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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학살에서 탄생한 인간을 통해 폭력의 역사 끌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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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7-05 20:42:36 수정 : 2022-07-11 10: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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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발 없는 새’ 펴낸 정찬

장국영 ·첸카이커 영화서 영감
죽을 때에야 땅에 앉는 새처럼
비극적인 인물 워이커씽 창조
문화대혁명 등 中현대사 통찰

동아시아 역사 문제 해결위해
가해자·피해자 마주하길 바래

삶도 결국 시간 속에서 흘러가
시간을 견디는 소설 쓰고 싶어

1937년 12월, 중화민국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 군인들은 중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일여 난징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른바 ‘난징학살’이었다.

소설가 정찬은 난징학살을 모티브로 역사적 비극 속에 탄생한 인물 워이커씽과 베이징 특파원인 ‘나’를 등장시킨 단편 ‘오래된 몽상’을 2008년 한 문예지에 발표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국가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건 무엇보다도 역사의 진실과 대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나온 작품으로, 2013년 소설집 ‘정결한 집’에도 수록됐다.

작품을 문예지에 발표하고 소설집에도 실었지만, 문제적 인물 워이커씽은 계속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원고매수 100매 미만의 단편소설로 다루다 보니 워이커씽의 생애를 제대로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부터 워이커씽의 생애와 생각이 궁금했다. 그는 어떻게 그 모진 시대를 살아왔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으며, 어떤 방법으로 태생의 고통을 견뎌냈을까. 워이커씽을 역사적인 비극을 파고들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오랜 시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워이커씽이 뚜벅뚜벅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역사와 사회적 폭력 속에서 인간 구원을 치열하게 탐구해온 작가 정찬이 열 번째 장편소설 ‘발 없는 새’(창비)를 펴냈다. 작품은 난징학살과 문화대혁명 등 역사적 폭력을 배경으로 문제적 인물 워이커씽의 존재론적인 아픔을 서늘하게 담았다.

소설은 2003년 베이징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는 ‘나’가 영화배우 장국영의 죽음 소식을 접하며 시작된다. ‘나’는 난징학살 심포지엄에서 만난 워이커씽이 장국영과 영화 ‘패왕별회’의 감독 첸카이커와 깊이 교류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유령처럼 느껴지던 워이커씽의 삶에 다가서게 된다. 이야기는 난징학살을 다룬 논픽션을 발표한 뒤 일본 극우세력의 비난과 협박에 시달리던 아이리스 장이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점차 가파르게 전개된다.

 

“악을 이해할 수 없으면 그 악을 행한 이들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니까요. 사람에서 벗어난 어떤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어떤 짓을 해도 허용이 되는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해요. 일본군이 난징에서 중국인을 그렇게 했잖아요. 그래서 전 난징학살의 악을 이해하는 행위를 포기할 수 없어요.”(162쪽)

소설 제목 ‘발 없는 새’는 영화 ‘아비정전’ 속 장국영의 대사에서 나오는 새로, 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해서 자신이 죽을 때에야 땅에 내려앉는다고 한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바람처럼 떠밀리듯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의 슬픈 운명을 상징하는 듯하다.

중견 작가 정찬은 어떻게, 그리고 왜 문제적 인물 워이커씽을 창조해야 했을까. 워이커씽에게서 그는 무엇을 본 것일까. 정 작가를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대학로 커피숍, 그러니까 옥상처럼 툭 터져 있는 2층에서 만났다.

―문제적 인물 워이커씽은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

“영화 ‘패왕별희’를 보고 난 뒤에야 정국영이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첸카이커 감독의 역사적인 경험, 특히 소년 시절 경험이 투영됐다는 것을 느꼈다. 첸카이커의 자전적 에세이 ‘나의 홍위병 시절’을 읽고 나니 ‘패왕별희’가 전과 다른 시선으로 보이더라. 첸카이커의 트라우마가 영화의 커다란 동인이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난징학살의 비극 속에서 태어난 워이커씽 생애를 쓰려면 중국 현대사를 비켜 나갈 수 없었다. 다만 워이커씽만으로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끌고 가기 힘들었는데, 중국 역사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패왕별희’를 보면서 어떤 연결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국영의 죽음에서 시작해 영화 ‘패왕별희’와 첸카이커의 자전적 에세이를 거쳐서 중국 현대사와 워이커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워이커씽은 매력적이고 매우 문제적인 인물인데.

“역사를 소재로 했지만 워이커싱이라는 인물의 궤적이야말로 소설의 서사를 이끌고 있다. 이 소설을 제대로 쓰려면 워이커씽의 영혼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징학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이미 다 나와 있기 때문이다. 워이커씽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독자들은 비로소 어떤 기록을 넘어서서 자신과 관계되는, 같이 들여다봐야 하는 비극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된다.”

―워이커씽은 동아시아 역사문제 해결 방안으로 가해자의 분명한 고백을 전제로, “장자와 나비의 관계를 역사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적용”(240쪽)하는 이른바 ‘장자의 나비론’을 주장하는데. 독특하다.

“아이리스 장은 가해자가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서 희생자와 가해자가 한 공간에서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을 간절히 원했다. 그녀가 책을 쓴 것도 일본을 고발하는 측면도 있지만, 가해자와 희생자가 만날 수 있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 같다. 아버지가 가해자이고 어머니는 피해자였던 워이커씽 역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안 되니까 장자의 나비를 통해서 꿈을 의탁한 것이다.”

―이번 작품은 유독 대사가 많은 느낌인데.

“만약 워이커씽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소설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고, 워이커씽에 대한 신비감은 뚝 떨어질 것이다. 1인칭 ‘나’의 눈을 통하기 때문에 ‘나’가 볼 수 없는 워이커씽이 있게 된다. 그게 독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 장편은 1인칭 소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인칭이 되면 ‘나’의 입장에서 벗어난 서술을 하지 못한다. 결국 어려운 지점은 대화를 통해서 끌어가야 했다.”

 

―이번 소설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제 소설에 대해 관념적이고 어렵다, 읽기가 쉽지 않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이번 작품은 읽는 재미가 다른 소설에 비하면 훨씬 클 것이다. 그것은 워이커씽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파란만장한 인생, 서사적 인물이어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요동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했지만, 역사가 워이커씽을 이끄는 게 아니라 워이커씽이야기로 이야기를 이끌고 간다.”

1953년 부산에서 출생한 그는 1983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중편소설 ‘말의 탑’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로 ‘세상의 저녁’, ‘황금 사다리’, ‘골짜기에 잠든 자’ 등을, 소설집으로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새의 시선’ 등을 펴냈다.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앞으로 어떤 작가,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삶이라는 것도 결국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책 역시 시간을 못 벗어난다. 언제나 하는 얘기이지만, 시간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커피숍에서 간단히 사진 몇 컷을 찍은 뒤, 우리는 만석이어서 들어가지 못한 ‘학림다방’으로 되돌아갔다. 비록 그곳에서 인터뷰는 하지 못했지만, 사진만이라도 찍기 위해서였다. 손님들이 학림다방을 연신 드나드는 속에서도, 그는 포즈 취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부끄럼 없이, 무상하게, 사진이 잘 나올 때까지. 비가 긋다가 자주 그치던 그날,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포즈를 취한 사람이야말로 소설가 정찬이었다. 잘 써질 때야말로 가끔이고 안 써질 때가 대부분이라는,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견뎌내는,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문제적 인물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것을 영접하고야 마는.


글·사진=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정찬 소설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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