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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것이 은이든 돌멩이든
현재 상황서 미끄러지지 않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걷는 것
그것이 올겨울 해야 할 일 같아

어째서인가 12월이 되면 저절로 한 해를 돌아보다가 반성하게 된다. 계획한 대로 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있지만 올해처럼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판단이 들면 이 직업을 택한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잠시 흔들린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소설가의 일이라는 게 눈에 크게 보이지도 않는 데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기도 쉽지 않으니까. 이 길이 나의 길일까 하는 나약한 회의에 빠져 있다가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올겨울과 방학과 2월까지의 시간을 잘 보내려면 뭔가 준비해야 했다.

먼저 절임 배추와 김칫소를 사서 김치통을 채워 넣고 감기 걸렸을 때 특효약인 생강청을 여러 병 만들었다. 가족도 나누어주고 나중에 만날 친구도 한 병 선물로 주려고. 혈관 질환이 있는 아버지에게 드릴 마늘꿀 절임을 해두고 천식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용으로는 무배꿀청을. 그리고 사골과 잡뼈를 사서 부모와 나, 세 사람을 위한 사골을 천천히 끓이기 시작한다. 어렸을 적과 달라진 게 많은데도 한겨울이 되기 전 먹거리부터 챙겨두는 습관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경란 소설가

불 옆에서, 긴 겨울을 같이 나고 싶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겨울은 무엇보다 두꺼운 책, 특히 장편소설을 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생생한 인물 묘사와 깨져가는 듯한 가족의 모습을 그리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작가인 조너선 프랜즌의 ‘크로스로드’, 지난해부터 미뤄두었던 토니 모리슨의 강연집 ‘보이지 않는 잉크’, 서영채의 ‘왜 읽는가’ 등 일차 주문을 마친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모두 500페이지에서 800페이지가 넘는 벽돌 책들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도 그랬다. 이렇게 추운 겨울이면 솜이불이 깔린 아랫목에 엎드려 쌓아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고 책을 읽으면서 타인의 삶, 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느꼈고 그게 커지자 작가의 길을 선택했는데. 그런데 왜 살아도 살아도 빈손인 것만 같은지.

사골은 아직도 끓이는 중이고 책들은 만 하루 만에 배송되었다. 고요한 밤, 식탁에 앉아 나의 가장 밝은 내면을 부추겨서 ‘어두운 생각은 그만하고 자 다시 힘껏 책을 읽자’ 하곤 ‘보이지 않는 잉크’를 펼쳤다. 선한 삶, 도덕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 끝에 토니 모리슨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으며 선한 삶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작가는 이 뜻을 강조하는 듯했다.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밀고 나가는 것, 그리고 “최선을 다해 타자를 상상해야” 하는 것. 그런 위대한 목소리에 이끌려 어느 틈엔가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말았다. 아직 사골국을 다 끓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데.

유튜브를 볼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로 영화를 볼까. 그런 생각도 곧 접는다. 동영상을 보면서 멍하게 흘려버린 시간이 올해만 해도 얼마나 많았는지. 얼른 다른 책을 펼쳐 들었다. 어떤 문장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문장은 선생님의 말처럼 배우려고 한다. 그중에 “그냥 믿고 가는 수밖에. 은을 가졌지만 금을 찾아나서는 거야”라는 말 앞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건 은도 동도 아닌 돌멩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 큰 노력을 하지 않고서 은을 찾아 나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손에 쥔 것이 은이든 돌멩이든 현재 상황에서 더 미끄러지지 않고 하루하루를 걷는 것. 그것이 올겨울에 해야 할 일처럼 느껴진다. 책이란 참 이상한 사물이다. 아무 데나 펼쳐도 여전히 배우고 생각하게 만드니까.

일인분씩 포장한 사골국을 냉동실에 넣어두고 나서 이제 책상 앞에 앉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도 있지만 소설가란 일을 선택했을 때 나는 지금 하는 일을 계속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건 정말 어렵고 멋진 일일 것 같아서. 월동 준비는 얼추 마쳤으니 지금 하는 일을 계속 좋아할 수 있도록, 바로 그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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