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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 고추장 냄새나는데… 매운맛없이 '슴슴 담백'

입력 : 2021-02-25 07:46:50 수정 : 2021-02-25 1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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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미국 이민 한인 가정 정착기

“아버지는 단지 영화에서 본 낭만적인 꿈을 믿고 미국에 왔다. 이 비옥한 땅이 많은 것을 내어줄 것이라는 꿈이었다. 그러나 영화와는 다르게 훨씬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땅은 너그럽지 않았다. 농장 일에는 끊임없는 위험 요소가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까지 다 드러내면서 자연의 자비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시작으로 전미 비평가위원회 각본상 여우조연상 등 미국 내 각종 시상식에서 69관왕을 차지하며 인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미나리’의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이 털어놓은 연출의 변이다. ‘미나리’는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올라있다.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1940)와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자이언트’(1956),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그린 ‘거대한 서부’(1958), 그리고 테렌스 캘릭 감독의 ‘천국의 나날들’(1978)과 닮았다.

 

할리우드 영화는 가정을 소중히 그린다. 그들의 가정관은 서부개척시대에서 기인한다. 서부로 이주해간 미국인들이 광야에 집을 지을 때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가정의 보호였다. 언제 어디서 인디언들이 습격해 올지, 백인 무법자들이 들이닥쳐 약탈과 살육을 자행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에는 목숨을 걸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정을 지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울러 광활한 대자연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의 삶을 그린다. 그것은 나름 강인한 삶이다. 이는 ‘가장 강한 나라’를 추구하는 아메리칸 드림과 무관치 않다.

 

낯선 땅 미국에 이주한 한인 가정이 현지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미나리’는 한순간도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분명 고추장 된장 냄새가 나는데, 매운맛 짠맛 없이 그냥 슴슴하고 담백하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게 이 영화의 힘이다. 

‘개척사’와 ‘가족애’. 영화 ‘미나리’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인 정 감독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1980년대 미 아칸소로 이주해 농장을 일구며 정착하는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시원한 초록색 화면에 풀어낸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넓은 땅이 생긴거야. 엄마한테 (여기가) 좋다고 얘기해.”

 

자신만의 야채 농장을 가꾸고 싶은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이 여섯살 아들 데이빗(앨런 김)을 끌어들인다. 선천성 심장병을 가진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 모니카(한예리)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캘리포니아 도시로 돌아가 살기를 원한다. 넓은 들판이 펼쳐진 외딴 곳에 바퀴달린 트레일러 집으로 이사 온 날부터 모니카는 얼굴을 펼 날이 없다. 병아리 감별사 일을 시작한 모니카는 두 아이를 보살펴줄 베이비시터로 한국에 있는 엄마 순자(윤여정)를 불러들인다.

 

먼 길을 온 순자는 고춧가루와 멸치, 한약부터 내놓는다. 트레일러에 사는 게 미안하다는 딸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바퀴 달린 집이 재미있기만 하다며 사위 몰래 두툼한 돈봉투까지 건넨다. 제이콥이 고군분투하며 농장을 일굴 때,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며 무심히 미나리씨를 뿌리기도 한다.

 

데이빗은 자신에게 쓴 한약을 먹이는 할머니가 밉기만 하다. 다른 할머니처럼 쿠키를 구워주지도 않고 오히려 손주들을 데리고 고스톱을 치는 순자에게 “진짜 할머니가 아닌 것 같다”며 투정과 심술을 부린다.

 

손자와 할머니 사이의 반전은 데이빗이 옷서랍에 다쳤을 때 일어난다. 상처가 난  발목을 손빠르게 처치하는 할머니. 그리고 ‘스트롱 보이’라며 다독여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격려에 힘을 얻은 손자는 비로소 할머니에게 마음을 열고 곁을 내주기 시작한다. 이처럼 순자는 고유한 방법으로 가족을 안심시키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존재다.

 

“미나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서 누구든 뽑아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김치나 찌개에 넣어서 먹을 수도 있고 아플 땐 약도 되고. 원더풀 미나리.”(순자)

 

“아빠가 물기 많은 곳엔 뱀들이 있으니 조심하라 했어요.”(데이빗)

 

데이빗이 뱀을 향해 돌을 던지자, “그냥 둬. 보이는 게 숨어 있는 것 보다 나아. 숨어 있는 게 더 무서운 거란다.” 세상을 살아 본 할머니가 전하는 삶의 교훈이다.

 

순자가 딸에게 말한다. “아이는 네 생각보다 건강해.”

 

“의사가 얼마나 위험하다고 했는데.”(모니카)

 

“아이는 아프면서 크는거야”(순자)

 

이제 물이 안나오는 날엔 손주들이 미나리 밭 주변에서 길어오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날, 풍을 맞은 순자는 드러눕고 만다.

 

삶에 짓눌린 부부는 다투던 끝에 대략 합의한다. 모니카는 애들을 데리고 도시로 가고, 제이콥은 남아서 농사를 짓기로. 함께 돌아가자는 모니카의 요구에 제이콥이 단호하게 말한다.

 

“애들도 아빠가 한번쯤 해 내는 것을 봐야할 것 아니야.”

 

다행히 데이빗의 심장이 기적처럼 좋아지고 있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제이콥이 재배한 농산물도 발육이 뛰어나 다음 주부터 배송하라는 합격 테스트를 받는다.

 

신이 난 제이콥이 외친다. “타이밍이 완벽해.”

 

그러나 모니카가 따져묻는다.

 

“상황이 좋으면 함께 사는거고 아니면 헤어져 사는거야? 우리는 서로를 구해주지 못하지만, 돈은 할 수 있다? 당신만 바라보고 살기엔 내가 너무 지쳤어.”

 

하지만 위기 앞에서 부부는 다시 하나가 된다. 창고에 불이 난 것이다. 연기를 마시면서도 불 속에 함께 뛰어들어 수확한 농산물을 끄집어낸다.

 

반신이 불편한 순자는 쓰레기를 태우다 낸 불을 보고 넋을 잃은 채, 쓸모 없게 된 자신을 책망하면서 무작정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이때 태어나 한번도 뛰어 본 적이 없던 데이빗이 힘차게 달려가 할머니 앞을 막아선다. “할머니 가지 마요. 우리랑 같이 집으로 가요.”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네 식구가 거실 바닥에 다같이 누워 자고 있다. 이를 순자가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처음 이사온 날 다같이 잤던 그 모습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함께 있다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미국식 시각으로 그려낸 영화답게 다행히 한순간도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분명히 고추장 된장 냄새가 나는데, 매운맛 짠맛 없이 그냥 슴슴하고 담백하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게 강점이다. 

 

무성하게 잘 자란 미나리 밭을 보면서 제이콥이 데이빗에게 말한다.

 

“할머니가 좋은 자리 찾았어. 맛 있겠다.”

 

어른이 가르쳐 준 삶의 지혜는 그렇게 대를 이어간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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