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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우상숭배 맞섰던 조선의용군 ‘마지막 기백’

입력 : 2022-09-17 01:00:00 수정 : 2022-09-16 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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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원산서 태어난 김학철
일본 순사 행패 겪고 항일의 길
일본제국군 전투서 다리 총상
日 전향서 거부 옥살이 중 절단

김구 등 독립운동가 일화부터
마오쩌둥·김일성 독재 비판도

최후의 분대장/김학철/보리/2만5000원

 

이 남자는 누구인가. 외발로 서 있지만 꼿꼿한 기백이 흘러나온다. 초로에 접어든 얼굴에선 파란만장했을 삶이 읽히지만 형형한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다. 중국 화북지역에서 일제에 맞섰던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이다.

 

191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 제조업자 아들로 태어난 김학철(본명 홍성걸)은 십대때 독립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중국에 간다. 이후 의열단 활동과 중앙육군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군으로서 일본제국군과 전투 중 다리에 총을 맞고 일본군 포로가 된다. 총 맞은 다리는 일제에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끝내 치료받지 못하고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조국 광복을 앞두고 끝내 절단했다.

 

조선의용군 1지대 소속 창립대원으로서 중·일전쟁에서 싸우다 다리를 잃은 독립운동가·작가 김학철. 보리 제공

이후 서울, 평양, 베이징을 거쳐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에서 작가로 정착한 김학철은 ‘문화대혁명’ 시기 우상 숭배에 저항하다 중국 감옥에서 10년 동안 또다시 옥살이를 한다. 1980년 복권 후 2001년 9월 연길시에서 타계할 때까지 장편소설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등으로 민족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들을 써냈다.

 

“거센 파도가 안벽을 들이덮칠 때마다 방바닥이 움씰움씰 들노는, 게딱지 같은 삼간 초가집에서 나는 태어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김학철의 자서전. 일제에는 총칼로, 해방 이후 이념 대립과 독재에는 펜으로, 권력과 폭압에 끝까지 저항하며 격변의 시대에 동북아를 누볐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박력있게 펼쳐진다. 1995년 국내 출간된 책이 다시 복간됐는데 한 번 잡으면 놓기 힘들 정도로 재밌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생생한 우리말이 만들어내는 글맛이 보기 드물게 풍성하다. 꼭 영화·드라마로 만들어졌음하는 바람이 생길 정도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 노장은 자서전에서도 더없이 진솔하게 그가 걸어온 길과 당대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준다. 이런 것까지 적었을까 싶었을 정도. 타고난 익살과 해학으로 격변의 시대를 지나온 자기 삶과 사회상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드러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군 창설 기념 단체사진 김학철은 “조선의용대의 총대장은 김원봉, 제1지대장은 박효삼, 제2지대장은 리익성. 그리고 왕통과 김학무가 각각 1, 2지대의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식순의 하나로 전체 대원들의 가슴에 배지(휘장) 하나씩을 달아 주는데 거기에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라는 한문 글자 다섯 자와 ‘코리안 볼런티어(Korean Volunteers)’라는 영문자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보리 제공

원산 앞바다에 등장한 일본 함대 위용에 “우리 해군 최고”를 외치던 철부지 소년이 항일의 길을 걷게 된 시작부터 소박하다. 서점에서 산 새 책을 빗길에 상의 안에 넣고 길을 걷다 일본 순사에게 도둑으로 몰리며 ‘망국노. 망국노.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 건가’고 원통했던게 그 시작이다. 이후 윤봉길 폭탄 투척 의거를 접하면서 “상해에는 우리 임시정부가 있는데 그 청사 앞에선 버젓이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다는 거거든”이란 보성고 선배 말을 들은 후부터 그는 오매불망 임정 생각만 하게 됐다. 그리하여 교복차림으로 가출을 결행한 김학철이 여러 차례 일제 검문을 당하며 상해에 입성해서 의열단 행동대원이 되는 과정은 영화처럼 극적이다. 이후 독립군자금 마련을 위해 벌였던 여러 테러 활동에 대해 김학철 본인은 이렇게 적는다. “총적으로 말해 우리들의 모험주의적 행동은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았다...더구나 나 자신은 천성적으로 그런 활동에는 부적합한 것 같았다. 그러게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맡겨진 임무란 다 들러리 역뿐이었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있던 남경으로 옮긴 김학철은 이때부터 백범 김구, 약산 김원봉 등 독립운동의 전설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된다. 김원봉은 ‘약산 동무’, 백범은 면전에선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뒤에선 ‘노(老)완고‘, 그리고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은 ‘미주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다는 회상이 재미진다.

 

“김원봉 선생은 의열단의 의백(단장)을 지낸 분이라서 굉장히 무섭게 생긴 줄 알았는데 막상 대해 보니 시골 중학교 교장 선생님같이 부드러운지라 나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김원봉은 말재주가 없어 말끝마다 “말이야”를 붙여 아랫사람들끼린 “오늘 ‘말이야’는 모두 서른 세번”, “틀렸어. 모두 서른네 번”식으로 서로 우겼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타고난 카리스마로 우리들의 마음을 끌고 또 자연스레 복종을 하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최후의 분대장/김학철/보리/2만5000원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에 대한 기억도 흥미롭다. “우리는 리청천 선생도 역시 대선배로 존경을 했다. 그분이 비록 총 한 방으로 왜병 일곱 놈을 쏴 눕혔다는 따위의 허풍을 치기는 했지만서도. 일곱 놈이 북어쾌처럼 가지런히 너부러지더라는 것이다.”

 

김구의 매력은 깊은 학식에 어버이다운 자애로움, 그리고 용돈이었다. 심부름간 김학철에게 김구는 늘 격려와 함께 용돈을 주곤했다. 이역만리에서 우국지정을 불태우던 젊은 청춘 일상도 바로 옆에서 보는 듯 전해진다. “8월 29일 국치일에는 꼭꼭 점심들을 굶어서 망국의 한을 주린 창자에 아로새기곤 했다.”

 

김학철은 1937년 만 21세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 입학, 당시 대륙 실세였던 장개석까지 접한다. 황포학교 교장 신분이기도 했던 장개석이 펼친 두 시간에 걸친 훈화를 견디다 못한 동기생이 수통에 실례를 한 이야기까지 적혀있다.

 

‘인물지(人物志)’랄 정도로 여러 독립운동가의 소소한 일까지 적고 있는데 열이면 아홉은 횡사하거나 숙청으로 불우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김학철은 “우리 독립중대는 조선 혁명의 굳건한 골간을 제련해 내는 일종의 용광로 같은 구실을 했다. 이 골간들로 이루어진 조선의용군이 1941년 이강에는 중국에서 계속 태극기를 휘날리며 무장투쟁을 견지한 유일한 조선 군대로 돼 버렸다”면서도 “말년은 비참하기가 짝이 없었다. 총살이 아니면 강제노동. 그 가족들까지 산간벽지의 특별구역에서 학대와 굶주림 속에 짐승, 벌레처럼 하나하나 죽어가야했다”고 기록했다. 김학철이 전하는 중·일전선 풍경은 너무도 생생하다. 조선의용군은 특히 용감하게 싸웠는데 속으로는 떨면서도 ‘저 조선 놈들 꼴 좀 봐라’라는 비웃음을 사지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애초부터 김일성 독재에 비판적이었던 김학철은 북한 정권 휴양소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만난 풍경도 고스란히 전한다. “술이 거나해지자 김일성은(그는 실력있는 술꾼이었다)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열중한 나머지 손가락으로 술을 찍어 가지고 식탁에다 지형까지 그려 보이며 설명을 하는데(야박스레 표현한다면 허풍을 치는데)실전의 경험이 있는 고봉기와 나는 그저 건성으로 감복한 체할 밖에 없었다.” 

 

모택동, 장개석, 주은래, 곽말약과 김원봉, 김구, 최창익, 박헌영, 여운형, 최영건, 무정, 최승희 등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격동의 시대를 누빈 숱한 현대사 인물을 만났던 김학철이 가장 존경했던 건 팽덕회였다. 중·일전쟁때 통신병만 데리고 조용히 조선의용군을 찾아와서 소탈한 담화와 연설로 이역만리에서 싸우는 이방인 군대를 위로하고 격려한 위인이었다. 그래서 훗날 팽덕회를 위한 소설을 쓴 대가로 김학철은 다시 문화대혁명때 10여년간 옥살이를 한다. 자서전 후기에서 공산주의자로서 문화대혁명을 겪고 김일성 체제를 경험한 김학철은 이렇게 적는다. “유감천만하게도 현재의 이 상태로는 남과 북의 화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조선 반도의 통일은 이북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 그 밖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김씨 왕조의 붕괴없이 통일을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가련하고 처량한 백주몽이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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