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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니니코라치우푼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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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8-26 22:47:46 수정 : 2022-08-26 22: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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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발명해낸 ‘태고’의 언어
알량한 모국어론 온전히 못 담는
“一者이자 진리”의 또다른 이름
그 언어를 찾아가는 절대여정 담아

니니코라치우푼타. 소리 나는 대로 쓸 수는 있지만, 그 어떤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아 우리말이라고 할 수 없는 이 말은 구병모의 동명의 단편소설 <니니코라치우푼타>(‘자음과모음’ 2022년 여름호)가 발명해낸 ‘태고’의 언어다. 무슨 말이냐고? 니니, 뭐라고?

사정은 이렇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뒤의 근미래, 한때는 한 손에는 마이크 다른 손에는 보드 마커를 쥐고 강단에 서서 대학 신입생들에게 교양 과목을 강의하던 ‘나’의 엄마가 여든여덟의 나이에 인지장애를 겪으며 사설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다. ‘나’는 이제는 더 이상의 수요가 없는 특수분장 전문가다. 이미 사양이 뛰어난 컴퓨터만 있다면 그래픽 후가공을 통해 그 어떤 형태의 크리처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됐고 ‘나’가 설 자리는 없다. 살인적인 노동 환경을 견디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겐 이 젊은 작가가 그려내는 근미래의 풍경이 조금도 미래적이지 않을 듯하다. 구병모가 그려내는 미래는 중위연령 61세의 초고령사회다. 팔구십 대 노인을 일흔 남짓한 이들이 씻기고 먹이고 돌보는 사회. 정년은 69세지만 움직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면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국가 책임 케어 제도는 허울뿐이고 혼인과 출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친인척 관계망이나 자식들은 대안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디스토피아라고 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애틋함이 없지는 않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는 아홉 살 적에 만나 같이 놀았다는 외계인 ‘니니코라치우푼타’를 보고 싶어 하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최선을 다해 그럴듯한 외계인 분장을 완성한다. 뭐가 됐든 엄마가 어떤 존재를 보고 싶어 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마의 환상에 동참하는 이유로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꽝. 온갖 클리셰 범벅인 외계인 친구와의 간절한 우정을 또렷이 되새기던 엄마는 그 기억대로 재현된 외계인 분장의 배우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고개를 젓긴 이르다. 마지막 반전이 남아 있다. 소설의 마지막,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30편이 넘는 영화가 담겨 있는 20테라바이트의 유에스비를 발견한다. 장르도 성과도 제각각인 이 영화들을 엄마가 왜 유에스비에 저장해둔 것인지 의아해하던 ‘나’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엄마가 서툴게, 그리고 빼곡하게 적어둔 영화 제목들은 모두 우리 작업팀이 분장에 참여한 작품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하여 우리 사무실 바깥에서는, 즉 이 세상에서는 나의 엄마만이 알고 있는, 아니 이제는 알고 있었던” 그 영화 리스트들은 엄마의 ‘니니코라치우푼타’를 만들어낸 근거였던 셈이다!

구병모는 말한다. 그것은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이라고. 이 이름이 어떻게 발음되든 또 무엇으로 환유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설혹 소리 내어 발음하기 어렵더라도 가슴이 먼저 반응하기 마련이다. 느닷없는 소설의 마지막 반전에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오직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외계의 언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그것,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결코 놓을 수 없는 그것. 알량한 우리의 모국어 실력으로는 결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은 이리하여 “일자(一者)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것을 ‘엄마’라고 쓸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재는 얼마나 한심한가. 아니, 그것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근미래는 더 이상 비관적이지 않은가. 글쎄, 사정이 어찌 됐든 이 순간 소설은 그 언어를 찾아가는 절대의 여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니니코라치우푼타>가 다시 한 번 그것을 일깨워주었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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