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넘치는 만리포 해수욕장/예쁜 낭새섬 즐기는 천리포 여유로운 휴식/억겁의 시간 바람과 모래가 빚은 예술 신두리 해안사구/해를 품는 꽃지 할미·할아비 바위

서울에서 장사를 하던 아버지는 해마다 여름 피서철이면 어김없이 가족과 만리포를 찾았다. 영등포시장상인회에서 빌린 버스 3대에 얼음덩어리와 각종 반찬, 콜라와 사이다가 잔뜩 담긴 묵직한 아이스박스가 차곡차곡 실리는 모습은 어찌나 설레던지. 회원 가족을 가득 태운 버스는 왁자지껄 흥이 넘친다. 마이크를 쥐고 사회를 도맡던 아버지는 분위기를 띄운다며 노래도 한 곡조 뽑는다. 그렇게 떠들다 보면 어느새 충남 태안 만리포해수욕장이다. 숙소는 허름한 민박집으로 기억된다. 신나게 물놀이하고 허기져 돌아오면 대문 너머로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어머니들이 넓은 마당에서 버너로 밥을 짓고 함께 식사 준비하느라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연신 훔친다. 설과 추석연휴에도 단 하루, 그것도 오전에만 문을 닫고 개미처럼 일하던 시장 상인들. 2박3일간의 짧은 휴가였지만 그 순간 만리포 해변은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 같은 파라다이스였으리.

#낭만 넘치는 만리포 해수욕장
만리포를 마지막으로 찾은 지 30년도 넘은 것 같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니 예전 모습은 당연히 없다. 낡은 민박집은 펜션으로 바뀌고 해변에는 예쁜 카페들이 즐비하다. 이맘때면 피서객들로 북적거릴 때이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아직 해변은 한산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빨간 파라솔이 넉넉한 간격으로 놓였고 하늘, 구름, 바다색이 근사하게 어우러지며 낭만을 더한다.

10대 3명이 신나게 모래찜질을 한다. 친구 한 명을 머리만 남긴 채 두꺼운 모래에 가둬버렸다. 옴짝달싹 못하는 친구를 보며 둘은 박장대소한다. 사진 좀 찍자고 청하자 “얼굴도 나오게 잘 찍어 달라”며 흔쾌히 수락한다. 녀석들의 밝은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 만리포에서 놀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동심으로 물든다.

왼쪽 만리포 선착장에는 빨간 등대가 섰고 강아지를 데려온 여행자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다. 원피스를 차려입은 어미는 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꼬마 여자아이 둘을 건사하느라 분주하다. 수심이 얕고 넓은 백사장이지만 안심이 안 되나 보다. 해변의 또 다른 주인은 갈매기. 예전에는 없던 모습인데 요즘 갈매기들은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피서객들 바로 옆에 떼로 앉아 함께 휴식하며 셀카도 찍어준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안반도와 안면도의 해안선은 무려 230㎞. 이를 따라 저마다 개성 넘치는 해수욕장 30여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갯벌 해변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서해의 아름다운 섬과 기암괴석, 해안사구가 어우러지며 독특한 풍광을 선사한다. 여름 피서객들의 천국인 까닭이다. 그중 1955년 개장한 만리포가 맏형 격으로 대천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과 함께 서해안 3대 해수욕장으로 꼽힌다.

활처럼 아름답게 휘어진 모래사장은 길이가 2㎞, 면적은 23만1406m²에 달한다. 특히 평균 수심이 1∼2m, 경사도 2도로 아주 완만하고 7∼8월 평균 수온은 섭씨 22도 정도여서 안전하고 쾌적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해변 뒤에는 소나무숲이 병풍처럼 울창해 텐트를 치고 야영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숲과 바다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으니 최고의 여름 피서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매년 만리포를 찾은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나 보다. 해양스포츠, 갯바위낚시 등 즐길 거리도 많다.

32번 국도를 서쪽으로 달리면 길이 끝나는 곳이 만리포다. 입구에 설치된 13m 높이 사각 워터스크린이 여행자들을 반긴다. 원형의 가운데로 물을 떨어뜨리고 LED 조명을 비춰 영화, 뮤직비디오를 상영한 덕에 만리포 밤풍경의 명물이 됐다. 부모님과 함께 간 휴가라면 해변의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에 꼭 들러보자. 어르신들에게 인기 있던 시각장애 가수 이용복씨가 운영하는 ‘정통 경양식 카페’다. 매일 라이브로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니 저렴한 밥값으로 공짜 콘서트도 즐길 수 있다.


만리포 북쪽 2㎞에는 천리포, 또 그 위에는 백리포가 이어진다. 천리포 해변은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좀 쓸쓸하다. 하지만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지면 길을 내어주는 예쁜 낭새섬을 즐기며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만리포와 달리 해변은 모래와 알록달록한 예쁜 조약돌로 꾸며졌다. 해안에 우뚝 솟은 절벽이 그늘을 만들어 줘 뜨거운 태양도 피할 수 있다. 천리포수목원과 함께 묶어 여행하면 된다. 백리포는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아담한 해수욕장. 서해안 해수욕장 중 물이 가장 맑은 곳으로 소문날 정도로 훼손되지 않은 자연 경관이 뛰어나다. 해안 양쪽의 절벽은 괌과 사이판을 능가할 정도로 아름답다.


#억겁의 시간 바람과 모래가 빚은 예술
그래도 코로나19가 걱정되니 사람 없는, 좀 더 광활한 해변을 원하는가. 신두리 해수욕장이 근심을 덜어줄 것이다. 신두리 해변 모래사장은 무려 길이가 7㎞나 이어져 오히려 사람이 그리울 정도다. 빙하기 이후 1만년 동안 모래와 바람이 빚어낸 거대한 조각작품, 신두리 해안사구를 품고 있다. 국내 최대의 해안사구로 전체 길이는 3.5㎞, 최대 폭 1.3㎞이며 가장 높은 곳이 19m다.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사막지형으로 입구에 들어서니 다른 나라에 온 듯 아주 낯선 풍경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바람이 부드러운 곡선의 모래언덕을 만들어 놓았는데 몽골의 평원처럼 푸른 풀들이 사막 곳곳을 수놓아 황량하지만은 않다. 데크길을 따라 해안사구를 구석구석 둘러본다. 모래 언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마치 사하라사막이라 속여도 믿겠다.


바람은 어떻게 모래로 이런 아름다운 작품을 빚었을까. 보는 내내 신기하다. 한 방향으로만 부는 강한 북서 계절풍은 모래를 해안가로 운반했고 오랜 세월 퇴적된 모래는 이렇게 아름다운 언덕이 됐다. 현재의 사구 밑에는 빙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고사구가 자리 잡고 있다는데 나이는 수십만년에 달한다. 전 사구, 사구초지, 사구습지, 사구임지 등 사구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풍경을 지녀 슬로시티 태안의 가장 이색적인 여행지로 젊은 층에게 인기다.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통보리사초, 갯그령, 순비기나무, 조롱박먼지벌레, 개미귀신, 삵, 애기뿔소똥구리 등 생소한 생물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다.

해안사구 뒤쪽 두웅습지에는 연꽃이 가득하다. 사구는 이처럼 배후에 습지를 만들어 내는데 2007년에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모래로 만들어진 호수에는 바닷물이 아닌 민물이 고여 있다. 멸종 위기종 금개구리가 산다. 부여의 왕 해부르가 얻은 금빛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금와왕이어서 금개구리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다.



#해를 품는 꽃지 할미·할아비 바위
꽃지는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태안의 해수욕장이다. 커다란 해가 불타듯 떨어지는 장엄한 노을 덕분이다. 전북 부안군 채석강, 인천 강화군 석모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일몰 명소. 할미·할아비 바위 덕분이다. 꽃지해변에는 독특한 모양의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솟아 있는데 애틋한 전설을 품었다.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826∼836) 때 장보고의 부하 승언장군이 안면도 기지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장보고가 급하게 북진 명령을 내렸고 장군은 아름다운 아내 미도부인과 생이별한다. 부인은 바닷가 높은 바위에 올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으로 기도하며 수십년을 기다리다 그만 바위에서 죽는다. 얼마 뒤 폭풍우가 몰아치며 하늘을 깰 듯한 천둥소리가 나더니 할미바위 옆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이를 할아비 바위로 부르게 됐다.


일몰 때 두 바위 사이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 꽃지라는 예쁜 이름을 얻었는데 해변에 텐트를 치고 여유 있는 휴가를 즐길 수 있다. 최근 아일랜드 리솜이 리노베이션을 마치로 새로 문을 열면서 럭셔리한 여름휴가지로 업그레이드됐다.
태안=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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