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 “키예프서 부분 교전 벌어져”
우크라 “중립국 방안 포함 회담 원해”
러 “우크라軍 무기 내려놓으면 협상”
폴란드·헝가리로 필사의 탈출 행렬

25일 새벽 4시(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캄캄한 밤하늘을 밀어내고 불현듯 나타난 섬광이 땅으로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공중에서 요격된 전투기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추락했고, 땅에선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비명을 지르듯 울려퍼졌다.
러시아군 기갑부대는 공습 시작 24시간도 안 돼 키예프 30㎞ 근방까지 진격하며 숨통을 조여왔다. 키예프를 에워싼 러시아군은 공습 둘째날 동이 트기도 전에 곳곳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러시아 관영 매체는 “아직 수도에 대한 공습은 시작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CNN과 BBC 등 서방 언론은 “부분적으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키예프 주요 진입로 네 곳에서 방위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오늘(25일) 오후면 러시아군이 탱크를 앞세워 수도로 진격할 것 같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전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은 순간부터 키예프 함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우크라이나 동쪽 돈바스 지역에서는 친러 분리주의 반군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방어선을 뚫고 진격하고, 우크라이나 남부에선 크림반도를 통해 러시아 공수부대 등이 입성했다. 우크라이나 북부에 있는 체르노빌 원전도 러시아 손에 넘어갔다. 1986년 폭발 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 원전은 군사적 요충지는 아니지만 키예프로 가는 길목에 있어 러시아군이 제일 먼저 노린 곳 중 하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탄식했다.
“군인과 민간인 137명을 잃었다. 부상자는 316명이 나왔다. 우린 홀로 남겨져 나라를 지키고 있다. 누가 우리와 함께 러시아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키예프가 곧 함락될지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날 오전 우크라이나가 ‘중립국’ 카드를 내밀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로이터통신에 “우크라이나는 평화를 원하며 중립국 방안을 포함해 러시아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중립국 안을 포함해 모스크바와의 회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화를 추구한다”고 전했다. 이번 전쟁의 직접적인 빌미가 된 ‘나토 가입 추진’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단, ‘우크라이나군이 무기를 내려놓는다’는 조건에서다.

키예프 주요 도로는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차량들로 마비됐고,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헝가리에는 난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난민이 된 우크라이나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키예프의 한 지하철역에 요가 매트를 깐 채 망연자실해 있는 한 주민은 “지금 키예프는 거대한 공포심으로 가득 차 있다”며 “모두가 이 도시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분노도 극에 달한 상황이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헝가리 국경에 도착한 타마스 보드나르는 24일 AFP 인터뷰에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할 수 있다면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접경 폴란드 도시인 프세미시우에는 이날 오전 우크라이나 국민 수백명을 태운 열차가 도착했다. 헝가리 국경 자호니 검문소에도 수십명의 우크라이나인이 몰려들었다. 루마니아로 넘어간 우크라이나 국민도 수백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는 대규모 난민 유입이 예상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9곳의 리셉션 센터(난민수용소)를 열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하면서 자연스레 폴란드의 역할도 커졌다. 러시아와 오랜 갈등 관계인 폴란드도 이를 의식한 듯 자신들의 입지를 키우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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