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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엔지니어였던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왜 사라졌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남자의 실종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남자는 회사에서 돌연 해고통보를 받게 되자 망연자실한 끝에 사라지기로 결심했다. 여느 때처럼 면도를 하고 출근하는 복장으로 집을 나선 뒤 증발해 버린 것이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와 사진작가 스테판 르멜 부부가 쓴 책 ‘인간증발’의 일부 내용이다. 저자들은 2008년 무렵 일본의 자발적 실종자들을 탐사했다. 이들이 그 남자를 만난 것은 실종되고 10년이 지난 뒤 어느 빈민굴에서였다. 놀랍게도 빈민굴에 모여 있는 사람 대부분 그 남자처럼 자발적 실종을 택했다. 이들은 파산했거나 이혼, 실직, 낙방 등을 겪은 뒤 혼자 사라지기로 했다. 저자들은 일본에서 연간 실종되는 10만여명 중 8만5000여명이 ‘자발적 실종’이라고 분석했다.

권구성 사회부 기자

저자들은 “세계에서 일본만큼 증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들이 취재한 2008년도까지의 얘기다. 2020년대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9년 기준 국내에서 실종 신고된 성인도 7만5432명이나 된다. 이들 중 1436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국내법은 성인 실종자에 대한 강제수사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들이 처한 상황이나 실종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알긴 어렵다. 한 경찰관은 “성인들의 실종신고가 접수되는 일이 꽤 빈번하다”며 “이유를 들어보면 경제적 상황이나 가정환경 등 말 못할 사연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근대에는 야반도주를 하면 신분을 세탁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현대에는 실종을 택하는 것이 사실상 삶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개인이 신분을 감추고 택할 수 있는 삶의 형태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2017년 국내에서 실종신고가 접수된 성인 6만5830여명 중 1402명은 자살이나 교통사고 등의 이유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제는 자살만큼이나 실종도 그 원인과 실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증발’ 저자들은 “증발한 사람의 운명은 둘 중 하나로, 비명횡사하거나 영영 잊혀진다”며 “저마다 다른 아픔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진단했다.

심지어 실종자 중에는 가족이 있는데도 삶을 마감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가진 절박함을 사회가 외면해 온 결과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성인 실종자에 대한 법적 기준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아동이나 청소년, 치매환자, 지적장애인의 경우 실종신고에 대한 법령이 있지만, 성인은 자기 결정권을 가졌다고 단순 ‘가출’로 치부된다. 한 해 7만여명이나 성인 실종신고가 접수되는데도 실종 이유를 제대로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이유다.

저자들은 자발적 실종을 택한 이들이 압력솥과 같은 사회에서 압박을 견디지 못해 사라지는 길을 택했다고 분석했다. 개인이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내몰리면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린다는 것이다. 흔히 한국은 일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자발적 실종을 택하는 현실도 다르지 않다. 더 늦지 않게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자발적 증발의 길로 내모는 것인지 원인을 진단하고 적절하게 처방했으면 한다.


권구성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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