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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하던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봐도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거나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없지 않다. 이 느닷없는 부진의 시간을 우리는 슬럼프라고 부른다. 슬럼프에 빠졌다, 슬럼프인가 봐, 슬럼프가 올까 봐 두려워. 우리는 꽤 자주 이 말을 입에 올리고 사는 편이다. 언어의 주술효과라고 할까.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렇지 않았던 사람마저 그렇게 되기도 한다. 고약한 경우다.

글쓰기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이 끔찍한 시간을 가장 심각하게 겪는 사람들이 글 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20대에 이미 자신의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김승옥 선생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일간지에 만화를 연재하기도 하고 자신의 소설을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하기도 하는 등 소설 이외의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던 선생은 1980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먼지의 방’을 신군부의 검열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중단한 이래 최근까지 거의 절필에 가까운 나날을 이어가고 있어 후배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갓 등단한 수상자들에게 최수철 선생이 했던 축사도 잊을 수 없다. 1981년 등단한 이래 수십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들을 펴내고 프랑스문학 전공자로서 여러 권의 번역서를 선보인 그가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뜻밖에도 슬럼프와 관련한 고백이었다. 선생은 얼마 전까지 지독한 슬럼프로 고생했는데 그 시간 내내 다시 글을 쓰지 못할 듯한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문학평론가

우리는 모두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 대가들도 예외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시간이야말로 삶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이쯤에서 돌아가신 우리 엄마의 혜안을 빌리고 싶다. 엄마는 실수가 두려워서 가능한 한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 나에게 늘 하던 대로 하라고 하셨다. 뭘 더 하려고 하거나 잘하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매번 그게 쉽냐고 항변하곤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만큼 위안이 되는 이야기도 없었던 듯하다. 뭘 더 하려고 하거나 잘하려고 하는 순간 긴장하게 되고, 긴장하는 순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일을 망치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던 대로 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하던 대로 하려면 적어도 하던 대로 해오던 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이 꾸준한 성실성에 대한 자책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캐리’ ‘그린 마일’ ‘미저리’ 등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영화들의 원작자로 유명한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일중독에 가까운 자신의 집필 스타일을 소개하며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양의 소설을 써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고 자평(뻥)한다. “예전에 인터뷰 기자들에게 나는 크리스마스와 독립기념일과 내 생일만 빼고 날마다 글을 쓴다고 말하곤 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나는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남들이 얼간이 같은 일벌레라고 부르든 말든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쓴다. 크리스마스와 독립기념일과 내 생일도 예외일 수 없다.”

하던 대로, 날마다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 이 대목에서 스티븐 킹이 소개하는 이 방면의 대가를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듯하다. 앤서니 트롤로프라고 하는 19세기 영국 작가는 엄청난 대작들을 써낸 것으로 유명한데 낮에는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면서 아침 출근 전 항상 2시간30분 동안 글을 썼다고 한다. 이 규칙은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했다. 2시간30분이 지나면 어떤 문장을 쓰는 도중이라 하더라도 글쓰기는 중단됐다. 6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완성했는데도 아직 15분이 남았다면 그는 원고에 ‘끝’이라고 쓰고 옆으로 밀어 놓은 뒤 다음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희화화된 일화는 마냥 19세기식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날마다 새로운 정부 시책들이 쏟아져나오는 이즈음, 이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그의 완고하고 맹목적인 규칙 준수가 새삼 그립다. 하던 대로, 늘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꾸준하게 일해나가기. 사람 사는 일은 21세기라고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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