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그냥 약한 채로, 모순된 채로, 온기 나누자는 게 저의 휴머니즘”

입력 : 2022-02-09 05:00:00 수정 : 2022-02-08 21:30:36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 들고 돌아온 작가 은희경

뉴욕 배경 낯선 곳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나를 발견하는 이야기 담아
제목의 의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혹시 편견이 아닌가 생각해 보자는 의미

지금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살고 있기에
이전 소설에 비해 따뜻하게 쓰려고 신경
딱히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 것 보다
앞으로도 유효한 질문 계속 던지고 싶어
중견 소설가 은희경이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연작 소설집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어떤 모순 같은 걸 얘기하고 싶었다”며 “그냥 약한 채로, 모순된 채로, 서로 온기를 나누자, 이런 게 제 방식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남정탁 기자

이러다가 정말 소설을 못 쓰는 거 아냐, 하고 작가들이 많이 하는 엄살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한 건 그 즈음이었다. 2019년 가을, 새로운 마음으로 단편소설을 다시 쓰려 했지만 잘 써지지 않았다. 5년간 매달려 왔던 장편소설 ‘빛의 과거’를 그해 여름 펴낸 뒤였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괴롭고, 불안했고, 초조했다. 가을에는 이미 시작했어야 했는데, 겨울은 이미 성큼 다가왔는데, 마감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그래, 일단 급하니까, 내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쓰자. 자신이 잘 아는 얘기를 쓰는 게 소설의 기본자세 가운데 하나잖아. 그렇다면 뭐가 있을까… 내가 잘 아는 얘기라면, 음, 그래! 뉴욕 얘기를 쓰자.

생각해 보면, 그는 지인 K가 미국 뉴욕에 사는 동안 그곳에 자주 갔었다. 2008년 K가 뉴욕 소재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왕래하기 시작한 이래, 10여년 동안 경험과 사유의 지층 역시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리하여, 중견 소설가 은희경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첫 단편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문예지 2020년 봄호에 발표할 수 있었다.

은희경은 뉴욕을 배경으로 두 번째, 세 번째, 팬데믹으로 끝나는 네 번째 작품을 차례로 쓴 뒤, 이번에 연작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문학동네)’로 묶어냈다. 그의 일곱 번째 소설집. 세 번째와 네 번째 작품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소설집에는 어떤 낯선 조건에서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보는가를 날카롭게 묘파한 ‘뉴욕 4부작’이 담겼다.

“여행이나 낯선 조건은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소설적 소재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기에 완전히 저를 다시 ‘프로그램’해야 하거든요. 어, 내가 이런 사람이었어? 하는 순간도 많고, 작가가 된 때부터 꾸준히 관심을 가졌던 내가 누구인가, 타인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테마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죠. 결국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떤 낯선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부딪히면서 나를 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가 더욱 놀라운 점은, 불황기를 넘어 출판 빙하기임에도 1995년 발표된 그의 첫 장편 ‘새의 선물’이 현재 99쇄를 찍었고 5월쯤 100쇄를 돌파할 것이 확실시되는 등 독자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는 데다가, 중견 작가임에도 여전히 혁신을 모색하며 소설의 밭을 갈고닦고 있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이렇게 오랜 시간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을까. 그가 펼쳐온 소설과 문학의 진경은 어떠한 것이고, 그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은 작가를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소설집의 첫 단편인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비정규직이었던 승아가 열흘 정도 머물 계획으로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 민영의 집으로 오면서 시작된다. 승아는 친구를 위해 애써 집안을 청소하고 해독주스를 만들지만, 민영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긴장이 고조된다.

―두 인물이 서로 좋은 의도로 행동하지만, 서로 자꾸 어긋나는데.

“인간은 모두 다른 존재인데도, 특히 가깝거나 사랑하는 관계일수록 자신의 방식대로 잘해주려고 하는데, 이는 결국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돼서 일방적인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사람 자체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방식으로 존중을 해야 되는데, 내가 해줄게, 하면서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다. 같이 여행을 간달지 어려운 일을 겪는달지 어려움에 직면하면 그런 것이 더 첨예해진다. 그래서 떤 낯선 곳에서 우리를 다시 보는 테마로 가져간 거다.”

표제작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이혼을 한 뒤 홀로 뉴욕으로 떠난 마흔여섯의 수진이 어학원에서 만난 세네갈 대학생 마마두와 조금씩 가까워지지만, 편견과 선입관 때문에 두 사람의 첫 나들이가 의외로 삐걱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라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

“저는 너는 여자니까, 너는 남자니까, 너는 아이니까, 너는 노인이니까, 이런 식으로 이름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보다는 ‘장미의 이름은 장미일까’쯤 될 것이다. 제목이 의도한 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혹시 편견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자는 의미로 썼던 것 같다.”

마지막 단편 ‘아가씨 유정도 하지’는 오십대 남자 작가인 화자가 문학 행사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게 되는데 팔십대 모친 유정도 동행하면서 시작한다. 모친은 의외로 능숙하게 행동하고 심지어 교포 에이미와 함께 뉴욕 관광까지 나선다. 모친의 캐리어에서 우연히 보게 된 육십년 전 미국 땅을 밟았던 청년의 편지에는 당시 뉴욕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 소설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지성적이고 독특한 삶을 살아온 수잔 손택의 책을 읽다가 그의 연표를 보니 엄마와 같은 1933년생이어서 어떤 상상이 시작됐다. 엄마는 비록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지만, 모든 개인에겐 각자의 히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엄마 개인의 역사를 한 번 써보고 싶었다. 또 할머니라고 하는 편견이 얼마나 사람에게 억압을 주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이것을 할머니가 여행하는 것을 통해 얘기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소설들은 뉴욕에 대한 경험을 켜켜이 쌓여야 가능했을 텐데.

“저는 제가 경험한 것들이 결국 소설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현재를 조금 열심히 살려고 한다. 현재의 시간을 똑바로 보고 받아들이면서 남겨놓으려 한다. 그것은 소설가로서의 어떤 창고 같은 것이니까. 그렇지만 미리 뉴욕에 대해 써야지, 하고 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머릿속에서 이렇게 쓸까 하면서 자연스러운 관찰이 되지 않는다. 자꾸 의도대로 하려고 하니까. 또 어디를 갔다가 와서 그걸 바로 쓰진 않는다.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고, 더 알게 되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조금 시간을 두고 쓴다.”

―전체적으로 이번 소설들이 이전에 비해 더 따뜻해졌다는 반응인데.

“맞다.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이 너무 위축돼 있고, 여러 불안과 위험 속에 살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면들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장면을 하나쯤 넣고 싶었다.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건 우리들 서로이니까.”

1959년 고창에서 태어난 은희경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부문에 ‘이중주’가, 같은 해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에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이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등을,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앞으로 어떤 작가나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딱히 없다. 어떤 작가다, 이런 것보다는 그냥 조금 오래 유효한 질문을 계속 하고, 독자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 (시대가 바뀌면 질문도 바뀌는 것인가) 바뀔지 안 바뀔지는 저도 모른다. 제가 어떤 사람이 돼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 저도 궁금하다.”

앞으로도 유효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싶다, 는 은희경의 희망이자 다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늘 작품을 통해 시대의 부조리와 우울을 예민하게 포착하려고 노력해 왔고, 늘 동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품는 ‘동시대의 작가’를 지향해 왔으니까. 지치지 않고, 즐겁게, 자신의 방식으로. 그리하여,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기억될지도.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며 작품세계를 확장해온 작가,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엄현경 '여전한 미모'
  • 엄현경 '여전한 미모'
  • 천우희 '미소 천사'
  • 트와이스 지효 '상큼 하트'
  • 한가인 '사랑스러운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