나 봅니다, 하는 사소한 농담으로 작가의 말을 마칠까 한다. 서로의 문제가 어떻게 만나고 작용하는지 지금보다 깊이 들여다보겠다.”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일까,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마치 달이 뜨지 않는 그 밤처럼 앞이 컴컴했다. 그렇다고 대충 취직해 기계적으로 살 순 있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조경란은 그 즈음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야행성 올빼미처럼 밤낮을 거꾸로 살기 시작했다. 매일 오후 1시쯤 일어나서 새벽 5, 6시쯤에 잠에 드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대신 히키코모리처럼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책을 읽어 나갔다. 집 근처에 있는 『대학서점』에 가서 책을 사왔다. 특히 김현 및 김병익 평론가가 거론한 작품이나 작가의 작품을 읽어나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다시 바뀌고, 다시 또 한해가 지나갔다. 그렇게 무려 5년이 흘러갔다. 집을 지어 파는 등 여러 일을 했던 아버지도, 가정주부였던 엄마도 이 시간 동안 한 번도 ‘집안의 골칫덩이’가 된 맏딸인 그녀에게 나가라, 뭘 해라, 왜 남들처럼 하지 않느냐,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없이 딸을 기다려줬다. 그 사이 두 여동생은 대학에 들어가고 입사도 했다.
마침내 스물다섯 살이 돼서야,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깨달았다. 문학, 그래 문학이었다. 문학하는 사람들 옆에 가까이 가고 싶었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은 너무 어마어마해 당시 감히 꾸지 못했지만. 스물여섯 살이던 1994년, 그는 서울예대 문창과를 들어갔다. 소설가 조경란의 원점이었다.
처음 대학에선 시를 썼다. 1년 동안 시를 열심히 썼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란 노력한다고 쉬이 되는 장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탤런트나 재능이 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소설은 재능이 좀 없어도 좋아하는 마음이 있고 성실하게 꾸준히 쓴다면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확실한 믿음으로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썼다. 2학년 여름방학 때엔 단편 습작 「불란서 안경원」을 쓰기도 했다. 생각보다 빨리 소설가가 됐다.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이다.
1969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조경란은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불란서 안경원」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다급하게 던졌다. 등단 이후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풍선을 샀어』, 『일요일의 철학』,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중편소설 『움직임』,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혀』, 『복어』 등을 펴냈다. 문학동네작가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등단 26년이 됐다. 작품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저의 작품 세계는 어떤 강력한 사건을 바탕으로 스피디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나 리얼리즘 쪽은 아니다. 천천히 읽고 아주 깊이 읽어야 보일 수 있는 작은 이야기, 미니멀한 세계 이야기를 해왔다. 가족이나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개인 이야기를 해왔고, 이제 조금씩 가족이나 이웃 이야기로 옮겨가고 있다. 앞으로 작품 세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장편은 몇 권 내지 않았는데, 지금 사회적 이슈와 동시에 가족 문제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준비 중이다.(미니멀한 세계라고 하면) 저는 소설이 마음, 감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뿌리를 두지 않은 표현이나,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에 독자들에게 어떤 정서적인 움직임을 남길 수 있는 소설을 쓰려 한다.”
―소설 쓰기의 원칙이나 방법은.
“소설에서 사건이 아니라 인물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한다. 좋은 작가는 중심인물을 놓치지 않고, 더 좋은 작가는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놓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를 갖고 있어서 한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 저의 일이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중심인물이나 보조 인물들을 놓치지 말고 그들에게도 시선을 줄 수 있는 소설쓰기, 그런 시선을 갖는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인물을 쓸 때 특별히 주의하는 점은) 이 인물이 왜 이런 결정이나 결심을 하게 됐을까, 하는 감정의 인과에 충실하고 감정의 인과를 더 깊이 보려고 한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해 어떤 동기에서 어떤 결심을 하게 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를 통해 소설 마지막에 인물이 변화하거나 그의 성품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 소설 마지막은 독자에게 드리는 열어보지 못한 편지봉투 같은 느낌을 주고 싶다. 어떤 편지에 담긴 감정의 파문을 담은.”
―꼭 쓰고 싶은 작품이나, 작가로서의 비전이 있다면.
“작가로서의 비전 같은 건 없다. 다만 지금 쓰고 있는 경장편을 잘 마무리하고, 문예지 겨울호에 실릴 좋은 단편을 쓰고, 앞으로 쓸 장편을 잘 쓰자고 생각할 뿐이다. 작품이 사랑을 받을지, 인정을 받을지, 아니면 호평을 받을지, 또는 어떤 작가로 평가받을지는 저의 일이 아니고, 욕심을 부려도 되는 일도 아니다. 미국에서 제 소설이 곧 번역 출간될 예정인데, 그래서 독자가 넓어지면 좋은 거고, 아니면 할 수 없다.”
중앙대 문창과 겸임교수로서 1주일에 2번씩 강의를 나가는 것을 빼곤, 소설가 조경란은 봉천동 집을 중심으로 여전히 올빼미처럼 밤과 낮을 바꿔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천천히 읽고, 자주 생각하고, 조금씩 글을 쓰고.... 해질 무렵에는 조용히 산책도 나설 것이다. 봉천동을 중심으로 관악산 자락과 서울대 캠퍼스, 낙성대공원, 상도동 고개 등으로. 천천히, 지치지 않고.
간헐적으로 소설의 문장도 쓸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에 쓴 작품이 대표작”이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지치지 않고. 어느 순간, 어떤 이상이었던 소설은 생활이 돼 그의 옆에 순하게 앉아 있다. 잘 써야지, 좋은 걸 써야지, 하는 마음도 사라졌고. 이제 남은 건 소설을 좋아하는 마음뿐. 그 마음 하나뿐. 포기하지 않는, 오랫동안 변치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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