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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유혈 진압’ 침묵으로 일관… 전두환, 사죄 없이 떠났다

입력 : 2021-11-24 06:00:00 수정 : 2021-11-24 04: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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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력 진압 핵심 책임 당사자
발포 명령 인정 않은 채 세상 떠나

야당·언론 탄압… ‘비리공화국’ 악명
호헌철폐 거부하다 ‘역풍’ 내리막길

재임 중 경제성장률 年 9.3% 기록
88올림픽 유치 등 문화발전도 업적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전 전 대통령은 지난 8월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이날 오전 8시45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숨졌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33년 전인 1988년 11월 23일 그가 재임기간 중의 독재와 비리에 대한 책임으로 백담사로 향했던 날이다.

그는 현대사의 비극인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그 과정에서 수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한 과오에 대해서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5·18 발포 명령과 관련한 진실 규명을 거부하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상처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사안은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전 전 대통령 측근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고인의 자택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전 전 대통령이 아침에 자택에서 화장실을 가려다가 쓰러졌다. 이순자 여사만 계셨고 외부에 연락할 틈도 없이 운명하셨다”며 소식을 전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 9시12분쯤 현장에 도착해 사망 사실을 확인했고, 시신은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민 전 비서관은 “2017년 회고록 3권 648쪽에 사실상 유서를 남겼다”며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의 고지에 백골로 남아서라도 통일을 맞고 싶다’는 게 유서였다”고 했다. 이어 “평소에도 ‘나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라고 말씀을 가끔 하셨다. 가족들은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기로 했다”며 “장지가 결정될 때까지 일단은 화장한 후에 연희동에 모시다가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입구에서 민정기 전 비서관이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1931년 1월23일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955년 육사 11기를 졸업한 뒤 승승장구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사건 수사를 담당했다.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을 이끌며 같은 해 12·1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했다. 계엄령을 선포한 뒤 ‘서울의 봄’으로 표출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았다. 이어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했다. 같은 해 9월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다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물러났다. 퇴임 후인 1996년 내란, 내란목적살인죄, 뇌물 수수 등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전 전 대통령은 생전 자신의 과오에 대해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2017년 펴낸 회고록에서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밝혔고 12·12 군사 반란에 대해서도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날 ‘5·18에 대한 사죄가 없었다’는 지적에 “기회 있을 때마다 (했다). 33년 전 11월23일 백담사에 간 날에도 성명을 발표하고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발포 명령은 없었다”며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23일 서울 마포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 앞 전광판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이 나오고 있다. 뉴스1

◆광주 유혈진압 등 인권·민주주의 파괴… 경제 성장은 치적

 

전두환 전 대통령은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긴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7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한 그는 ‘신군부 철권통치’로 학생과 야당 정치인, 노동자를 막론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1980년 ‘광주 5·18 민주화항쟁’ 유혈진압은 1950년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현대사의 비극으로 꼽힌다.

 

◆춘래불사춘… 12·12 이후 얼마 못 간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던 전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12일 신군부를 동원, 국방부와 육본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 열망이 분출했다. 많은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독재가 무너져 곧 민주화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박 전 대통령 사후(死後) 정치 과도기적 상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이라고 빗댔다. 1980년 2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소위 ‘3김 회동’에서였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서울의 봄은 얼마 가지 못했다.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전두환 신군부는 그해 5월 18일 비상계엄령을 확대해 김대중·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거나 연금했다. 국회도 폐쇄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군홧발에 짓밟혔다. 특히 광주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군을 동원해 무참하게 시민시위대를 진압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이다. 전 전 대통령은 1995년 군형법상 수괴반란 등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감형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역사의 시곗바늘 거꾸로 돌린 5·18 광주 유혈진압

 

1980년 5월 18일 새벽 2시 전남대와 조선대 등 광주지역 대학에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시작된 5·18 유혈진압은 9일 뒤인 27일 새벽 4시55분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입으로 ‘악몽의 10일’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열흘의 기억은 훗날 전두환정권의 반민주적 철권통치를 종식하는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30여년이 지났지만, 실체적 진실 규명과 국가 공권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상처 치유는 끝나지 않고 있다. 광주학살의 책임 소재를 가릴 핵심인 최초 발포 및 집단발포 명령자를 여전히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헬기사격 책임자, 성폭력 가해자, 암매장 장소 등에 대한 조사도 남아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진압하는 계엄군. 연합뉴스

전두환 신군부는 자위권 발동을 내세우며 발포명령자를 부정해 왔고, 1995∼1997년 이어진 검찰수사에서도 발포 명령자를 기소하지 못했다. 5월 27일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인 전남도청 무력 진압작전에 개입한 일에 대해서만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뿐이다. 최근에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졌고, 계엄군과 보안사 수사관의 성폭력 등 성범죄 폭로도 이어지면서 진상규명 범위도 넓어졌다.

 

지난해 5월 5·18 40주년에 맞춰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꾸려져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돌입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는 실정이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발포 명령을 정당화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제공

◆신군부 ‘5공화국’ 독재정치의 시작과 끝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 1일 선거인단을 동원, 간접선거로 치러진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1년 1월 민주정의당을 창당해 총재에 올랐다. 그해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3월 체육관 간선제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올랐다. ‘신군부 독재’ 5공화국의 시작이다.

 

그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 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무고한 일반인을 구금하며 인권을 탄압했다. 동아방송 등 언론기관은 야당 성향이란 이유로 강제 통폐합을 당했다.

 

대학생 등을 용공세력으로 조작해 인권을 탄압했다. 1981년 9월 공안 당국은 부산에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불온서적으로 규정됐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역사란 무엇인가’ 등 이적표현물 학습했다는 이유로 불법감금하고 잔혹하게 고문했다. ‘부림사건’이다. 체포된 22명 중 19명이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년6개월∼6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당시 변호사였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광일 변호사 등과 함께 변론을 맡았다. 정치인과 재야인사에 대한 탄압도 가혹했다. 고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강제감금·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수사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두환정권의 만행이 알려지게 됐다. 경찰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학생이던 박종철군을 불법 체포한 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하다 사망케 했다. 내무부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은폐했다.

 

5개월 뒤인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이한열군이 경찰에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위험에 처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6·10 민주항쟁을 부르는 도화선이 됐다. ‘4·13 호헌조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하던 전 전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에 결국 항복한다. 그해 6월 29일,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선 후보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경제 성장, ‘88올림픽’ 유치는 성과로 평가돼

 

다만 기록적 경제성장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은 공적으로 평가된다. 김재익·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 등 경제 관료에 전권을 위임, 박정희시대 때 정부가 주도했던 경제정책을 시장 중심으로 바꾼다. 그가 김재익에게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다는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집권 첫해인 1980년 1714달러이던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집권 마지막 해인 1988년 4754달러로 2.8배 늘었다. 1970년대 말 중동발 경제붐과 1980년대 중반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 호황’도 영향을 미쳤지만, 집권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9.3%로 역대 정부 중 가장 높다.

 

전 전 대통령이 유치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고도성장 과정에서 기업과 정치권의 정경유착은 만연해졌고, 재임 중 ‘통치자금’ 명목으로 대기업들로부터 약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기도 했다. 1982년 프로야구를 출범하고 1983년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을 차례로 도입했다.

애증의 ‘쿠데타 동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26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

◆“전 재산 29만원”… 추징금 956억 환수 불투명

 

전 전 대통령 미납 추징금 956억원을 환수할 길은 사실상 사라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재판도 중단될 전망이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에 따르면 전체 추징 대상 금액 2205억원 중 이날까지 1249억원(57%)이 추징돼 956억원이 남았다. 현행법상 미납 추징금 집행은 당사자가 사망하면 절차가 중단된다. 형사소송법은 예외적으로 상속재산에 대한 집행을 규정하고 있지만 전 전 대통령의 경우 해당하지 않는다.

 

오는 29일 광주지법에서 결심공판이 예정된 전 전 대통령 항소심 재판도 공소기각이 불가피해졌다. 그는 2017년 회고록에서 5·18 당시 군부의 헬기사격 사실을 부정하며 이를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돼 지난해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현미 기자, 장혜진·박미영 기자, 광주=김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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