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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인생이 울 때 詩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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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2-18 22:38:23 수정 : 2022-02-18 22: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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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혹독했던 중년들
뒤늦게 시에 매료돼 펜 들어
인생의 굴곡 숨기지 않은 채
진정성 가득 담아 작품 완성

괴테의 말년 조수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은 1823년부터 1832년까지 10여년 동안 1000회가량 괴테의 집을 방문하여 인생과 예술을 주제로 괴테와 대화를 나눴다. 에커만이 이 대화를 기록하고 정리한 책이 ‘괴테와의 대화’인데, 여기에 이런 부분이 있다. “세상은 넓고 풍부하며, 인생은 너무나 다양하므로, 시를 쓰고자 하는 동기가 없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네. 하지만 모든 시는 어떤 계기에서 쓰여야 하네. 다시 말해 현실이 시를 쓰기 위한 동기와 소재를 제공해 주어야 하는 걸세. 어떤 특별한 사건도 시인이 그것을 다룰 경우에만 비로소 보편성을 띠며 시가 되는 법이네.” 이렇듯 괴테는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이 부여한 모티브로부터 아름답고 생생한 전체를 형성해 내는 것이 시인의 할 일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특강을 다니다 보면 삶의 체험이 혹독했던 중년들이 뒤늦게 시에 매료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삶의 의미에 깊은 이해가 생기는 나이에 자신의 다양한 인생 체험을 시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최근 2년 동안 나는 작은 서점인 청색종이에서 문체부 지원사업으로 시 창작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수업이 종종 줌으로 진행되기도 했지만 수강생들과의 소통은 참으로 훈훈했다. 그들은 자신의 창작 동기를 스스럼없이 얘기하며 삶의 굴곡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시에 어쭙잖게 조언을 하는 것이 미안할 만큼 그들은 자신의 삶을 진정성 있게 꾹꾹 눌러 담아 시를 썼다.

천수호 시인

이 프로그램에 항상 먼저 도착하는 분은 멀리 인천에서 오는 분이다. 교통사고로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삶의 이력은 누구보다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일찌감치 책상을 정돈하고 강의자료를 나눈다. 놀라울 정도로 몸이 먼저 움직이는 모습에서 그 삶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낀다. 그녀의 시는 리듬이 좋고 발랄하지만 가끔 남편과 나눈 별사를 만나기도 한다. 공식처럼 두 번째로 들어오는 분은 여든을 훌쩍 넘기신 노신사다. 항상 단정한 차림과 점잖은 언행으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생 서로를 돌보며 함께 산 도우미를 잃고 기진한 상태에서도 시를 쓰는 분이 있고, 공무원 생활을 퇴직하고 시골 마당 그득 꽃을 가꾸며 노모와 함께 사는 분도 있다. 전국을 걷고 또 걷는 분도 있고, 중년이 되도록 서로 응원하며 사는 세 분의 여고 동창생도 있다. 신춘문예의 늦꿈을 키우는 분도 있고, 정신분석 공부에 몰입하는 여성 사업가도 있다. 그러나 항상 늦게 들어오는 분은 정해져 있다. 거동이 불편해진 남편을 25년간 돌보며 칠순이 넘어 문학치료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이다. 남편을 챙겨놓고 와야 하니 늦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쓰는 시가 대작(大作)이 아니면 어떠랴.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그윽하고 소중하다.

최근에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작품은 2021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했다. 다이버이자 영화감독인 크레이그 포스터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고향인 남아프리카의 바닷속에서 문어의 삶을 지켜보며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문어와 그의 유대감,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는 생존전략, 새끼들을 위한 희생정신까지 이어지는 이 영화의 말미에 그의 내레이션이 감동적이다. “야생동물의 삶이 얼마나 유약한지 이해함으로써 이 땅에 사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약한지 알 수 있죠. … 야생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눈앞에 이야기가 펼쳐지죠. 저는 문어에게 매료됐을 뿐만 아니라 문어가 상징하는 야생의 세계를 사랑하게 됐고 달라진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우리도 매일 이렇게 야생의 삶 속에서 유약하게 살고 있다. 이 야생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 이야기를 시로 쓰고 또 그 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스스로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야생의 모든 순간은 아름답고 인생은 너무나 다양하므로 비로소 우리는 시를 쓰고자 한다. 참 신기하게도 인생이 울 때 시는 잘 써진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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