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 거장 임권택 감독이 오래간만에 기자들 앞에 섰다.
7일 오후 부산 동서대 센텀캠퍼스에서 만난 임 감독은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함께 지팡이를 짚고 불편한 걸음으로 간담회장에 올랐다. 올해로 86세. 마이크 잡은 손이 떨리고 때로 질문과 대답이 안 맞는 등 노쇠한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초롱초롱했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인상을 받은 그는 “이제는 영화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을 가질 나이가 됐다”며 “끝난 인생에서 공로상 비슷하게 받는 것 같아서 좋기도 하지만 더 활발하게 생이 남은 분들에게 가야 될 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다음은 임 감독과의 일문일답.
-차기작을 구상한 게 있나.
“지금은 계획이 없다. 평생 영화를 찍기로 직업으로 삼고 살다가 쭉 쉬고 있으니까 영화 더 허고 싶지 않냐 하지만, 저 스스로 멀어져야 할 나이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건 내가 만들고 싶었는데 못 만들어 아쉽다는 영화가 있는지.
“저는 100여편을 찍은 감독이기 때문에 생각나는 건 다 찍고 그랬는데. 못 찍었던 것은 우리 무속을 소재로 한 영화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종교적 심성 무속이 주는 것들 이런 것을 영화로 한 번 찍어봤으면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기회도 없고. 기회가 주어진대도 사양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사람한테 넘겨야 하는 그런 단계에 와있다.”
-극장이 존속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려가 어떤 영화로부터 위안을 받던가, 재미를 받던가,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지금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살면서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쪽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는 시대에 왔고, 괴상한 시대를 살고 있구나 생각한다. 코로나가 지나가면 영화관이 위안받고 시간 보내기 좋은 매체니까 다시 찾을 것으로 본다.”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영화의 저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몇해 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를 보고 나 자신도 좀 짜증 나는 구나 하는 허점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허점이 보이지 않고 완성도 높은 영화를 내고 있기 때문에 한국영화에 대해 불만이 없다.”
-기생충을 보고 너무 좋아서 봉준호 감독에게 직접 전화해서 좋았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으시다고.
“너무 좋았기 때문에. 늘 우리 한국영화는 불완전한 점이 눈에 띄곤 했는데 근자에 와서 봉준호 감독 이런 분들의 영화는 상당히 완성도 높은 그런 수준의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우리 영화도 이제 세계적 수준에 들어와서 탄탄하게 가고 있구나 한다.”
-영화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
“내 역량은 미치지 못하는데 계속 큰 영화제에서 상을 타오기를 기대하는 기대심. 여기 계신 분(허 위원장)도 그런 압력에 가세해서 좀 고달프게 했는데. 그런 압력이 영화 인생을 너무 쫓기게끔 살게 만든 것 같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나도 즐기면서 찍었어야 했는데. 너무 고통 안에서 작업을 했었구나 생각한다. 그건 제 책임이 아니고 여기 옆에 계신 분들이 기여하신거다.”
-후회스러웠던 것.
“너무 많아서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다. 너무 많은 것을 후회하고 산다.”
-20대 신인 감독 임권택에게 해주고 싶은 말.
“나이 들고 나서 어떤 젊은 패기로 산 나에 대해서 웃는다. 까불고 살았네 하며. 나는 살아온 인생에서 무엇인가 착각 때문에 헛바퀴 돌면서 많이 살았다. 그러면 지금 나이 들어서 제대로 코스를 잡았느냐. 그것도 잘 모르겠다.”
-영화 인생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준 동료가 있다면.
“한 번도 칭찬을 안 해서 늘 꾸중을 듣고 사는 우리 집사람. 처음으로 이런 자리에서 칭찬하고 싶다. 신세 많이 졌고요. 별로 수입도 없어서 넉넉한 삶이 아닌데 잘 견뎌줘서 아직도 영화감독으로 대우받고 살게 해준 우리 마누라에게 감사드립니다. 울 줄 알았는데 안 우네요.”
-영화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102편인가를 찍은 경력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요. 한 마디로 얘기하라고 하는 것은 나를 죽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에요. 한마디로 하면. 영화가 좋아서 그것 쫓아서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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