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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정계 진출 뒤 인생 굴곡 시작… 삼수 끝에 美 최고령 대통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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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1-09 06:00:00 수정 : 2020-11-08 21: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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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최고령 대통령 당선 조 바이든
美 역사상 6번째 최연소 상원의원
교통사고로 아내·딸 한꺼번에 잃어

부통령 땐 큰아들 뇌종양으로 떠나
둘째아들은 마약 등 각종 구설 올라
궂은일 맡은 여동생 ‘믿음직한 책사’

내리 7선… 중도파로 36년 상원의원
오바마 만나 8년간 부통령으로 재임

세 번째 도전 만에 미국 대권을 거의 움켜쥔 조 바이든은 78년 삶의 3분의 2가량을 정계에서 보냈다. 변호사 시절 민주당 지역 모임에서 활동하다 1970년 델라웨어주 뉴캐슬카운티 의회에 입성한 것이 정치 인생의 시작이었다. 2년 뒤에는 공화당 3선 현역 의원이 버티고 있어 민주당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는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며칠 뒤 만 30세 생일이 지나서야 상원의원 취임 선서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을 정도로 젊은 나이였다.

1942년 아일랜드 혈통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0살 때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을 떠났다. 부친이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자동차 세일즈맨 자리를 얻으면서였다. 유년 시절 말더듬증이 심했지만, 조약돌을 입에 넣고 발음 연습을 한 노력과 가족의 격려로 극복했다. 어려서부터 정치를 소명으로 품은 그는 ‘흙수저’ 출신이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던 변호사로 진로를 정했다.

그의 인생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미 역사상 여섯 번째로 어린 상원의원에 당선된 지 6주 만에 사고로 부인 닐리아와 13개월 된 딸 나오미를 잃었다. 생존한 두 아들 보와 헌터도 뼈가 부러지고 머리를 다칠 정도의 큰 사고였다. 의원직을 포기하려는 바이든을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붙잡았다. 아이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취임 선서를 한 그는 워싱턴까지 왕복 4시간 거리를 기차로 통근했다. 엄마를 잃은 두 아들과 최대한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77년 질 제이컵스와 재혼해 딸 애슐리를 낳았다.

바이든은 내리 7선을 하면서 36년간 상원의원으로 일했다. 그중 8년은 법사위원장, 4년은 외교위원장을 맡으며 정치·외교가의 굵직한 사건을 두루 경험했다. 이념적으로는 당내 중도파로 분류된다. 흑백 통합 교육을 위해 추진된 강제 버스 통학 정책에 반대한 게 대표적 예다. 교실 내 인종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이들이 집에서 먼 학교에 배정되고, 결과적으로 백인 학생들이 공립학교를 떠나게 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인종분리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다. 1991년 걸프전에는 반대했지만, 2001년 9·11 테러 뒤 이라크 침공은 지지했다.

대선에 처음 도전한 1988년 무렵 그는 소수자·하층민이 ‘딛고 설 수 있는 발판’을 정치가 제공해줘야 한다는 영국 노동당 닐 키넉 대표의 광고에 매료됐다. “왜 조 바이든은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갔을까”라고 연설을 시작하며 광고 내용을 유세장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처를 밝히지 않는 바람에 표절 시비가 불거지자 민주당 대선 경선 레이스에서 하차한다. 얼마 뒤에는 뇌동맥류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위기를 겪었다.

2008년 두 번째 대선 도전은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흑인 정치인 버락 오바마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의 경험과 연륜을 높이 산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돼 8년간 부통령을 지냈다.

사진=AFP연합뉴스

그는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을 지낸 큰아들 보를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이자 분신처럼 여겼으나, 보는 2015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때 받은 충격으로 2016년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둘째 아들 헌터는 바이든의 아픈 손가락이다. 변호사 활동을 하다 2001년 로비스트로 변신한 헌터는 마약, 형수와의 불륜 등 각종 추문에 휩싸였다. 헌터가 일하던 우크라이나 에너지회사에 대한 검찰 수사를 2016년 부통령이던 바이든이 압력을 가해 막았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사진=신화연합뉴스

여동생 밸러리는 바이든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자 책사로 꼽힌다. 바이든은 학창 시절 버스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 밸러리를 차마 고발할 수 없어 선도부원 배지를 반납했다. 밸러리는 그런 오빠가 카운티 의원에 출마했을 때부터 모든 선거운동에 관여하며 궂은일을 도맡았다. 이번 대선에서는 2선으로 후퇴했으나, 경선 초반 저조한 성적으로 낙담에 빠진 오빠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밸러리의 남편은 바이든의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 잭 오언스다.

 

◆美 231년 역사상 첫 ‘직장인’ 영부인

 

46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 바이든 민주당 당선인의 아내 질 바이든(사진)은 지금껏 없던 퍼스트레이디상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대부분 남편 내조에 치중하는 정치인 부인들의 행보와 달리 본업을 수십년째 유지한 사상 첫 ‘직장인 영부인’이 된다는 점부터 이목을 끈다. 교육자로서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도 정치인 바이든에게는 든든한 조력자로 활약해 온 파트너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1951년생으로 뉴저지주 출신인 질은 18세부터 쉬지 않고 파트타임 일을 했고, 델라웨어대학교에서 영어학을 공부한 뒤 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일을 하며 교육학 석박사와 영문학 석사 등 학위 3개를 땄다. 미 언론이 그를 ‘바이든 박사(Dr. Biden)’로 표기하는 이유다. 이후 노던 버지니아 커뮤니티칼리지에서 강사로 일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승자로 선언된 뒤 2020년 11월 7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부인 질 바이든과 함께 발언한 뒤 손을 흔들고 있다. 윌밍턴=AFP연합뉴스

30여년간 교육자로 일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 정체성은 교사이며 남편의 삶과 내 삶은 별개”라고 밝혔다. 질은 바이든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강사로 계속 출강했다. 유급 일자리를 가진 최초의 세컨드레이디(부통령 부인) 타이틀을 얻었다. 지난 8월 “영부인 자리에 오르더라도 본업을 유지하겠다”고 해 주목받았다. 바이든 당선인은 선거 유세 때 자신을 ‘질의 남편’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231년 미국 대통령 역사에서 퍼스트레이디가 직업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질은 1975년 이혼 소송 중 33세 상원의원이었던 바이든 당선인을 만났다. 당시 바이든 당선인은 3년 전 차 사고로 부인과 딸을 잃었고, 어린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고 있었다. 질은 바이든 당선인의 청혼을 다섯 번째 만에야 받아들여 1977년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질은 바이든 당선인의 선거운동 때부터 적극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부통령 후보를 선택하는 과정에 질의 의견이 반영됐고, 일부 후보자는 그와 화상 면접을 했다. 교육자 경력을 살려 대선 캠프 내 교육 관련 태스크포스(TF)에도 참여했다. WP는 질에 대해 “그야말로 파트너십이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멜라니아 트럼프와 다른 질 바이든의 특징으로 “가만히 선반에 앉아있는 트로피이기를 거부한다”는 점을 꼽았다. 지난 3월 로스앤젤레스 집회에선 연단에 난입한 시위자의 손목을 잡아채 남편을 보호하는 등 보디가드 같은 모습으로 화제를 모았다.

 

질 본인 스스로도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의 참모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고 바이든 당선인도 질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드러내왔다. 고령인 바이든 당선인의 건강이 나빠질 경우 질이 숨은 실세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유태영·정지혜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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