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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의 장편’ 김주영 “밑바닥 목소리 듣기 위해 난 오늘도 걷는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입력 : 2021-05-31 07:30:00 수정 : 2021-05-30 18: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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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선 안되겠구나, 하는 어떤 각성 같은 것이 젊은 김주영에게 불현 듯 떠오른 것은 매일 술을 마시던 서른 즈음이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경제적 여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안동역 근처의 전매청 엽연초생산조합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시골 직장치곤 많은 월급을 받았다. 더구나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 네 명이나 됐지만, 그가 아무도 술을 퍼먹어도 그러면 안돼, 하고 말리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온 그로선 아무래도 글 쓰는 일밖에 없어 보였다. 글을 쓰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듯했다. 그에게 글은 소설이었다. 왜냐하면 대학 1학년 때 스승인 박목월 시인에게 자신의 시 10편을 보여줬다가 자네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라는 얘기를 들었던 그였기에 글을 쓰려면 시가 아닌 소설이어야 했다.

 

이미 고향 서당 훈장의 딸과 결혼까지 했던 김주영은 소설을 쓰기 위해 직장을 훌연히 그만 뒀다. 사람들은 그가 사고무친인데다가 재산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못했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력투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였다. 벌이가 없으니 가족도 힘들었지만, 먼저 자신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2년을 쓰고 또 썼다. 서른 두 살이던 1971년 그는 『월간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휴면기」가 당선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스스로 ‘바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때를 회고한 소설가 김주영은 이후 대하역사소설 『객주』를 비롯해 역사의 격류에 휩쓸려 쓰러지면서도 가장 먼저 일어서고 그 흐름을 추동한 민초들의 삶을 넉넉한 풍속으로 담아낸 작품들을 쏟아내며 한국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특히 걸쭉한 입담은 황석영이나 고 이문구 등과 자주 비교되면서 ‘타고난 이야기꾼’ ‘길 위의 작가’ 등으로 불리게 했다.

 

시대를 사로잡은 입담의 비결은 무엇일까. 최근 4년만의 신작 장편소설 『광덕산 딱새 죽이기』(문학동네)를 펴낸 것을 계기로 여우비가 내리던 지난 17일 낮 서울 충무로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마주했다. 180cm의 큰 키야 변함이 없었지만, 세월의 공세 때문인지 머리숱은 많이 빠져 듬성듬성했다.

 

신작 장편은 관씨 문중의 두 남자 대규와 복길의 삶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전통을 지키며 살던 시골 ‘옷갓마을’에 자본의 논리가 엄습하며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냐고 묻는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길 희망하시는지요.

 

“소설은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대규)와 전통보다는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배금주의적 가치를 더 중시하는 사람(복길)간 갈등을 어렵지 않게 접근해 보려는 소설이라고 보면 좋겠어요. 풍자적인 내용이 소설의 대강을 차지하죠. 산업화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 성공을 거둠으로 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배금주의적 사상에 젖어버렸고 이제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몰입됐다는 걸 대안 없이 이야기하려 했어요. 대안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소설 속에서 희망적인 것이라면 창녀의 이야기 정도이겠지요.”

 

소설에선 “하루 중에 반은 옷 입는 일로 보내고, 나머지 반은 입었던 옷을 벗는 데 쓰며” 사는 창녀가 장래희망을 묻는 대규에게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내 머릿속은 몇 날 며칠을 씻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더럽고 추잡한 기억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 기억들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약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요. 그게 내 장래 희망이예요.”(101쪽)

 

“명쾌하거나 사회과학적 결론은 아니고 매우 감정적인 결론입니다. 아주 추상적이죠. 소설가가 정치하는 사람이나 사회과학 하는 이들처럼 딱 부러지게 이렇게 개혁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건 상당히 어렵습니다. 저 같은 소설가는 그 같은 접근력이 결핍돼 있어요. 쉽고 웃어가면서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보면 됩니다.”

 

―소설로 들어간다면, 대규와 복길의 삶 중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사촌간이지만, 두 사람 대규도 복길도 모두 바람직한 인간상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거나 흘러가는 대로 산다고 생각하고, 가정 경제권을 마누라에게 건넨 뒤 자신은 영정을 모시고 관리하고 마을 경치만 바라보고 처사적인 삶을 즐기는 사람이죠. 반면 사촌 복길은 도회지에서 배워온 사기적인 방법을 가지고 마을을 개발하려고 하는, 재화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촌 형까지도 사기 치면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풍자적 기법으로 그렸지요. 두 사람 모두 바람직한 인생을 사는 건 아닙니다. 대규의 삶은 사는 대로 사는 삶이죠. 복길은 도시에서 온갖 악행을 배워와 시골 마을에 적용하는데, 이것 역시 바림직한 삶은 아니죠. 몇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 현대인들은 시골이나 도회지와 상관없이 대체로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삶을 살고 있지요. 예를 들면 재벌 2, 3세 가운데 대규처럼 사는 사람이 많지 않나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벌어놓은 돈 가지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대규처럼 어영부영하지요. 돈을 벌겠다고 주식이나 비트코인 등 남의 돈을 빼앗아 갈취하는 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나요. 단순히 시골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현대인들의 두 형태의 삶을 시골 마을의 이야기를 빌려 하는 것이죠. 어려운 질문입니다.”

 

대규의 삶도, 복길의 그것도 아니라는 작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가 최근 잇따라 접한 곤혹스런 질문과 언론인 출신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어려운 질문”이라고 말한 뒤였다.

“며칠 전 출판사에서 책 사인을 해주었는데, 책을 펴낸 부서의 책임자가 저에게 물어요. 선생님,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면 좋겠습니까, 라고. 그래서 말했지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도 너처럼 젊을 때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이냐, 아름다운 삶이냐,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영부영 83세까지 살게 됐다고요. 어설프게 결론에 이른 게 뭐냐면, 되는대로 사는 게 가장 무난하다, 사는 대로 사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무엇을 바라지 마라, 라고요. 최근 몇 년 간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면 좋겠느냐고 저에게 묻곤 했지요. 너무나 곤란했어요. 저 스스로도 추스르지 못하고 있어 그때마다 그런 소리 마라, 하며 대강 얼버무렸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83세라면, 솔직히 언제 죽을지 몰라요. 이 나이가 되기까지 얻은 결론이 되는 대로 살면 된다고 하면 너무나 초라하고 무책임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으로 봐선 현명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 언론인 출신 남재희 전 장관이 인터뷰한 것을 봤는데, 선생님 어떻게 살아가면 좋겠습니까, 하고 진행자가 묻잖아요. 그분 대답이 그래요.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 거창한 것 필요 없다고요. 저도 어느 정도 공감해요. 다만 죄 짓지 말고 살아가자, 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살자, 돈 너무 찾지 말고 살자고 생각합니다.”

 

결국 대규의 삶도, 복길의 삶도 아닌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 농촌의 노인복지 현실과 함께 자신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너무 돈에만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부연했다.

 

“지금요, 돈 한 푼 없어도 살아갑니다. 시골에서 자주 보는데, 70이 넘어 아무런 수입이 없는 독거노인에 대해 아침마다 봉사 하는 분이 도시락 가져다주고 국가가 돈도 줍니다. 요청하면 세탁 청소 해주는 사람도 있어요. 가치 없이 그런 식으로 사느냐 하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 많아요. 저 자신을 생각할 때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고 혜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쓰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83세의 나이에도 건강에 큰 고장 없이 웃으며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작가의 말에서 “페스트가 중세 유럽을 크나큰 혼란에 빠뜨렸듯이 사랑한다는 말이 수많은 인생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인가요.

 

“사랑이라는 말은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동성 간에 사랑할 수도 있고 부모 자식 간에도 사랑할 수 있는데, 요즘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쓰지 않느냐 하고 생각해요. 진가를 보면 참 고귀한 말인데, 그 말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어 사랑이라는 말의 가치가 점점 무의미해져 가는 것 같다는 의미예요.”

 

1939년 청송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대구농고 2학년 때 우연히 『현대문학』에 실린 소설들을 읽고 문학의 꿈을 키워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갔다. 10년 넘게 엽연초생산조합의 4급 주사 경리 직원으로 일하다가 1971년 등단했다.

 

―문학의 숲에 어렵게 들어오셨는데요.

 

“서라벌예대를 들어갈 때에는 장학생으로 들어갔는데, 서울의 자취 생활을 감당할 수 없어 군대를 갔어요.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곧바로 직장에 들어갔고요. 한참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까 서라벌예대가 중앙대에 흡수돼 있었고 복학해 7년 만에 졸업했죠. 먹고 살기 위해서 글 쓰는 일에서 잠시 떠나 있었어요. 그 사이 결혼도 했고요. 이런 식으로 살아선 안되겠다고 생각해 직장을 그만두고 한 2년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서른 두 살에 데뷔했고요.”

 

―등단 이후에도 한동안 쉽지 않았을 텐데요.

 

“글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웃음). 많이 힘들었죠. 한때 어떤 줄 압니까. 저 혼자서 거들어주는 사람도 없이 무려 3개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어요. 하루에 커피 10잔을 마시고 담배를 두 갑 반이나 피웠죠. 폐를 완전히 망가뜨렸어요. 기침이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을까봐 차를 못 탔어요.”

 

그는 『객주』를 비롯해 『활빈도』, 『천둥소리』, 『화척』, 『홍어』, 『아라리 난장』, 『멸치』 등 수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유주현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무영문학상, 김동리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만해문예대상 등 많은 상도 받았다.

 

특히 1979년부터 신문에 연재됐던 『객주』는 제국주의 열강이 경제적 침탈을 본격화하던 조선 말기를 배경으로 보부상과 민초들의 삶과 풍속을 풍성하게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 황종연은 “신분과 지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 상인들의 모험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코드, 숱하게 많은 모략과 술수의 이야기들은 의협 로맨스의 코드, 저잣거리를 비롯한 사회적 장소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풍속 소설의 코드와 연결”돼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객주』는 천봉삼을 비롯해 수많은 민초들이 등장해서 다양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줄거리랄까 플롯을 어떻게 짜셨는지요.

 

“흘러가는 대로 썼습니다. 보통 긴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큰 종이에다가 A, B, C, D 등 인물을 구분한 뒤 나이는 몇이고 고향은 어디이며 언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한다는 등을 메모해 앞에 붙여두고 글을 쓰지요. 저는 그런 것 없이 완전히 기억력만 가지고 썼지요. 어떤 돌아가신 분의 소설은 제3권에서 인물이 죽었는데 5권에선 다시 나오기도 했다는데, 그건 메모를 안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메모 한 장 없이 흘러가는 대로 썼습니다. 한 자리에 붙박혀 있는 장꾼들은 몇 없어요. 대부분 전라도 갔다가 강원도로 갔다고 충청도로 흘러가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어떤 사람과 어떻게 얽힐지 모르죠. 그래서 흘러가는 대로 썼어요.”

―해박한 풍속 묘사로도 호평을 받습니다.

 

“자료 수집을 5년 동안 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요. 조선 후기 풍속을 채집하기 위해 옛날 문서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을 들쳐봤고, 판소리도 들춰보고,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채집하곤 했지요. 장꾼들이 얘기하는 말 가운데 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보곤 했어요. 예를 들면 대원군 시절 천좍할 놈, 이런 욕설이 있더라고요. 무슨 말인가 알아보니, 천주학할 놈, 이라는 욕인데, 지금으로 보면 빨갱이와 비슷하겠지요. 또 매의 깃털에 소유자의 명함을 새겨 달아 놓은 것을 시치미라고 불렀는데, 시치미 잡아떼면 누구 매인지 모르게 되죠. 여기에서 시치미를 뗀다는 말이 나온 것인데, 이런 얘기를 군지 같은데서 봤어요. 고서점에 가면 그런 책이 많이 있었고, 그런 것들을 수집하느라 5년의 세월을 흘려보냈지요.”

 

그는 연재 당시 녹음기와 카메라, 지도를 들고 장이 서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민초들의 이야기와 언어를 채집했다. 오죽했으면 여러 차례 간첩으로 오인 받았을까. 작고한 이문구는 김주영의 메모 노트를 보고 “이것은 피”, “김주영의 모세혈관”이라고 했다.

 

―다양한 인물과 풍성한 풍속뿐만 아니라 구수한 입담도 큰 호평을 받았는데요. 입담은 어떻게 나온 겁니까.

 

“글쎄요, 제가 소설 쓰는 분 중에서 입담이 좋은 황석영이나 이문구 등과 자주 만나 술도 먹고 다니며 어울렸어요. 게다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을 드나들던 장사꾼들, 난전꾼들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요. (그는 어릴 때 청송 진보오일장 근처에서 살았다) 이 사람들의 입담이 좋거든요. 특히 흥정을 주고받는 말을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는데, 그런 것이 육화됐다고 할까요. 어린 시절 주로 장터에서 들었던 것이 입담으로 발산된 것이죠. 소문은 나지 않았지만,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장사꾼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동화집 『아무도 모르는 기적』(문학과지성사)을 펴낸 적이 있어요. 호랑이가 소년을 구하는 이야기인데, 많이 팔렸지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시골 사람들이 어느 날 밤 장터에서 일이 끝나 트럭을 타고 고개를 넘어 마을로 돌아가려는데 고갯길 한복판에 호랑이가 막고서 비켜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에 각자 옷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져 호랑이가 옷을 무는 사람을 내려주고 가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호랑이는 아버지를 따라 장에 온 소년의 옷을 물었다. 사람들은 어린이를 트럭 밖으로 팽개치고 떠났다. 그런데 호랑이는 홀로 남은 소년을 거들떠도 안보고 산에 들어갔고, 소년은 울면서 고갯길을 내려가다가 먼저 간 트럭이 낭떠러지 떨어져 사람들이 모두 죽은 걸 알게 됐다는 이야기다.

 

구수한 입담의 비결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는 중국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덩샤오핑 이야기도 하나 들려줬다. “덩샤오핑이 집권해서 보니 공무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공무원들이 왜 일하지 않느냐, 라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어요. 똥도 안 눌 놈이 통시(변소)에 왜 들어가 있느냐, 라고요. 이 말은 고위 관료나 지식층뿐만 아니라 하층 노동자 모두 알아듣게 되는데, 공무원들이 왜 일하지 않느냐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었지요. 저는 그런 표현을 찾는데 시간을 굉장히 많이 허비했어요.”

 

―문학 세계를 시기나 주제 등으로 구분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사실 구분이 없어요. 대답이 조직적이지 못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닥치는 대로 씁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소재나 주제를 생각나는 대로 살을 붙이고 썼어요. 다만 한 가지는 있습니다. 뭐냐 하면, 하층민 민초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처음부터 역사 흐름의 밑바닥에 흘러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어요. 단편소설을 쓸 때에도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과정으로 이전하면서 거기에서 생겨나는 우스꽝스런 행태들, 말하자면 단편 「이장동화」라든지 「즐거운 우리 집」이라든지, 농촌에 살고 있다가 도회지로 나와 밥벌이를 하며 겪는 애환이나 웃지 못한 이야기, 실패담 등을 썼지요. 역사 전면에서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의 장막 뒤에서 사는 사람들, 밑바닥에 깔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왜 민초들을 주로 그린 겁니까.

 

“체질인 것 같아요. 저는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 역사의 전면에서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들, 권력자나 선비 등을 잘 쓰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잘 아는 것을 쓰는 것이죠. 모든 소설가들은 자신이 잘 아는 것을 쓰고 모르는 것은 쓰지 않습니다. 경험한 것을 쓰거나 끈질기게 관찰한 것을 쓰지요. 명작 가운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도박꾼』이 있어요. 도스토옙스키는 시간만 있으면 도박을 했는데, 여기에서 사기꾼들도 만났고, 별 희안한 여자들도 만났으며, 오입질이나 마약한 사람들도 만났죠. 모르는 것을 쓰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뭐든 그 속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조선작은 『영자의 전성시절』을 쓰기 위해 창녀촌에서 한 달간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장편소설을 많이 쓰셨는데, 장편을 잘 쓰기 위한 방법 좀 알려 주시죠.

 

“야구선수 박찬호는 열을 늦게 받았다고 합니다. 9회까지 던진다면 4회까지는 잘 던지지 못하다가 5, 6회부터 잘 던진다는 거예요. 소설도 체질적인 것이 있는데, 저도 열을 늦게 받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단편을 잘 쓰지 않아요. (장편을 잘 쓰려면) 호흡이 길어야 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야 합니다. 제는 아주 끈질긴데, 그것은 고생스럽게 자랐기 때문이죠.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밥 먹기 위해 굉장히 끈질기게 달라붙었어요. 성격이 질긴 면이 있고, 그래서 나타난 게 장편소설인 것 같습니다. 단편을 몇 편 안썼고, 단편에서 중편으로 가는 게 아니라 단편을 몇 편 쓴 뒤 곧바로 『객주』로, 그것도 신문역사소설로 갔지요.”

 

그는 이 대목에서 체질이라는 말을 서너 번 더 반복한 뒤 심상하게 말을 끝맺었다. “이건 체질이지, 뭐.”

소설가 김주영. 하상윤 기자

―‘절륜의 술 실력’으로 알려졌는데, 건강은 어떤가요.

 

“술은 먹고 싶은데 나이를 먹어 잇몸이 별로 좋지 않아요. 담배는 한 2년 전 끊은 것 같습니다. 진단을 받아보니 폐에 구멍이 많이 뚫린 폐 기공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괜찮습니까) 기침은 하지 않아요. 높은 데엔 올라가지 못하지만.”

 

그는 이때 묻지도 않는 말을 주섬주섬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다른 작가의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 다른 이들의 작품을 읽지 않는다고요, 라고 거듭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외국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보고 이 대목 정말 멋지다, 하는 부문을 빼라고 하더군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디서 본 것이라는 의미죠. 저는 그 말을 믿어요. 이건 처음 얘기하는 건데, 저는 남의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소설책을 많이 보내주는데, 보관은 하지만 읽지는 않아요. 가방끈이 짧아 그것을 보면 빨려 들어가 은연중에 제 소설에 베끼게 될 텐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죠.”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김주영. 여행을 많이 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라고 하니까 돌아오는 대답 역시 어떤 장인 정신 같은 걸 느끼게 했다, 무슨 썩어빠질 노루 방귀 뀌는 소리라거나 도깨비 낮밥 먹는 소리가 아닌. 그는 여전히 민초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행은 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갔지요. 시장에도 자주 가서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시장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단련이 돼 조금도 어색하지 않아요. (지금도 갑니까)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알기에 지금도 딱 붙으면 제대로 이야기가 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점잖은 척 하면 고상한 말을 쓰면 말하지 않아요. 저는 사장님, 이런 얘기를 하지 않고 아줌마, 하고 바로 천박하게 들어가지요. 그러면 대답이 나옵니다. 임마 무식한 놈이구나, 이런 것을 보여주면 대화가 잘 됩니다.”

 

예술원에 가야 한다고 그는 길을 나섰다. 택시를 타러 길 건너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는 택시 안으로 덩치를 구겨넣었고, 기자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여우비는 그쳐 있었지만, 하늘은 먹구름으로 거무죽죽했다. 다시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칠 지도 모를 일이었다.(2021.5.31)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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