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간 ‘2인 1직업’ 수행 당연시
여성 고위직 진출로 ‘역할 전이’
변화된 상황 새 규범·관행 필요
“말려진다고 말려질 사람(남편)이 아니다.” 최근 외교부 국정감사장에서 큰 웃음을 유발했던 강경화 장관의 발언이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그런 남편”을 둔 한국의 아내들이 의외로 많았던 탓일까, 예상외로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악화일로에 있던 여론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는 후문이다.
일찍이 외교관 부부를 대상으로 배우자의 위상 및 역할의 특성을 규명한 연구에 따르면 외교관의 배우자는 전형적인 “지위 유지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곧 외교관의 배우자는 (주로) 남편이 외교관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역할 지원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마치 2인3각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처럼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유기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이 연구의 골자였다.

이후 2인이 1직업을 수행하는 실례로 외교관 부부 이외에도 기업의 CEO, 고위 공직자 및 정치가, 군인 등으로 대상을 확대하여 유사한 연구가 수행된 바 있다.
이들 직업의 공통점으로는 배우자의 협력이 필수라는 점 이외에도, 다른 직업과 비교해 볼 때 직업 수행을 위한 지리적 이동성이 높기에 거주 지역을 자주 옮겨 다녀야 하는 만큼 부부 중 한 사람(주로 부인)의 희생이 필수라는 점 또한 지목된 바 있다.
배우자의 지위 유지 기능을 요구하는 직종의 경우 지금까지는 당연히 남편이 외교관이요, 기업의 CEO요, 고위 공직자였기에 부인의 내조 역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활발해짐에 따라 일종의 ‘역할 전이’가 발생하면서 남편이 부인을 외조해야 하는 상황이 가끔 발생하기 시작한 것 또한 사실이다.
만일 부부간 입장이 바뀌어 남편이 외교부 장관직을 수행 중인데 부인이 코로나19 위기와 같은 엄중한 상황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계획해 왔던 꿈을 이루고자 미국행을 감행하는 일이 발생했더라면 주위의 반응이 어떠했을까 궁금해진다. 물론 그토록 용감무쌍한(?) 부인을 찾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물론 장관 남편의 행동을 사생활이니 보호받아 마땅하다고 치부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사회 특유의 수신제가(修身齊家) 이후 치국(治國)이니 고위 공직자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고려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도 고려의 대상이다. 공사 영역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는 데다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라면 장관 남편의 개인행동은 미디어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을 것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공사 영역이 긴밀히 연결된 한국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배우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중시함은 문화적 저항 내지 심리적 불편함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우리네 가족은 구성원의 사회적 성공과 명예로운 출세를 위해 가족이 보유한 제한된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가족 공리주의가 공고함을 고려할 때 단순히 사생활로 공적 책무를 덮어버리기엔 아쉬움이 크다.
그런가 하면 2인 1직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이런저런 구설에 올랐던 경우 배우자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에서 성 역할에 따른 전형적 책임회피 스토리가 등장해 왔음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고위 공직자 남편들은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아내가 남편 몰래 한 일이다’ ‘나(남편) 자신 바쁜 업무로 인해 미처 챙기지 못하는 사이에 아내 홀로 과감한 거래를 했다’ ‘아내가 동원한 자금 내역은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등을 이유로 내세우며 빈번히 책임을 전가해 오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입장을 바꾸어 고위 공직자인 아내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남편에게 책임을 미룬다면 이 또한 과도한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특히 가족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일차적 책임은 아내에게 있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기에, 아내의 책임회피나 책임 전가에 따른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강 장관 부부의 사례는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졌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만큼은 의미심장한 측면이 있다. 이제 변화된 상황에 부응하여 새로운 규범 및 관행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앞으로는 2인 1직업의 경우도 아내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례가 증가할 것임이 확실한 만큼 과거의 관행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일방적 희생을 전제로 하는 2인 1직업 모델을 고수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리란 생각이다.
덧붙여 공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가 중요한 자리라면 수신제가 후 치국의 중요성을 여전히 미덕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가족의 사생활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불필요한 사회적 관심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개방적인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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