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인생을 바꾸는 한잔의 와인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관련이슈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 디지털기획

입력 : 2022-01-01 12:00:00 수정 : 2022-01-02 14:38:2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이우환 화백 작품이 담긴 샤토 무통 로칠드 2013.

오른쪽으로 갈수록 바이올렛 빛깔이 점점 짙어집니다. 라이트한 퍼플에서 루비를 거쳐 가넷으로. 점 하나만 담긴 아주 간결한 그림. 그럼에도 숙성될수록 색이 짙어지고 맛과 향이 깊어지는 와인의 정체성을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잘 담았네요.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프랑스 보르도 5대 샤토’중 하나인 그랑크뤼 1등급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 2013입니다. 한국 작가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 레이블에 담겼기 때문이죠.

 

와인은 거대한 보물창고 같아요. 미술뿐 아니라 사람의 인생과 인류의 역사, 음악, 여행, 음식, 시와 소설, 사랑, 철학, 자연환경 등 많은 이야기들을 와인 한병이 품고 있죠. 그렇기에 한 모금의 와인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반짝거리는 별무리로 감싸 줍니다. 갈길 몰라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할 때도 지친 어깨를 토닥토닥 만져주죠. 인생에서 와인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여기, 와인을 만나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은 세 남자, 그리고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세권의 책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와인 여행.

◆클래식 성악, 칸초네 그리고 이탈리아 와인

 

‘성악가의 이탈리아 와인 이야기’. 책은 첫 프롤로그 제목부터 시선을 잡아끕니다. 성악가와 와인이라니. 어떤 얘기들이 숨어 있을까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성악가 황충연씨가 펴낸 ‘이탈리아 와인여행’(출판사 휴앤스토리)입니다. 책이 이탈리아 와인 지도로 시작하는 것을 보니 범상치 않은데 목차를 보고 또 한번 놀랍니다. 토스카나의 몬테풀치아노, 리구리아의 친퀘테레 등 지역, 프로세코, 아마로네, 바롤로 등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 종류, 네로다 볼라, 알리아니코, 사그란티노 등 다양한 이탈리아 토착품종까지. 60개 챕터를 통해 이탈리아 와인 주요 생산지역과 와인 스타일, 품종을 거의 망라하고 있습니다. 와인 초보자는 물론, 와인 좀 마셨다고 여기는 와인마니아, 소믈리에나 와인강사 등 와인전문가들에까지 큰 도움이 될 정도의 방대하고 정확한 와인 지식을 담고 있어 이 책 한권이면 이탈리아 와인 공부는 충분히 마스터하고도 남겠네요. 와인 초보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아주 쉽게 글을 쓴 점이 돋보입니다.

황충연 성악가

책을 읽다보니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 선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그림 같은 언덕과 포도밭으로 순간이동을 시켜주네요. 첫 번째 챕터는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입니다. ‘몬테풀치아노에서 생산된 고귀한 와인’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네요. 지도에서 보면 키안티 클라시코 남부, 몬탈치노 오른쪽에 있는 시에나의 아름다운 중세마을입니다. 토스카나 최고의 와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를 보통 ‘BDM’으로 부르는데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는 ‘VDM’으로 기억하면 될 것 같네요. 둘다 이탈리아 대표 품종인 산지오베제로 만듭니다. 산지오베제는 다양한 클론이 있는데 몬테풀치아노에서는 ‘프루뇰로 젠틸레(Prugnolo Gentile)’, 몬탈치노에서는 ‘브루넬로(Brunello)’ 로 부릅니다. 품종 이름도 몬테풀치아노가 있어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와 많이 헷갈리기도 하죠. BDM이 매우 고가인 반면 저자는 VDM은 가격대비 매우 맛있는 와인으로 추천합니다.

몬테풀치아노 거리 풍경.
가따베끼 비노 노빌레 몬테풀치아노.

789년부터 와인을 빚은 역사, 와인 이름에 ‘노빌레(nobile)’가 들어간 이야기, 1980년 시작된 DOCG 등급을 처음으로 받은 지역이라는 설명 등 전문적인 식견이 잘 녹아있습니다. 반드시 몬테풀치아노에서 생산된 산지오베제를 70%이상 사용해야하고 까나이올로 네로 등을 섞으며 자두나 잘 익은 체리와 허브 오레가노향이 숨어있다고 소개합니다. 숙성기간과 적정 시음온도, 알코올도수, 좋은 빈티지, 구체적인 와이너리와 와인 등 꼭 필요한 정보만 군더더기 없이 전해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악 전공과 이탈리아에서 30년동안 거주한 경험을 살려서 챕터마다 소개한 와인과 잘 어울리는 이탈리아 대중음악 칸초네(Canzone), 아리아 등 성악곡을 매칭시켜 들려줍니다. VDM과 잘 어울리는 칸초네는 클라우디오 발리오니(Claudio Baglioni)의 명곡 ‘Questro Piccolo Grane Amore(작지만 커다란 사랑)’을 소개합니다. 독특한 창법과 구구절절한 가사로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노래랍니다. 클래식 음악은 연인들의 아리아 중 최고로 꼽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의 테너 아리아 ‘Che gelida manina(그대의 찬손)’과 이어져 부르는 소프라노의 아리아 ‘Mi chiamano Mimi(미미라고 부르지요)’를 추천합니다. 젊고 가난한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가성비 좋은 VDM과  많이 닮았네요.

황충연 성악가 밀라노 라 베르디 오케스트라 합창단 공연 모습.

뿐만 아닙니다. 30년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접한 다양한 음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시래기죽으로 부를 정도로 들에 남은 채소와, 콩, 남아서 굳은 빵을 넣고 끓여낸 가장 서민적인 스프 리볼타(Ribollta)를 VDM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추천합니다. 이처럼 기존 와인 서적에서 보기 드문 디테일한 현지 정보가 살아 숨 쉬는 것은 저자가 30년동안 이탈리아에 살면서 수많은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그 지역의 음식을 곁들이는 등 발로 뛰며 직접 경험한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김포가 고향인 저자는 경희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뒤 1990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납니다. 200년 전통의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국립음악원(Conservatorio di Musica Giuseppe Verdi)과 에르바 아카데미아(Erba Academia)의 합창지휘 전문가과정을 졸업한 뒤 현지에 정착해 음악활동을 펼칩니다.

이탈리아 와인 여행 음식 매칭 소개.

그러다 현지인들과 어울리기 위해 접한 와인에 푹 빠져 와인 전문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군요. 와인시음가협회(ONAV;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di Vino)의 와인 테이스터 자격인 Assaggiatore di Vino 1, 2 코스 자격까지 획득합니다. 그의 책에 전문적인 지식이 녹아 있는 이유입니다. Assaggiatore는 일종의 와인 감별사로 양조과정도 직접 참여하는 와인전문가를 배출하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와인교육기관입니다. 저자는 이탈리아 한인 경제인협회 회장도 지냈을 정도로 현지 교민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황충연 성악가의 ‘이탈리아 와인 여행’은 책 제목처럼 그 지역의 와인과 음식, 칸초네, 성악곡을 두루 소개하고 있어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요즘 더욱 귀하게 다가옵니다. 그는 밀라노 라 베르디 오케스트라 합창단(Orchestra Sinfonia e Coro Sinfonico di Milano Giuseppe Verdi) 등에서 활발한 음악활동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언제가 다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황충연 성악가의 칸초네와 아리아 곡을 들으며 함께 와인 한잔 기울이고 싶네요.

헤이리 식물감각 마숙현 대표.

◆와인과 커피, 그리고 마라톤

 

경기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골목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예쁜 카페와 박물관, 공방과 플리마켓을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코로나블루는 날아갑니다. 요즘 헤이리는 초창기때처럼 주말이면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코로나19가 2년동안 지속되면서 멀리 여행하기 어려워지자 가까운 곳에서나마 머리를 식히려는 이들이 많이 찾으면서 활기를 띠고 있답니다. 섭씨영하 10도가 넘는 한파에도 브레이크타임이 끝나길 기다리는 이들이 레스토랑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네요.

 

와인샵도 보입니다. ‘식물감각’.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기도 하지만 독특한 이름이 이끄는 묘한 매력 때문에 어느새 샵에 들어섰습니다. 보통 와인샵과 많이 다르네요. 바닥에 무심코 여기 저기 와인을 박스채로 쌓아 놓았어요. 그런데 와인들을 보니 주인장의 내공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아요. 마침 머리를 길게 기른 예술가 포스의 사장님이 손님들을 반갑게 맞고 있군요. 그런데 어디서 봤더라. 낯이 많이 익네요. 머릿속 메모리를 이러 저리 헤집다 불쑥 한 장의 사진을 찾아냅니다. 얼마 전 읽은 와인책 안표지에 담긴 저자의 얼굴이네요. 반가운 마음에 사장님 와인 책 읽었다며 인사 건넵니다.

'와인 너머, 더 깊은'.

책 제목은 ‘와인 너머, 더 깊은 Over the wine, deep and deep’(출판사 사무사책방). 글쓴이는 마숙현 식물공간 대표입니다. 책은 저자가 경험한 잊을 수 없는 와인들을 에세이로 풀어냅니다. 챕터마다 하나의 와인을 소개하고 커피 얘기도 담아 재미있게 읽었는데 우연히 저자를 만나다니 신기하네요. 마 대표는 헤이리에서 ‘터줏대감’으로 통합니다. 헤이리예술마을 건설 초창기 싱크탱크 멤버로 참여했고 헤이리마을이 형성된 뒤에는 회원위원장, 뉴프로젝트위원장, 브랜딩위원장 등을 맡아 헤이리의 번영을 이끕니다. 헤이리에서 가장 오래된 파스타 레스토랑 ‘식물감각’을 17년째 경영하며 날마다 와인을 마신다고 합니다.

 

책은 몽테뉴가 처음으로 만든 장르인 에세이에 충실합니다. 와인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화가, 시인 등 예술가의 작품과 영화, 첫사랑의 추억, 일상과 자연에서 느끼는 잔잔한 평온 등 저자의 경험을 와인의 향기에 실어서 들려줍니다. 애인의 친구를 사랑한 샤갈,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와 러브레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프랑스 작가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의 망각’ 등 다양한 예술가가 등장하네요.

헤이리 식물감각 마숙현 대표.

이탈리아 수퍼투스칸 라 브란카이아 일 블루(La Brancaia IL Blue 2005년)를 마실 때 느낀 바이올렛 향 덕분에 냉정과 열정사이 주인공 아오이와 준세이 사랑을 떠올린다고 하는 군요. 라일락 향기가 흩날리는 봄날, 제프 버클리의 노래 ‘라일락 와인’을 들으며 저자는 첫사랑의 순수함을 닮은 스페인 내추럴 와인 아르테사노 빈트너스(Artesano Vintners)의 펫낫 벤자미나(Benjamina)를 오픈합니다. 식물감각은 파스타 레스토랑이기도 합니다. 마 대표는 “그냥 동네 파스타집”이라고 얘기하며 해맑게 웃네요. 와인처럼 사랑하는 마라톤과 커피 얘기도 담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파스타 한 그릇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인생와인과 바타시올로 바롤로.

◆실패에서 건져 올린 인생 와인

 

특목고 입학 실패, 육군사관학교 입시 실패, 사법고시 시험 실패, 멋모르고 들어간 첫 직장이 다단계회사여서 실패, 다음에 입사한 직장은 승진의 한계를 느끼고 퇴사, 제조업을 창업해 승승장구했으나 순식간에 엄청난 빚만 지고 실패,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주위 돈을 빌려 시작한 빵 가게도 실패. 이쯤 되면 참 인생이 막막하게 느껴질 것 같네요. 저자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나무에 밧줄을 걸었지만 이마저도 실패합니다.

 

일상이 돼버린 실패. 매일 제주 방파제에 나가 멍하니 바다를 보며 깡소주를 마시던 그가 어느날 와인을 만납니다. 가깝게 지내던 인품 좋은 이웃 부부의 저녁식탁에 오른 와인의 향은 그에게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졌고 어둠속에서 그를 건져 올립니다. 정신없이 와인을 파고 들다보니 경기 화성시 동탄에 와인샵 ‘와인 프렌즈’도 열고 와인서적까지 출간해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끕니다. 크리스 배(배주경)의 와인서적 ‘인생와인’(출판사 파지트)입니다.

와인 프렌즈 배주경 대표 배주경 대표.
배주경 대표 와인 아카데미.

책 구성이 아주 재미있네요. ‘돈을 벌고 싶을 때 마시는 와인/돈을 벌 때 마시는 와인/돈이 궁할 때 마시는 와인/돈을 벌고 나서 마시는 와인/돈이 되는 와인’. 이렇게 5개 챕터로 구성됐습니다. 돈 때문에 울고 웃은 저자의 인생이 고스란히 느껴지네요. 모두 22개 와이너리를 각 챕터에서 선정해 와이너리의 역사와 와인들을 매우 심도 있게 소개합니다. 돈을 벌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겠네요.

와인 프렌즈.
코도르뉴 까바 라마 브륏.

첫 챕터 ‘돈을 벌고 싶을 때 마시는 와인’에 스페인 스파클링 까바(Cava)와 ‘가난한 자의 돔페리뇽’ 로저 구라트 얘기를 담았네요. 상파뉴에 돈 안 되는 코르크를 팔던 스페인 카탈루냐 페네데스 사람들이 상파뉴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뒤 맛은 샴페인과 비슷하지만 가격은 매우 저렴한 샴페인 스타일 스파클링 까바를 탄생해 대 히트를 칩니다. 그 시작은 1551년 부터 와인을 빚은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코도르뉴(Codorniu). 1659년 안나 코도르뉴(Anna Codorníu)와 미쿠엘 라벤토스(Miquel Raventós)가 결혼하면서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와이너리로 떠올랐고

 

후손인 호세 라벤토스(Josep Raventós)가1872년 스페인 최초로 샴페인과 같은 전통방식으로 만든 까바를 생산합니다. 1984년에는 샤르도네를 중심으로 토착품종을 블렌딩한 까바 안나 드 코드르뉴를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생산해 코도르뉴는 ‘까바의 어머니’로 불립니다. 이런 성공에 배 아파하던 스페인의 조셉 카날은 1km의 지하동굴을 뚫어 와인 저장고를 만들었고 그렇게 탄생한 와인이 로저 구라트라고 저자는 전합니다. 까바라는 이름이 로저 구라트 지하동굴셀러 까브(Cave)에서 시작됐다고 하네요. 까바는 까브의 카탈루냐어랍니다. 

스페인 까바 로저 구라트 와인들.
제라르 베르트랑 끌로 도라.

저자는 챕터마다 선정된 와이너리, 품종, 생산지역, 와인스타일, 등급, 도수, 어울리는 음식을 ‘친구들의 와인노트’라는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어떤 와인이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돈을 벌 때 마시는 와인에는 제라르 베르트랑(Gerard Bertrand)의 끌로 도라, (Clos d'Ora), 바타시올로(Batasiolo)의 바롤로 등을 소개했고 돈이 궁할 때 마시는 와인은 판티니(Fantini) 그룹의 에디찌오네(Edizione), 돈을 벌로 나서 마시는 와인은 샤토 무통 로칠드 등 5대 샤토와 움베르토 피오레(Umberto Fiore )의 바롤로, 돈이 되는 와인은 테레 코르테지 몬카로(Terre Cortesi Moncaro)의 네로네(Nerone) 등을 추천합니다.


글·사진=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엄현경 '여전한 미모'
  • 엄현경 '여전한 미모'
  • 천우희 '미소 천사'
  • 트와이스 지효 '상큼 하트'
  • 한가인 '사랑스러운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