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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본 『에세』 완역 심민화 “깊은 상실에서 출발한 행복의 철학… 근대적 개인 호명 순간”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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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8-25 07:30:00 수정 : 2022-08-25 0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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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정년보다 일찍 덕성여대 강단에서 물러난 불문학자 심민화 교수는 최권행 교수를 비롯해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 이때 최 교수로부터 16세기 프랑스의 최고 사상가이자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의 명저 『에세』 를 함께 번역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1990년대 말쯤, 손우성 교수가 1965년 번역한 책(제목은 『수상록』 )을 읽었습니다. 그때 이미 어휘와 문장이 고풍이라 대중적 어법에 어긋나는 부분이 느껴졌지만,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막연히 새 번역이 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제 자신이 번역하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지요.”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서 최 교수와 함께 『에세』 번역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홀수 장은 최 교수, 짝수 장은 심 교수가 각각 번역한 뒤 번역이 끝날 때마다 토의와 수정 보완하기로 계획했다.

 

원문만도 1000페이지가 넘는 『에세』 의 완역은 그야말로 난산이었다. 제1권은 예정대로 진행했지만, 시간과 과정 역시 너무나 길고 요원해서 제2권은 심 교수, 3권은 최 교수가 나눠 번역해야 했다. 번역하는 동안 팔에 테니스엘보가 오기도 했다. 괜히 했구나. 볼펜으로 키보드를 찍어가며 왜 내가 이런 바보짓을 했을까 후회도 했다.

 

그는 간난신고 끝에 15년 만인 최근 몽테뉴의 저작 『에세』 (민음사)를 새롭게 완역, 출간했다. 번역에만 10년이 걸렸고, 검수와 출간까지 다시 그 절반이 소요됐다. 이 사이 부모도, 늘 격려를 아끼지 않던 스승 정명환 교수도 저 세상으로 떠났다.

 

번역이 한창이던 2012년 6월부터 3개월간 딸인 이은지 영화감독과 함께 몽테뉴의 생가이며 그가 은퇴한 뒤 20여 년을 기거하며 『에세』를 쓴 몽테뉴 성을 찾기도 했다. 보르도를 방문한 그때의 모습은 이 감독이 2014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몽테뉴와 함께 춤을」에 고스란히 담겼다.

 

특히 1885년 발생한 큰 화재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몽테뉴 성탑 4층에 있던 서재를 찾았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예배실, 침실과 탈의실, 옷 방을 거쳐 탑의 4층에 오르자 등장한 몽테뉴의 책상, 고대의 금언들이 아로새겨진 서재의 천장,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나는 의심 속에 머문다), 서재 밖에 펼쳐진 푸른 포도원과 강과 멋진 풍경까지.... 마치 몽테뉴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여기가 바로 내 서재야. 난 여기서 글을 쓰고 생각하지. 가장 많고 깊은 시간을 갖는 셈이지. 우리 마을에서 몇 번째 안가는 멋진 서재라고.

 

“보르도 도서관은 또다른 감동을 선사했어요. 은퇴를 앞둔 나이 먹은 사서가 ‘1588년판 보르도본’(몽테뉴가 죽기 직전까지 수기로 첨언했던 개인 소장본) 『에세』 를 들고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몽테뉴 부인이 한 수도원에 맡긴 이래 19세기까지 거기에서 잠자고 있던 보르도본 『에세』 를. 신장 결석으로 고통을 겪던 몽테뉴는 왜 펜을 들어 한자 한자 책을 썼을까요. 소통하고 싶어서였겠지요. 자신의 진솔한 얘기를 들어달라는 호소였겠죠. 그 책은 긴 세월을 넘어서 저에게 호소하는 책이기도 했어요. 그걸 직접 보는 일은 감동이었습니다.”

 

심 교수는 왜 몽테뉴의 명저 『에세』 를 번역해야만 했을까. 도대체 『에세』 와 몽테뉴의 사상은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심 교수는 지난 5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아울러 지난 7월14일 신사역 이봄씨어터에서 있었던 북토크 내용도 일부 녹였다.

 

―15년만의 『에세』 을 새롭게 번역 출간했는데.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작품이었고, 번역을 끝난 이후에도 꽤 시간이 흘러서 책으로 나오게 됐다. 굉장히 기쁘다. 하지만 오랜 세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다보면 한 켠에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런 점에서 기쁘면서도 슬프다. 두렵기도 하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고, 출간할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오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몽테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번역한 것이기에 그런 마음이 잘 전해져 몽테뉴가 친구가 되길 희망한다.”

 

―번역 중이던 2012년 3개월간 몽테뉴가 살았던 보르도와 몽테뉴 성을 방문했다.

 

“70년대 학번으로, 프랑스에 쉽게 갈 수 있던 상황도 아니었고, 재직 중 짧은 연수를 빼면 여유 있게 머물 기회도 없었다. 퇴직한 뒤 마침 기회가 생겨서 갔다. 몽테뉴의 자취를 찾아 가끼이서 느껴보고 싶었다. 당시 딸이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즈음 아버지를 잃었던 제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모습이 보인다. 몽테뉴의 고장이 자연스럽게 몽테뉴의 세계관 인생관으로 나를 이끌어준 것 같다.”

 

―책을 번역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일단 남의 말인데다가 16세기에 쓰인 책이었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16세기프랑스와 현대 프랑스어의 괴리가 우리말만큼 크지는 않아서 도전할 수 있었다. 상당히 ‘구불구불’한 몽테뉴의 문장 스타일도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술이 영혼의 정처 없는 행보를 쫓아가는 일이라고 했는데, 관계대명사나 콜론, 세리콜론 등이 많이 쓰여서 문장이 길어졌고 자주 구불구불해졌다. 문장 호흡이 길고, 급변하는 사고의 흐름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말로 그 변화와 리듬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몽테뉴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을 최대한 전달하려고 노력하되, 독자 스스로의 체험이나 상상력을 방해할 정도까지 간섭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몽테뉴의 『에세』 는 그가 서른여덟 살인 1571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몽테뉴 성 서재에 칩거해 1592년 죽기 전까진 써나간 필생의 작품이었다. 심 교수와 최권행 교수가 이번에 새롭게 번역한 『에세』 는 몽테뉴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1588년판의 개인 소장본 여백에 저자 자신의 손으로 내용을 추가한 ‘1588년판 보르도본’의 번역이다.

 

몽테뉴는 다양한 제목의 에세이 107편을 통해 인간과 세상의 실재를 넘어선 ‘세상 저편 너머’를 추구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온갖 인간 정념과 세상만사를 펜 끝에 소환해서 서로 주장하게 하고 반박하고 논증하게 하는 방식으로 ‘정신적인 개인, 나’를 형성한다. 이를 통해 신분과 가문, 종교 등 외적 범주에 의한 중세적이고 집단적 자아를 탈피해 개인 주도권을 회복하고 비판적이고 주관적 견해를 가진 ‘근대적 주체’로 사는 길로 인도한다. “내 생각들에 대해 나 자신에게도 답하지 못하며 그것들에 전혀 만족하지도 못하는 내가 남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이 에세들은 나의 변덕스러운 생각이요, 그것들을 통해 내가 하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알게 하려는 것이다.”( 『에세』 , 제2권, 10장, 131쪽)

 

―몽테뉴는 왜 『에세』 를 쓰게 된 것인가.

 

“몽테뉴가 공직에서 은퇴해서 인문주의자가 선망했던 사색적 삶을 살아보려 했는데, 온갖 종잡을 수 없고 두서없는 어두운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운 상황에 빠졌다. 은퇴를 즈음해 연달아 겪어야 했던 근친들의 죽음도 원인이었겠지만,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멜랑콜리아(Melencolia)」에서 보듯, 멜랑콜리는 르네상스의 시대적 우울증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 내가 왜 이렇게 됐지. 몽테뉴는 이때 자신의 정신을 한번 붙잡고 연구해야 겠다고 생각했고, 거기서 바로 『에세』 가 탄생한다. 그러니까 그는 변화무쌍한 자신의 생각, 정신의 떨림을 기록하겠다고 마음먹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주제를 던지고 거기에 반응하는 정신의 움직임을 살폈다. 처음에는 비교적 짧은 글로 시작됐고, 자기 정신에 대한 제어가 가능해지면서 3권에 가면 상당히 긴 에세이가 나오게 된다. 에세이라는 형식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신의 갈피 없는 움직임, 현상 그대로 순간을 생생하게 잡아내어 들여다보겠다. 그것이 몽테뉴의 목적이었다.”

 

몽테뉴는 『에세』 제1권과 제2권에서 자신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와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최근에 나는 되도록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오직 편안하고 호젓하게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은퇴했다...하지만 내 생각과는 반대로, 여가가 정신을 사방으로 흐트려, 고삐 풀린 말이 된 정신은 남을 위해 쓰이던 때보다 백배나 잡다한 상념거리를 제게 주어 내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어찌나 많은 악몽과 환상적인 괴물들을 낳아 두서도 목적도 없이 이것저것 쌓아 올리던지, 나는 정신의 어리석음과 기이함을 내 마음대로 관찰하려고 그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에세』 , 제1권, 8장, 81-82쪽)

 

― 『에세』 에는 수많은 인간 정념이 나오더라. 예를 들면, 그는 슬픔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정가라도 매겨진 양 특별한 호의로 그것을 떠받들곤” 한다고 비판하며 “나는 이 정념(슬픔)에 가장 덜 사로잡히는 사람들 축에 속하며, 그것을 좋아하거나 좋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에세』 , 제1권, 2장, 45쪽)거나 “작은 슬픔들은 말하고, 큰 슬픔은 침묵한다”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나는 슬픔에 굉장히 둔한 사람이다, 나날이 그것을 더 둔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몽테뉴는 스스로 말한다. 죽을 것 같은 슬픔의 경계까지 갔던 사람이고, 거기에서 살아나기 위해서 글을 썼다. 슬픔에 무감한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고, 슬픔을 폄훼하거나 모든 슬픔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진짜로 슬퍼본 사람은 슬픔이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기에 슬픔을 가볍게 하고 슬픔을 잠재우는 노력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아주 예민함의 표시인 것처럼, 인식의 깊이 때문인 것처럼, 슬픔을 코에 걸고 귀에 걸고 그걸 자랑하듯 내보이는데, 몽테뉴는 그것을 가짜 또는 얇은 슬픔이라고 봤다.”

 

― 『에세』 의 사상사적 맥락이나 의미,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면.

 

“서구에서 개인이나 나에 대해 구체적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5세기 로마 말기 아우구스티노스가 있다. 중세의 아벨라르, 16세기 르네상스의 몽테뉴가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siones)』 , 아벨라르의 『내 불행들의 이야기』 , 몽테뉴의 『에세』 는 각각 고대 말, 중세,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변천기에 쓰여졌다. 그에 따라, 세계와 인간을 보는 방식, 그 안에서의 자기 인식, 그것을 피력하는 글의 형식 모두 다르다. 몽테뉴는 『에세』 에서 삶과 인생의 사필귀정, 인과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매 순간 새로운 생각으로 태어나는 나를 이야기한다. 나는 나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이다, 매순간 새로운 생각으로 태어나는 나는, 이 연구를 통해 만들어갈 수 있는 나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탐구하며 나를 가다듬는다, 혈연이나 지연, 재산, 신분, 성별 등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에서 나를 찾지 마라, 나의 판단, 나의 견해, 나의 욕망, 그것이 나다.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영구불변한 진리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나의 견해는 내일 또 바뀔 수 있는 견해다, 너 역시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질 자유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엄청난 선언이다. 개인적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근대적 주체, 개인이 호명되고, 근대적 자유가 제청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서구 지성사나 문학사에서 주체의 형성에 대해 연구해보고 싶다.(그렇다면 현대 주체는 어떤가) 우리는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는 방식을 몽테뉴에게서 배웠다. 근대적 주체가 되기 위해선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의심하며, 반론하고, 생각하며, 성찰해야 한다. 하지만 20세기에 매스미디어가 등장해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끌고 간다. 나의 견해와 판단은 끊임 없이 몇 퍼센트로 나오는 통계와 숫자에 영향을 받는다. 여론에 휩쓸리고, 관행에 묻히고, 무이성적 집단으로 이끌려간다.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세력이 스멀스멀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권력이 매스미디어를 장악해 나팔을 불어대면, 또는 솜씨 좋은 자들이 SNS를 통해 현혹하면 사람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듯 그것을 따라간다. 현대에는 오히려 주체가 무너지고 있다.”

 

―왜 『에세』 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까.

 

“몽테뉴의 『에세』 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까닭은 아주 깊은 슬픔, 깊은 상실에서 출발한 책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무작정 아름다운 거야, 라고 그는 말하지 않는다. 가장 친한 친구가 죽고, 아버지가 갑자기 자신의 품에 쓰러져 죽고, 아우가 스물 셋의 나이에 정구를 치다가 죽고, 결혼해서 낳은 두 달된 첫 딸이 죽고, 자신마저 낙마하여 가사상태를 헤메개 된다. 이런 상실을 통과해서 얻어낸 행복의 철학이 바로 『에세』 이고, 『에세』 가 갖는 최고의 힘이다.”

 

슬픔의 끝에서 비로소 희망을 걷어 올린 몽테뉴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세상 저편 너머’가 아닌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나는 춤출 때 춤을 추고, 잠잘 때 잠을 잔다. 그리고 아름다운 과수원 사이에서 홀로 산보를 하노라면 한동안 그 순간과 무관한 일들을 떠올리지만,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산보로, 과수원으로, 홀로 있음의 아늑함으로, 그리고 나 자신에게로 내 생각들을 데려온다.”( 『에세』 , 제3권, 13장, 592쪽)

 

―도대체 몽테뉴는 어떤 사람인가.

 

“몽테뉴는 사소한 데서도 글감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경험 하나하나가 대단한 무게를 지녀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오만 가지 측면, 수많은 행태에 흥미를 가지고 들여다보려고 했던 사람, 그것들이 모두 인간에 대한, 따라서 자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알려준다고 생각한 사람, 타인을 연구하는 것이 자기를 연구하는 것이 된 사람이다. 우리는 보통 나와 다르거나 껄끄러운 사람을 만나면 나보다 못난 사람이라며 쉽게 지우고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지만, 몽테뉴는 그렇지 않다. 독일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 독일 사람인 척하고 다니다가 코까지 차마 가릴 수 없어서 들통 났던 사람이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석사과정 대학원생 심민화는 스승 김붕구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이날 김 교수에게서 책 한 권을 건네받았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숨겨진 삶과 문학 이야기를 담은 셀레스트 알바레의 책이었다. 김 교수로부터 딱히 책을 번역해 보라는 말을 듣진 않았다.

 

그런데 책 내용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집필하는 8년 동안 그를 극진히 간호했던 여인 알바레, 프루스트 사후 50여 년이 지난 여든 둘의 그녀가 프루스트와 보낸 시절을 회고하는데.... 책에 빠져든 그는, 어느 순간 책을 번역하고 있었다.

 

번역을 마치자 번역 원고를 보자기에 싸서 출판사 홍성사를 찾아갔다. 출판사에는 작고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씨가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황 평론가는 그의 번역 원고를 좋아했고, 곧 책으로 출간됐다. 1978년, 『프루스트 뜨거운 삶』 (제목은 이후 2003년 『나의 프루스트씨』 로 바뀌어 시공사에서 출간됐다)이 홍성사에서 번역 출간됐다. 불문학자 심민화의 번역과 학문 세계의 원점이었다.

 

심민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서산의 심씨 집성촌에서 공무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2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자신과 동갑인 친척이 무려 십여 명에 이른 것을 보고서, 그는 나중에 생각했다. 종으로서 위기의식이 이렇게 만드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소녀 심민화는 비교적 안온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나중에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한 아버지는 운전사까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면 특정한 화두나 명제를 던지며 밥상머리 토론을 유도했다. 소녀 민화를 비롯해 온 가족은 물론 사촌이나 당숙까지 모두 참여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사범학교를 나온 어머니는 문학소녀로 한 달에 한 번씩 동창 7, 8명과 만나 독서 토론을 하곤 했다.

 

고교 시절 문학반 특활과 교내 신문기자로 활동한 학생 심민화는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문학 소녀였다. 대학에서 주최한 백일장에 참가해 상을 받기도 했다. 친구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음에도, 그는 수학 점수가 제일 좋았다는 이유로 이과에 진학했다. 의대 진학을 꿈꿨다.

 

하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그는 어머니와 담임교사의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시집을 가서 ‘안온,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의사가 감당해햐 할 스트레스를 거론하며 극력 만류했는데. 그가 고집을 꺾지 않자, 어머니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너, 수술할 수 있니?”

 

과연 날카로운 칼을 들고 부드러운 살을 찌르고 자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수술은커녕 주사도 놓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을 획, 하고 바꿔 먹은 그는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서울대 진학을 반대하는 것 아닌가. 여대에 가거라.

 

눈물 바람 끝에 1970년, 그는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이휘영, 김붕구, 정명환 교수 등으로부터 문학을 배웠고 이들의 관심과 격려 속에 학문과 번역, 교수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원대한 계획 없이,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프루스트 뜨거운 삶』 을 번역한 이후 그는 『방랑하는 여자』 (1979), 『현상학이란 무엇인가』(1982), 『새벽의 약속』 (1985), 『비평의 역사와 역사적 비평』(1993),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2008), 『에세』 (2022) 등을 번역 출간했다.

 

그는 특히 서울대 불문과 교수였던 문학평론가 김현으로부터 피에르 테브나즈의 책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를 번역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는 현상학이 문학과 철학을 비롯해 학문 전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때. 현상학을 배우고 공부하면서, 1982년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를 번역 출간했다. 얼마 뒤 김현으로부터 제라르 댈포와 안느 로슈가 쓴 비평에 관한 책 『비평의 역사와 역사적 비평』 도 번역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책을 번역하면서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1993년 『비평의 역사와 역사적 비평』 을 번역 출간했다. 문학과 관련 있는 책들을 잇따라 번역하면서, 그는 어느 새 문학 연구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원대한 계획 없이,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와 『비평의 역사와 역사적 비평』 등을 번역하면서 자연스럽게 20세기 소설가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관문 같은 것을 통과한 것 같습니다. 번역한다는 것은 찬찬히 읽는다는 것이고, 공부가 많이 되죠.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선 저를 가르치는 일이었어요. 문학 관련 작품들을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학자로서의 어떤 자각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아요. 김현 선생께서 이 책들의 번역을 권하신 데에는 그 같은 격려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번역을 해 왔는데, 번역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작품이 있다. 원 제목은 Lost In Translation(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인데,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제목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말은, 언어가 마음을 100% 표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 영화의 제목은 번역자의 가장 큰 고민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우선 내 앞의 원본은 작가라는 발화자가 자기 생각, 마음을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번역이란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언어’로 번역한 발화자와, 그 발화자와 전혀 다른 조건에 있는 수신자(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일이다. 나는 원본의 서술을 통해 그 이면에서 움직이는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유추해야 하며, 그가 사용한 언어의 여러 의미 중에 가장 적합한 것을 골라야 하고, 그것을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독자의, 체계가 전혀 다른 언어로 바꿔 전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번역자는 두 번, 저 영화의 원어명 로스트 인 트랜스레이션, 직역하면 ‘번역이 놓친 것’에 대한 강박적 의식에 시달린다. 번역자는 겹쳐지지 않은 지도를 들고 두 언어를 헤매는 탐험가, 방랑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은, 특히 문학에서는 이롭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위안이 있다. 번역이 ‘놓친 것’이 만드는 여백이 독서의 자유를 허락하고 그 자유가 해석의 풍부함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의 구체적 원칙이나 방법이 있다면.

 

“처음에는 끝까지 빨리 번역하며 전체적인 구도를 이해한 뒤, 다시 처음부터 원문과 대조하면서 정확하게 번역한다. 처음부터 또박또박 한 문장 한 문장 정확을 기하면서 번역하고 싶어도 처음엔 정확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기에 불가능하다. 먼저, 첫 번째 빨리빨리의 과정에서는 원어에 더 치중하며 작가와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읽어내되, 너무 진을 빼지 말고 쭉 나가야 한다. 초벌 번역이 끝나고야 키워드가 나온다. 다음으로, 두 번째 번역에선 번역어에 더 치중하여 실팍하게 번역어와 문장을 다듬으며 조바심 내지 말고 해내야 한다. 두 번째라고 한 과정은 사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과정이 된다. 조바심 내거나 작가의 대변인이 되어 설명적이어서도 안된다. 그런 것을 잘 제어해야 한다. 무엇보다, 작가를 사랑해야 한다. 번역자 역시 작가 못지않게 꼭 읽혀주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되,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최대한 투명 인간이 되려 해야 한다. 불가능하지만. 너무 몰입해 기력을 소진해도 안되고, 너무 시큰둥하고 열정 없이 그저 문법사전의 예문들처럼 무뚝뚝하게 옮기는 것도 안된다.”

 

1987년 라신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겨우 스물여덟이던 1980년부터 덕성여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당시에는 박사학위를 아직 받지 못한 때여서, 그의 표현대로, “운이 좋았다”. 1987년 책 『라신 비극 연구』를 시작으로 『문예사조의 새로운 이해』(공저), 『사르트르의 문학적 세계』 (공저), 『프랑스 고전문학연구』 (공저), 『라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공저), 『프랑스 연극과 영화』(공저), 『코르네유 인간학의 희극적 기원』 등을 차례로 저술했다. 학문 여정은 한동안 비극으로 유명한 라신으로, 라신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희극으로 유명한 꼬르네유로, 다시 몽테뉴로 옮아갔다. 2006년 퇴직한 그는 덕성여대 명예교수로 활동 중이다.

 

―오랫동안 덕성여대에서 강의했는데.

 

“대학자가 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교수가 된 것은 운이 좋았다. 덕성여대에선 주로 고전 문학을 가르쳤다. 재학생 중에는 종로에 직장을 가진 ‘나이든 학생’들도 많았는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하려 애쓰는 학생들과 문학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선생으로서 희열을 느꼈다. 퇴직 후에도 이른바 일류 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나이가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괴리감 같은 걸 느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은 수능 성적과 관계가 없는 것 같더라. 논문을 쓰고 책을 낸 것은 나 학자요, 해서 한 게 아니라 더 진지하게 공부해볼 거야,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공부를 더 해야지, 하는 생각이 만든 결과였다. 힘들게 유학가서 공부하고 왔는데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후배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2006년 일찍 교직을 그만뒀다. 공부하는 데 꼭 대학 교수여야 할 이유는 없다.”

 

―앞으로 계획은.

 

“번역이 끝나서 책 한 권이 나오면 스스로 약속한다. 다시는 번역하지 않기로. 우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어겨가며 다시 번역하는 건 텍스트가 저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런 텍스트가 또 나올까. 나오면 또 질 것 같기도 하다. 제대로 공부하고 글 쓸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10년 정도. 10년 동안 즐겁고 행복하게 느긋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약간 괴롭지만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살 것이냐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건강이나 일상은 어떤지.

 

“특별히 좋지 않는 곳은 없지만,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몸무게가 많이 빠졌다. 일단 주부의 일이 끝난 시간부터 고요하고 좋다. 요즘 잠자는 시간이 자꾸 늦어지고, 설핏 깨는 게 많다.”

 

“공부를 잘 했겠죠.”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공부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말끝을 올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마치 남 이야기하듯.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던 이야기를 할 때도 역시. “요란하게 쓰지 마시고, 그냥 끼적거려 보기도 했다고 해주세요.”

 

하지만 자신이 오래 경험한 대학 교수의 실체를 이야기할 땐 서늘한 단어를 얼마나 분명하고 날렵하게 던지던지! 마치 노련한 도수부가 잘 버려진 칼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휘두르듯. “뭐 세상에서 좀 우러러 봐주는 측면이 있긴 하죠. 그런데, 그거 다 가짜예요.”

 

비록 북 토크와 인터뷰 단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번역가이자 불문학자 심민화는 인간의 수많은 정념과 세상만사에 대해 분명했고, 명석했으며, 개성이 뚜렷했다. 어쩌면 그야말로 몽테뉴가 『에세』 를 통해 탄생시킨 근대적 주체였다. 세상의 모든 신분과 가문, 종교, 성, 이념 등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 주도권을 분명히 회복하고, 비판적이며, 주관적 견해를 가진 진정한 주체....이 순간, 그는 어쩌면 여전히 묻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


김용출 선임기자,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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