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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겐 死각지대… ‘세상의 문턱’ 고발하다

입력 : 2022-04-19 21:00:00 수정 : 2022-04-19 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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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비장애인 함께 찍은 영화 ‘복지식당’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 된 주인공
홀로 걷지 못하는데 ‘경증’ 판정
재심사 받기 위해 행정소송 나서

4급 장애 정재익 감독 경험 바탕
복지제도 모순·주변 착취 등 짚어
“우리 시선 통해 세상 편견 깨길”
정재익(오른쪽)·서태수 감독이 공동 연출한 영화 ‘복지식당’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들의 현실을 그린다. 4급 장애인인 정 감독은 “장애인의 시선을 통해 세상의 편견을 깨는 새로운 눈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디스토리 제공

불의의 사고로 하루아침에 중증 장애인이 된 주인공 강재기(조민상 분)는 휠체어에 앉아 계단 위를 멍하니 바라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저 하염없이 올려다볼 뿐이다. 재기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돌아선다. 신체 장애는 삶의 장애가 됐다. 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재기에게 계단은 가닿을 수 없는 우리 사회 문턱이다.

영화 ‘복지식당’은 수많은 장벽을 마주한 장애인 현실을 보여주며, 국가와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장애인의 날인 20일,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장애인 이동권 문제뿐 아니라 장애 등급제, 일자리, 활동보조서비스 등 다양한 복지제도 모순을 들여다볼 수 있다.

누가 봐도 중증 장애인인 재기에게 국가가 부여한 장애등급은 ‘5급’이다. 혼자 힘으로는 몇 걸음 갈 수 없고, 왼쪽 손은 덜덜 떨려 물건을 들기 어려운 상태지만 복지 체계에선 그를 경증 장애인으로 분류한다. 그 탓에 전동 휠체어도, 장애인 콜택시도, 취업 혜택도 지원받지 못한다. 상황을 설명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상 똑같다. “규정이 그렇습니다.” 허술한 제도 탓에 사각지대로 밀려난 재기의 모습은 관료적 복지시스템이 불러 온 사회적 약자들의 비극을 그린 작품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닮았다.

재기는 장애 등급을 재심사받기 위해 행정소송을 시작한다. 그는 영화 처음과 마지막에서 모두 판사에게 호소한다. “앞으로는 취직도 해서 돈도 벌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인 콜택시도 꼭 필요합니다. 부디 제가 자립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재기가 맞닥뜨리는 문제들은 실제 4급 장애인인 정재익 감독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정 감독 역시 과거 사고를 당해 중증 장애인이 됐지만, 장애인 등급제 벽에 막혀 제대로 된 복지를 누리지 못했다. 1∼6등급으로 나뉜 등급제는 2019년 폐지됐으나 이전에 받은 등급으로 인해 처지는 그다지 나아진 게 없다. 사고 이전 간호사로 근무했던 정 감독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역시 마음속으로는 장애인을 낮잡아봤다. 막상 장애인이 돼 보니 장애인들이 이해가 갔다”며 “사회에서 가해지는 차별이 장애, 그리고 장애인을 만드는 것 같다.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 복지 제도와 장애인을 이해하고 배려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장애인 단체 영화제작 워크숍에서 만난 서태수 감독과 의기투합해서 공동 연출로 영화를 만들었다. 서 감독은 연출 경험이 거의 없는 정 감독을 도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는 “카메라가 위치한 계단 위는 재기가 도저히 갈 수 없는, 혹은 언제 갈 지 모르는 공간이자 목표지점”이라며 “이 모든 상황이 사실 계단 때문에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비장애인에게는 약간의 불편함이지만 장애인에게는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서 감독은 “늘 이맘때가 되면 장애인 이동권이 이슈가 된다”며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거나 다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혐오와 차별을 활용하는 사회 전체가 문제다. 장애인들이 왜 계속해서 길거리로 나와서 투쟁해야 하는지 장애인 목소리를 더 경청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영화 촬영 당시, 장애인 콜택시를 타지 못한 정 감독이 현장에 오지 못해 촬영이 중단된 적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복지식당’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사회에 ‘재기’하려는 주인공 의지를 꺾어놓는 것은 복지제도 허점뿐 아니라 주변 인물 착취이기도 하다. 장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재기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장애인 단체 내에서 파벌을 활용해 군림하는 인물 병호(임호준 분)를 통해 장애인 사회의 폐쇄성을 고발하기도 한다. 영화는 입체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사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선한 약자’로 분류된 장애인이 시혜와 동정으로 무장한 차별적 시선에서 한 발짝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두 감독이 처음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점도 장애인 스스로 가진 편견이었다고 한다. 정 감독은 서 감독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질 것이라는 주변 장애인 말을 듣기도 하고 손가락질도 당했다. 주변 괄시와 비웃음에도 이들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부가 우리 영화를 보고 정책을 만들 때 장애인 사회 안으로 들어와 소통해야 한다는 걸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대충 만들 게 아니라 우리 이야기를 경청해 실제로 필요한 부분을 반영해야 한다는 걸요. 화장실에 들어갈 때 보면 높이 3㎝ 턱이 있어요. 그 턱만 없애도 장애인 세상은 완전히 바뀝니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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