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의 역사 속으로

입력 : 2021-12-25 01:00:00 수정 : 2021-12-24 18:38:1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한국인 학자 김산해, 5000여년전 쓰인
수메르 점토판 원문을 한국어로 해독

8500년전 유프라테스강가 마을부터
최초의 도시문명국·대홍수·전쟁·영웅…
4500년 동안의 장대한 역사 풀어나가

수메르 왕명록에 라가시·움마왕조 누락
역사기록 필경사 의해 역사왜곡 추정
일생을 수메르 연구에 바친 김산해의 유작 ‘최초의 역사 수메르’는 모래 사막에 뒤덮여 있던 인류 최초 문명의 시작과 종말을 보여준다. 저자는 수메르어 점토판에 기록된 옛 역사를 직접 해독해 마치 눈앞에서 본 듯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진은 왼쪽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길가메쉬 석상, 에쉬몰리언박물관에 소장된 수메르 왕명록, 그리고 세계 최초의 법전인 우르 남무 법전 등 수메르 문명 유물. 휴머니스트 제공

최초의 역사 수메르/김산해/휴머니스트/3만3000원

 

수메르(Sumer). ‘인류 최초의 문명’이란 영예를 지녔지만 아직 알려진 바가 많지 않은 고대 문명이다. 현재 우리나라 세계사 교과서에선 한 페이지 분량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소개에 몇 줄 서술되는 정도다. 아직 세계적으로 정통한 학자도 적고 많은 부분이 신비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초고대문명이다.

수메르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1872년 영국 학자 조지 스미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수천개 점토판 중에서 발견한 인류 최초 서사시 길가메쉬 신화를 해독해 발표하면서다. 이어 1877년 프랑스 외교관 에르네스트 드사르제크가 다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고대 국가 라가시 유적과 6만여개의 수메르어 점토판을 발굴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됐다.

일생을 ‘수메르’ 연구에 바친 우리나라 연구자 김산해는 신간 ‘최초의 역사 수메르’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불과 150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 역사에서 ‘4000년 전’은 원시시대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수메르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르자 서구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수메르가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료를 꼽으라면 ‘길가메쉬 서사시’와 ‘수메르 왕명록(에리두로 시작하는 수메르 왕권 기록)’이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구약성서 중심의 세계관을 무너뜨렸다면, ‘수메르 왕명록’은 수메르 역사를 세계 역사의 맨 앞자리로 이동시켰다.”

김산해는 길가메쉬 서사시 점토판 원전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직접 해독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발간했던 연구자다. 신간 역시 5000여 년 전에 쓰인 점토판 원문을 손수 한국어로 해독해가며 수메르의 역사를 추적하고 복원한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저작이다. 아마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이지 싶다. 수메르 문명기 당시 제작된 수백장의 점토판과 석판을 샅샅이 톺아보고 설형문자로 새겨진 일차 사료에서 뽑아낸 이야기로 우리를 8500년 전 인류 최초 문명이 꽃피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비옥한 대지로 안내한다.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는 뻔한 수메르의 역사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았다. 내 앞에 점토판과 석판에 기록된 사료들이 첩첩했다. 나는 설형문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수메르의 역사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다.”

김산해/휴머니스트/3만3000원

“85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유프라테스 강가에 한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오우에일리였다”로 시작하는 ‘최초의 역사 수메르’는 원(原)수메르인이 ‘오우에일리’에 정착해 마을을 형성한 기원전 6500년경부터 우르 3왕조 멸망으로 수메르문명이 지상에서 사라진 기원전 2004년까지, 약 4500년 동안의 장대한 역사를 풀어나간다. “수메르는 가뭄을 이겨낸 최초의 도시문명국이었다”식으로, 저자는 많이 아는 만큼 쉽게 설명한다. 최초의 도시가 발달하고, 대홍수가 대지를 집어삼키고, 영웅이자 제왕 길가메쉬가 등장하고, 비옥토 ‘에덴’을 차지하려는 끝없는 쟁탈전이 벌어진다. 특히 수메르 문명의 핵심은 풍요로운 황금 들판으로 실존했던 ‘에덴’ 쟁탈전이다.” “ ‘최초의 역사’는 에덴 쟁탈전이었다. 에덴은 수많은 물길로 연결된 수메르의 들판이었다. …에덴이 없었다면 문명은 탄생할 수 없었다.”

최초의 수메르 제국이 개창하고, 끔찍한 부정부패가 자행되고, 악카드의 사르곤이 쳐들어와 수메르를 점령하고, 수메르 도시국가들이 독립운동을 펼치고, 왕과 신하 간 권력 암투로 문명의 마지막 빛줄기가 꺼져가기까지 수많은 일이 벌어진다.

수메르어로 ‘수메르’라고 쓴 설형문자.

2007년 말부터 수메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는 저자의 독보적 통찰은 당대 문자 사료, 즉 라가시에서 발굴된 사료와 수메르 연구의 교과서나 마찬가지인 ‘수메르 왕명록’을 대조하면서 발견한 감춰진 진실에 모아진다. 그토록 상세한 기록을 남긴 ‘수메르 왕명록’은 왜 라가시와 움마 왕조 역사는 쏙 빼놓았는가. 저자가 내린 결론은 최초의 역사가로 알려졌던 헤로도토스보다 2000년 이전에 역사를 기록한 이씬 왕조의 필경사 누르-닌슈부르가 조국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설명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라가시 유적에서 나온 ‘에덴 전쟁사’에 기반한 ‘최초의 역사’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나는 수메르에 정통한 명망가들의 주장을 일부 뒤집었다. 역사는 끊임없이 수정된다.”

이미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길가메쉬 서사시’ ‘수메르, 최초의 사랑을 외치다’ 등을 펴낸 김산해는 일생을 수메르 신화·역사·문명 연구에 전념했다. 수메르어와 악카드어 같은 고대어를 직접 해독하며 초고대 문명의 잊힌 역사를 복원하는 데 집중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신화와 인류학을 공부한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이 집념의 연구자는 집필 도중 3번의 시한부 선고를 받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해 병마와 싸워가며 글을 썼다. 마지막 원고를 탈고한 지 4개월여가 흐른 지난 11월, 안타깝게도 출간을 지켜보지 못한 채 영면했다. ‘수메르’에 대한 독보적 지식에도 그는 지난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초고대문명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수메르에 관한 한 최고의 학자는 없다. 다만 학생만 있을 뿐이다. 공부는 끝이 없고, 삶은 너무 짧다.”

※영화 ‘마블’에서 우리나라 배우 마동석이 열연한 길가메쉬는 누구였을까. 저자는 수메르 주도권을 놓고 키쉬와 우루크가 대립하던 시절 우루크 다섯 번째 왕으로 등장한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한다. 그와 키쉬 왕 아가의 전쟁 이야기에 여러 행적이 영웅담으로 더해지면서 신화가 만들어졌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엄현경 '여전한 미모'
  • 엄현경 '여전한 미모'
  • 천우희 '미소 천사'
  • 트와이스 지효 '상큼 하트'
  • 한가인 '사랑스러운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