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빼앗기고 국제사회도 단절
秋·尹 갈등에 국내 정치도 후퇴
고통 마무리… 희망의 새해 맞길
구순을 앞둔 아버님께 코로나로 인해 외출도 못 하고 얼마나 갑갑하시냐고 여쭸습니다. “옛날 추억들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회상의 즐거움으로 살고 있는데, 올해는 추억할 게 별로 없네.” 그렇습니다. 2020년의 시간은 2019년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코로나19’에 덮여버렸습니다. 일 년이면 과학기술 분야와 같은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성숙에도 큰 의미를 가지는 긴 시간입니다. 2020년 올 한 해 동안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온통 ‘19’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코로나19는 인류가 경험하는 모든 영역을 강타한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하루하루를 마주하는 인간의 일상,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의미와 건강함에 대한 걱정, 개별 국가가 다른 국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 인류에게 다가올 미래의 위협들, 결국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평온한 시기에는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코로나 위기는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와 현시점 국제사회의 정체성을 낱낱이 파헤쳤습니다. 코로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면, 인간의 존재 의미는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기 위함이라는 역설이 가능합니다. 모든 국가가 서로 부대끼면서 서로에게 부(富)를 의존하고 있는데, 이런 국제사회의 정체성이 코로나의 주범이라면, ‘세계화’는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해 보입니다.

시인 유계영은 ‘미래는 공처럼’이라는 시(詩)에서 “경쾌하고 즐거운 자, 그가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라고 읊었습니다. 이 시는 2019년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시’로 뽑혔었는데, 인간의 존재 의미와 국제사회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짚어냈습니다. 코로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2020년을 예고한 ‘19’인 셈이지요. 너무도 “경쾌하고 즐거웠던” 세계화의 달콤함 뒤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언론인 데이비드 굿하트의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역시 201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시인의 생각과 놀랄 만큼 맞닿아 있습니다. 엘리트는 관대하거나 따뜻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세계화의 이익을 독점했습니다. 코로나식으로 옮겨보자면, 약 13%를 조금 웃도는 미국 내 흑인 인구이지만,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 숫자는 백인의 3배가 넘고, 이 숫자가 결국 트럼프의 패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9’의 위기에서 가장 안타까운 면은 모두가 생각해 낸 해법이 ‘단절’이라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차단해야 하는지, 언제 차단해야 하는지, 누구를 어떻게 차단해야 하는지, 코로나가 몰고 온 가장 큰 위협은 ‘단절의 일상화’입니다. 감염병은 속성상 모든 행위자 간의 긴밀한 협력을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 등 모두가 ‘얼마만큼’ 단절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의 반성이 곧 단절이라는 결론은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화의 본질적인 문제는 과도한 상호의존이 아니라, 이익의 공유를 회피하기 위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대상화’하고 편 가르기를 하면서, 세계화와 편 가르기라는 상반된 가치가 악의적으로 공존한 데에 있습니다.
올 한 해가 정확히 열흘 남았습니다. ‘19’의 지배를 당한 2020년은 국내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대 대통령선거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추미애 법무장관과 2019년 검찰총장에 임명된 윤석열 총장 사이의 정쟁은 여타의 모든 정치 이슈들을 덮었고, 그 결과 한국 정치는 리더십, 정의, 사회통합을 포기한 채 2020년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코로나가 지워버린 올 한 해처럼, 2020년은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행히 백신과 치료약 개발 소식이 속속 들어오고 있고, 언제나 언성을 높이고 나면 그 순간이 내가 참아야 할 마지막 분노였던 것처럼, 이번 연말은 코로나19로 인한 마지막 고통이 될 것입니다. 19에 가려버린 2020년을 생각하면서, 여느 때보다 더 알차고 즐거운 새해 계획을 준비할 순간입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제정치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