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일생을 좌우하는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27살 때 난 폭탄운반책에서 폭탄제조책으로 바뀌었다./ 누가 봐도 폭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어서/ 우리는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제주 4·3학살의 서사시 ‘한라산’을 ‘폭탄’이라고 불렀다.”(‘폭탄’ 중에서)
“27살의 비명이자 통곡”이었고 “일생을 좌우한 운명”이 됐던, 장편 서사시 ‘한라산’ 필화 사건을 겪은 시인 이산하가 22년 만에 신작 시집 ‘악의 평범성’(창비)을 상재했다. 시인은 수배 중이던 1987년 제주4·3 사건을 다룬 논쟁적인 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석방 이후 오랜 기간 절필한 채 시민운동을 하다가 몇 해 전에야 활동을 재개했다.
표제 ‘악의 평범성’은 성실한 나치 장교 아이히만이 왜 무시무시한 유대인 학살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렀는가를 분석한 한나 아렌트의 개념으로, 지극히 평범한 시민들조차 깨어있지 않고 성찰하지 않으면 거악에 빠질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시집에 담긴 많은 시들은 한국 현대사의 슬픈 폭력과 함께 부유한 평범한 인간들의 악행을 담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희생된 시신들의 사진과 함께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같은 댓글이나 통통한 꽃게 사진을 올려놓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 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 알도 꽉 차 있답니다”와 같은 글에 절망한 표제작을 보라.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 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악의 평범성1’ 중에서)
한편으론 무고하게 희생되거나 자발적으로 희생한, 또는 선의와 신념을 지향하며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과 익명의 존재를 소환하기도 한다. 이한열(‘운동화 한 짝’), 전우익과 권정생(‘산수유 씨앗’), 인혁당의 희생자들(‘동백꽃’), 친일파를 파헤친 임종국과 그의 아버지(‘나를 밟고 가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아르바이트 학생들(‘악의 평범성3’) 등. 심지어 시 ‘버킷리스트’에선 수배중이던 자신을 은닉 또는 묵인해줬던 119명의 실명을 공개하기도. 기형도, 나병식, 라종일, 박영근, 박종철, 백무산, 유시민, 정호승, 채광석, 한홍구 등등.
시집 곳곳에 필화 사건 이후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이 서늘하게 녹아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심리적 타락이고, 구성원들의 물질적 우악이며, 동지들의 위선과 추락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에겐 실존적 고통이었고 유배였으니.
그러니까, “40대 중반 서교동 골목길의 교통사고와/ 50대 초반 합정동 골목길의 백색테러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반품된 후 모든 게 허망해지고/ 오랫동안 애써 부정하고 망각했던 고문의 악몽마저 되살아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간다”(‘버킷리스트’ 중에서)거나 제주4·3 추념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몸은 감옥 밖으로 나왔지만 ‘이산하 시인’이라는 이름은/ 극좌의 상징으로 30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유배된 상태였다./ 4·3의 진실을 폭로하다 외면당한 금기의 이름이었다./ ‘아—이제야 유배에서 풀려났구나…’/ 혼자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유배지가 어른거렸다.”(‘새로운 유배지’)고 한 그였다.
3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시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전쟁에 패한 장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물끄러미 바라보는 풍경을 노래한 시의 여운은 서늘해서 독자의 시선을 자꾸 되돌리게 만들지도.
“전쟁에 패한 장수가/ 자결 전 낙향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마지막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꽃// 복사밭 건너/ 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복사꽃’ 전문)
그는 ‘시인의 말’에서조차 단테의 ‘신곡’ 가운데 지옥문 앞에 새겨진 글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구절을 인용한 뒤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다음의 서면 인터뷰는 또 얼마나 아픈가. “고문당할 때 가장 힘든 것은 고문자가 웃으며 자기 자식들 자랑할 때이다. 더 힘든 것은 그들이 나와 똑같이 평범한 얼굴들이라는 점이다. 살아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은 인간이 얼마만큼 인간이기를 포기하는가이다. 우리는 가끔씩만 인간이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없더라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진 않는다는 것. 그건 아마 “잘 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두 달 뒤에는 봄이 오고 복사꽃도 피지 않겠는가. 말뿐이지만, 그럼에도 시인이여 힘내시게.
“거듭 말하노니,/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이거늘/ 끝까지 그대들이 그대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중에서)(2021.2.11)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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