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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큐레이터 최연하 사진평론집 ‘한국사진의 힘’ 펴냈다

입력 : 2021-03-28 03:00:00 수정 : 2021-03-29 11: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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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22인의 작품 392점과 함께 작품론·작가론 펼쳐

사진평론가인 최연하 독립큐레이터가 한국의 사진작가 22인의 작품론과 작가론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사진의 풍요로운 세계를 탐구한 ‘한국사진의 힘’(월간미술)을 펴냈다.

 

한국사진의 힘을 예리한 분석과 통찰력, 차분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조명한 ‘한국사진의 힘’에는 사진작가 22인의 작품 392점과 함께 작가들의 작품 세계가 친절하게 설명돼 있다.

 

최 큐레이터는 사진, 여성, 생태주의 미학을 중심으로 글쓰기와 전시기획, 강의를 하고 있다. 예술과 삶, 인간과 자연의 상호 의존성을 사유하며 통섭으로서의 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박사과정에서는 미술비평을 공부했다.

 

최 큐레이터는 ‘크리스 조던: 아름다움 너머’, ‘경기에서-천 개의 기억’, ‘서울사진축제’, ‘못살, 몸살, 몽상’, ‘현대 사진의 향연-지구상상전’, ‘델피르와 친구들’, ‘사라 문’ 등 70여 회의 전시를 큐레이팅했다. 저서는 ‘사진의 북쪽’, 공저로 ‘경기미술-20Artist & Critics’ 5권과 6권이 있다.

 

다음은 최 큐레이터가 책에서 정리한 사진작가 22인의 작가론이다.

 

사진작가 강홍구는 2012년과 2020년에 ‘녹색연구’를 발표한다. 현대사회에서 ‘녹색’은 연구가치가 높은 대상이다. 녹색이 사라진 자리와 초록으로 무성한 공터를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것도 삶의 흔적을 지운 공터의 고요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녹색, 자본, 권력의 공생 관계가 견고해질수록 강홍구의 ‘녹색’ 연구도 집요해질 것이다.

 

최 큐레이터는 사진작가 고정남의 풍경사진을 ‘관능의 인덱스’라 말한다. 사진은 물리적으로, 실제에 대한 인덱스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닿은 빛의 자국이기 때문이다. 빛을 받은 필름처럼, 기억의 저장고 메모리카드처럼, 작가가 촬영하는 대상 쪽으로 깊이 휘어지니 관능적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탄생한 사진의 밀도가 높고, 마치 매끈한 육체처럼 탄력적이고 육감적이기에 그의 사진은 관능이다.

 

최연하 사진평론집 ‘한국사진의 힘’

사진작가 구본창은 삶을 담아낸 그릇과 얼굴, 소멸 되어가는 일상의 작은 사물에 집중하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개별 주체의 은밀한 삶의 시간이 촉각적으로 스며든 비누, 기억이 퇴적된 하얀 시간의 벽, 고고학적으로 발굴해 낸 그릇들은 구체적 삶이 묻어 있음과 동시에 구본창의 사진 속에서 현실의 삶으로부터 추상화된 절대적 시공이다. 쓰임을 다해 더는 거품이 날 것 같지 않은 비누 쪼가리는 보석처럼 빛나고, 곧 허물어질 것 같은 낡고 늙은 벽은 오랜 시간 가부좌를 튼 구도자의 정제미로 형형하다. 그 자체로 은폐와 상징, 표현으로 충일한 탈을 쓴 사람들의 초상은 사진 속에서 생생한 춤을 추고 있다. 이승과 저승,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탈’하고 심지어 사진의 프레임도 벗어나는 비의(秘意)로 내밀한 이미지들이다.

 

사진작가 김도균은 사진을 그 자체로, 고유한 방식으로 보게 한다. 시각의 용적률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사진 매체의 본질인 필름과 화면 자체에만 집중하게 한다. 사진을 중심으로 사진의 성패를 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사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사진이란, 그 사진가만의 고유성으로 밀집된 사진이다. 그런데, 고유함이라는 것이 단시일 내에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긴 시간의 축적과 노력의 집적, 감각의 훈련과 몰입이 깊어져 형성된 자장으로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계속 좇아가게 만드는 김도균의 사진은, 견고하고 부드러운 밀도와 속도로 이뤄진 고유한 이미지다.

 

밀레니엄과 함께 등장한 사진작가 노순택은 좀 더 분명하게 한국 다큐 사진의 육체를 만들어 낸 작가다. 매번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변혁의 상상력은 노순택의 사진에서 삐딱한 유머로 자리하거나 더 교묘한 형태로 현실을 포위했다. 현실을 수동적으로 옮겨오는 사진 재현의 한계를 딛고, ‘이미지’로 은폐되었던 정치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내온 노순택의 사진 도정은 예외적이었다. 새로운 사진언어의 발굴과 노련한 행보는 사진의 다양한 진입로를 열게 된다. 현실정치가 무소불위의 괴물이 될수록, 그의 사진은 ‘노련한 가을 뱀’이 되어갔다.

 

1990년대에 등장한 사진작가 중에서 니키 리는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국내 작가로는 드물게 뉴욕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될 정도로 해외에서 폭죽 같은 주목을 받았다. 니키 리는 ‘더 프로젝트’ 시리즈를 시작으로, ‘파트(Parts’, ‘레이어스(Layers)’까지, 퍼포먼스와 셀프 포트레이트를 통해 작가 스스로 사진작품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어 해석이 풍부한 텍스트를 제시했다. 경쾌하고 탄력적인 니키 리의 몸-기호는 생생한 의미작용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세계와 한없이 부드러운 포옹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안과 바깥, 주변을 드러내고 있는 니키 리의 강렬한 현전을 따라가 보자.

 

사진작가 박형근의 사진을 하나하나 언급하는 일이 이젠 무색해진다. 어떻게, 왜, 어디에서, 무엇을 찍었는지 보다, 그의 풍경-세계의 비의(秘意)를 하나씩 음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형근은 풍경-세계를 해석하기보다는 세계에 접촉해 있는 감각을 따랐다. 그는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목적 없는 길을 따라 제주의 곳곳에 닿았다고 한다. 정처와 시종이 없었다. 이미 풍경이 작가 속에서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에게 사진을 찍는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생생한 체험에 근거한다.

사진평론집 ‘한국사진의 힘’을 펴낸 최연하 독립큐레이터.

사진작가 백승우는 밀레니엄 이후, 본격적인 매체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날로그 사진의 전 과정을 섭렵하기 무섭게 디지털 사진이 몰고 온 변화들에 대응하며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수순을 밟아야 했다. 그 중에는 사진을 넘어서기 위해 오로지 사진에게로 입사하여 의미의 영역을 개척하기에 골몰한 사진가도 눈에 띈다. 바로 백승우다. 사진과 사진을 찍는 행위, 사진을 찍는 도구와 사진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상황을 조직해내는 백승우의 행보는 사진비평의 새로운 언어를 요청해 낼만큼 집요했다.

 

사진작가 성남훈에서 보듯 모든 사진에는 제 스스로 꿈꾸는 디나미스가 있다. 디나미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가능태’로 번역된다. 사진의 본질적 요소가 과거 시간이 박제화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면, 사진을 보는 이는 그 가능성을 발현시켜야 하지 않을까. 한 편에서는 부가 넘치고 있고, 한 편에서는 가난이 부처럼 축적되고 있고, 또 한 편에서는 국경을 떠도는 별들이 있고, 떠도는 별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밝힐 수 없는 빈 공간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도래할 시간의 지도이다. 아니, 그 옛날 유목민의 텐트에 맺혔던, 그리고 성남훈이 계속 이동하며 꿈꾸는 ‘꿈의 이미지’이기에 레스보스섬의 ‘사포’ 시인처럼 그 속에서 끝없는 사랑을 계속 길어 올려야 한다.

 

사진작가 오상조에게 삶은 사진이자 사진의 세계가 곧장 삶의 무늬로 옮겨오는 지극한 미메시스 운동이다. ‘당산나무’처럼, 사진작가와 사진교육자로 제 영역을 지키며 사진의 자율성을 확고하게 입증한 오상조 작가의 사진력이 어느덧 오십 해에 이른다. 작가에게 처음 예술의 길을 개시한 신석정(1907~1974) 시인과의 만남은 이례적이었다. 시인은 장차 사진가가 될 아이에게, 붓글씨로 세계의 실상을 소묘하게 한다. 작가에겐 처음부터 이미지와 글자가 중첩되어 있었다. 아니, 문자 속에 사진 이미지가 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세계의 현상을 보고 사진의 언어로 옮겨온 것이다. 세계-풍경의 흔적들을 역사, 의미적으로 읽고 이미지 기호로 정련하여 자연의 비밀스러운 의도들을 받아쓴 것이 오상조 작가의 사진 행위이고, 작가의 사진은 인생과 자연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말이 없는 사진과 달리,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작가 오형근의 작품에서 의미의 결핍, 의미의 여백, 오직 의미의 떨림을 보여주는 소녀들의 이름이 콘텍스트를 이룬다면, 이방인과 아줌마와 군인은 이미 의미로 굳어져 있기에 호명이 중요치 않다. 그런 측면에서 뉴올리언스와 오하이오의 거리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의미의 고독이자 의미의 그늘이며, 자기 이름으로 살지 못하는 아줌마들은 익명의 시끄러운 ‘의미의 횡단’인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는 의미이자 의미의 너머가 ‘군인’이 아닐까. 의미의 바깥이건, 겉이나 안이건 그것에 충일하건 저항하건 흔들리건 간에 오형근의 시선은 현실세계 너머의 다른 있음의 방식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진작가 원성원은 자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족과 친구, 심지어는 꿈에서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사연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녀의 섬세한 감각적 촉수에 걸려든 이야기들은 갈등하고 어울리며 한 장의 사진 안에 녹아든다. 작가는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방방곡곡을 누비며 이야기의 소재가 될 사진을 찍고, 채취한 사진들을 정교하게 가공하고 편성하여 다시 한 컷의 사진 작품을 만든다. 이때 한 번 이야기에 등장한 사진 재료는 이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양한 사연이 담긴 개별자의 삶의 무늬, 그 무늬를 빚은 바람과 햇살과 밤과 낮의 시간은 매 순간 다르다.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속살은 각자에게 속한 특이한 영역이기에, 실재의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고유한 경험을 지닌 한 컷 한 컷의 사진을 찍어야 했고, 이것은 원성원 사진-소설의 주요한 형식이다.

 

사진작가 이원철은 자신의 임무가 사물의 의미를 현현시키는 것이라 보고 있다. 논리적인 추론이나 고상한 언어로부터 비롯된 통찰력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암시에 의해 극적으로 알게 된 사진적 깨달음-에피파니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불이 꺼져 있음으로 존재가 밝아지는 ‘등대’처럼 말이다.

 

사진작가 이정진의 사진 속에서는 바람과 햇볕과 그림자가 서로를 빛내며 지탱하고 있다. 풍경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현전을 추구하는 이 사진가는 아마도 풍경이 제 안으로 스며들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내 안에 스며든 풍경을 인화할 때는, 어둠 속에서 풍경이 서서히 깨어날 수 있도록 다시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서서히’ 스며들고, 깨어나게 하기. 풍경이 사진 속에서 숨 쉬게 하기. 기성과 기존의 틀을 벗어나 이정진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했다. 이정진이 한지를 만나, 리퀴드라이트로 감광유제를 제조해 인화지를 만들고, 까다로운 암실의 전 과정을 세련된 장인정신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풍경을 향해 열린 무한한 마음 때문이었다.

 

사진작가 이주용이 오래전부터 다루고 있는 아카이브 미학과 박물관학적인 창작프로세스와 더불어 사진사 초기의 기술을 재현해서 동시대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기억-예술로서의 사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보인다. 기억의 기원인 ‘므네모시네’의 어원이 ‘뮤지엄’에 닿아있듯, 기억 작업을 통해 기억의 터(박물관)를 다져나가는 그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사진작가 임수식의 작품은 모두 보여주거나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매끈하고 얇은 표면이 감춘 진실은 때로 두텁기도, 허무하기도 하다.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두텁고, 한편 나와는 무관하기에 허무하다. 그래서 쉽게 실재와 접속할 수도 있고, 정반대로 텅 빈 공백만 응시할 수도 있다. 임수식이 그동안 읽어낼 수 없는 텍스트를 사진으로 찍고(수필, Room.K, 바벨의 도서관), 원근을 해체하며 다시점(多視點)과 공백으로 연대하고(책가도의 박음질), ‘한낱 가능성’으로서의 기록(히가시오사카 조선중급학교의 기록)을 한 이유는, 비가시적인 세계에 숨 쉬는 실재를 어떤 식으로든 보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임수식 사진의 어떤 가능성이 아닐까.

 

사진작가 임안나는 원근법에 단련된 인간의 시각을 비판하며, 전쟁과 재난으로 대표되는 이미지를 지각하는 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매체 기술의 발달이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같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뒤틀린 가상의 효과 속에서 정작 보아야 할 것들과 감각해야 할 것들을 놓친다는 것이다. 임안나는 기록 가치를 기본으로 하는 다큐 사진의 형식을 이용해, 전승되어온 이미지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재작업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진기술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여기의 세계를 지각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고, 근대 국가의 권력과 자본의 물질 관계와 궤를 함께 한 전쟁과 재난으로 대표되는 기계적인 지각체계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능동적 보기의 가능성을 차갑게 숙고하고 있다.

 

사진작가 정주하는 초기부터, 사회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점점 물화 되어가는 사회와 급기야는 야만의 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는 세계의 실상을 사진과 사유의 ‘핵’으로 삼아왔다. 생명권력에 의해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초상에서부터,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쓸모 있는 도구나 수단으로 변질되어 가는 자연환경과, 산업화 이후의 경제 발달과 거대 자본으로 피할 수 없이 벌어진 재앙의 현장들을 계속 무섭게 제시하고 있다. 가해자는 누구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추방당했고, 인류는 왜 자멸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가. 나와 별로 관계없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에서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한결같은 물음을 던지는 역할을 정주하는 자임한다.

 

사진의 어떤 가능성과 사진만이 사유하게 해주는 특수한 그 무엇을 탐구해 온 사진작가 정희승은 사진과 언어의 공통성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음’과 ‘비밀스러운 불확실성’을 꼽고 있다. 작품을 개념화하려는 관객의 시도에 저항하면서, 이해의 경계 너머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게 하는 것이다. 의식 안으로 순일하게 포섭되지 않는 것들을 사유하기 위해,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데다 해상도마저 높은 시각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 말할 수 없는 것, 도착 되지 않은 의미를 찾기 위해 이제 관객은 정희승이 사진 밖으로 탈주하듯 그동안의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사진의 ‘행간’은 텅 비어 있기에, 온 감각을 살려 사진을 살펴야 한다.

 

사진으로부터 시작해 퍼포먼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사진작가 천경우의 작업은 나와 나, 혹은 나와 타인(세계, 물질 등)과의 관계 맺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지각작용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삶의 영역들을 가시화하고, 현실에서는 불가역의 시간을 사진으로 드러내며 인간의 ‘시간’이란 무엇인지 골똘한 사유로 이끈다. 그동안의 표상과 개념, 관습과 진부한 도식에 구속되었던 우리의 수직적 사고를 말랑말랑한 시적 잠재성으로 변환시켜주는 마법의 시간을 천경우의 사진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사진작가 최광호의 사진과 삶, 세계는 자유를 구가하기 위한 도정으로 뚜렷하다. 사진의 출발에서 현재까지 ‘최광호형식’을 만들며, 스스로 빛에 감응하는 새로운 감광층을 형성해왔다. 감광층이 발현될 수 있는 한 미세한 영역 깊숙이 들어가 풍부한 의미의 씨앗을 심어온 그의 사진 세계는 예측 불허한 매혹으로,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낯섦으로 가득하다. 작가 자체가 사진이 되는 기이한 행보로 아주 밝고 고독한 톤을 선보여 온 것이다.

 

사진작가 황규태 ‘다게레오타입 사진의 끝’에 등장한 ‘픽셀샤먼’이라 부르고자 한다. 황규태의 새로운 상상력, 주술적(제의적) 상상력과 기술적 이성을 종합하여 상상(가상)을 현실로 바꾸는 ‘픽셀 춤’은 탈역사적 마술을 부리며 무한성에 닿으려 한다. 샤먼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메신저라면, ‘픽셀샤먼’은 인간 존재와 오감을 확장시켜 가상을 구체적으로 불러오는 무당이다. 라틴어 ‘버추알리스(virtualis)’에서 유래한 단어 ‘virtual’에는 ‘힘, 능력’이라는 뜻이 있다. ‘픽셀샤먼’은 가상에 머물며 현실화될 수 있는 것들을 깨우는 무당이기에, 황규태가 픽셀놀이에 매혹 당할수록 사진예술은 재미로 풍요로워질 것이다.

 

저자 최연하는 책을 펴내며 소회를 썼다.

 

“적(籍)이 있었던 적이 없이 독립큐레이터와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일하는 내게 한국의 ‘사진계’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였다. 사진계라는 공동체는 소속감과 안도감을 심어주었고, 전시 기획일을 시작한 2002년부터 ‘사진사진’한 시간(사진 전시를 기획하고, 사진 강의를 하고, 사진가인 친구와 사진으로 일을 하고, 사진으로 밥을 먹고, 사진으로 대화를 하고, 사진 전시장에서 놀고…)을 살았다. 이 ‘사진사진’함에 이끌려 두 번째 책을 출판하게 되었는데, 전시장에서 만난 한 비평가가 사진작품을 두고 한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이 사진작가의 작업은 너무 ‘사진사진해서’ 지루하다는 것이었고, 나는 ‘사진사진하다’는 신조어에 일순 골똘해졌다. 그 말의 함의가 오로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안다. 사진 기술에만 기대어 안일하게 창작을 하는 사진가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동시대 예술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사진의 자율성을 고집하는 늙은 행보가 지루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역으로 사진사진함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됐다. 사진 매체의 특성과 사진 때문에 풍요로워진 예술계를 넓고 깊게 살피게 된 것이다. 이 책에 ‘한국사진의 힘’이라고 주제 넘는 제목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가 ‘힘’들로 각축전을 벌이는데 책 이름에까지 ‘힘’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처음 염두 한 타이틀은 ‘사진의 고독’이었다. 고독한 사진, 사진의 침묵에 대해서는, 이 책의 본문에 이미 누수 되어 있어 충분한 고독을 전달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진의 힘을 새롭게 다시 조명할 필요를 느꼈고, 그 일은 제도의 바깥에서, ‘힘’없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무슨 소리인지 귀를 기울일 것이기에, 일정 부분 자임한 것도 있다. 지면의 한계로 한국사진의 힘을 낱낱이 말하지 못해 아쉽지만, (최고령이 아닌) ‘최연하’이니, 앞으로도 계속, 연하고 부드럽게 글과 전시기획, 말로 스며들지 않을까.”

 

조정진 선임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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